송흥록

송흥록

[ 宋興祿 ]

요약 성악가(판소리). 순조(1800~1834)·헌종(1834~1849) 무렵 판소리명창. 전라북도 운봉(雲峰) 비전리(碑殿里) 출생. 김성옥(金成玉)의 매부이고, 송광록의 형.

역대 판소리명창 기량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판소리에 그때까지 없었던 을 도입하여 소리를 짜고 으로 일관됐던 판소리선율의 (羽調)와 (界面調)의 선율을 오늘날과 같이 발전시켰다.

(申在孝)의 "광대가"(廣大歌)에서 시중천자(詩中天子) 이태백(李太白 701~762)에 비유한 그의 변화무쌍한 판소리기교는 판소리 발전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에 독보건곤(獨步乾坤)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최근 복원된 송흥록의 생가 및 동상(『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최근 복원된 송흥록의 생가 및 동상(『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판소리의 중시조(中始祖)로 알려진 송흥록의 천자(天資)는 고매(高邁)했고, 기예는 절륜(絶倫)했으며, 포부가 호대(浩大)함에는 아무도 따를 수 없었다. 명창 (牟興甲)은 선배인 송흥록을 극히 추존(推尊)했을 뿐 아니라 가왕(歌王)의 칭호까지 바쳤다 한다. 그의 매부인 김성옥(金成玉)에게 를 처음 듣고 그것을 오랫동안 연마하여 완성시켰고, 우조·계면조 기타 모든 것이 신(神)의 경지에 들어섰다. 진양조를 완성시키기까지에 있었던 송흥록과 맹렬(孟烈) 사이의 여러 뒷이야기가 전한다.

귀신이 우는 듯한 느낌을 주는 (鬼哭聲)에 능통한 송흥록의 장기는 벤강수(변강쇠)타령과 중 "," 그리고 이다. 송흥록의 더늠으로 후세에 전하는 다음의 노래는 이 방창(倣唱)하고 ·이 전창(傳唱)한 것은 정노식(鄭魯湜)의 『朝鮮唱劇史』에 전한다.

송흥록과 관련 기사는 안민영(安玟英)의 『』(金玉叢部 1885) 권127에 이렇게 전한다.

"나는 진주(晉州)에 있을 때 풍토가 맞지 않아 풍증이 생겨 반신불수가 되었다. ··· 창원 경패의 집에 돌아와 여러 날을 머물며, 전날에 다하지 못한 정을 풀었다. 그러고는 함께 칠원에서 30리 떨어진 송흥록의 집에 도착하자, 맹렬이 역시 집에 있다가 나를 보고 기뻐하였다. 4~5일 질탕하게 놀다가 헤어졌는데, 이때 이별이 어렵다는 것을 정말 깨달았다"라고.

송흥록 관련 기사는 안민영의 『금옥총부』 권141에 이렇게 전한다.

"임인년(1842) 가을에 우진원과 함께 호남 순창(淳昌)에 내려갔다가, 주덕기의 손을 잡고 운봉(雲峰)의 송흥록을 찾아갔다. 신만엽·김계철·송계학 등 일대의 명창들이 마침 그 집에 있다가, 나를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함께 머물며 수십 일을 질탕하게 보낸 뒤에 다시 남원으로 향했다. 전주기생 명월(明月, 자는 弄仙)이 관찰사에게 죄를 지어 남원(南原)에 유배와 있었다. 그의 자색을 보니 매우 아름다웠지만 음률에는 서툴렀다"라고.

1826년(순조 26)에 지은 (申緯)의 「」(觀劇詩)에 나오는 명창이고, 1827년(순조 27)에 작성된 「」(八道才人等狀)에 나오는 명창이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468쪽
  •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011년,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