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선

조상선

[ 趙相鮮 ]

요약 성악가(판소리). 판소리명창·작곡가. 전라남도 남원(南原) 출생.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研究會) 상무이사·영업부이사·외교이사·흥행부이사.
출생 - 사망 1909년 ~ 1983년

1917년 전북 순창(淳昌)에서 활동한 김두영에게 창을 배웠고, 1922년 창악협률단(唱樂協律團)에 들어가 공연활동에 참가하였다. 1934년 에서 공연활동을 벌이면서 (丁貞烈) 명창에게 를 배웠다. 1935년 조선성악연구회의 공연 때 용왕 역을, 1936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의 직속단체로 (唱劇座)가 창단됐을 때 ·· 등과 함께 창극활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 4월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좌 창립기념공연으로 의 무대에 올린 창극 흥보전 공연 때 마당쇠 역을 맡은 그는 (흥보)·(흥보처)·(놀보)·(놀보처) 등과 함께 출연했다. 1936년 2월 9~11일 조선성악연구회의 가극(歌劇) 배비장전(裵裨將傳) 공연 때, 1936년 6월 8~11일 연쇄창극(連鎖唱劇) 유충렬전(劉忠烈傳) 공연 때, 최일귀 역을 맡은 그는 정남희(유충렬)·(충렬 부인)·강태홍(정한담)·오태석(충렬 아버지)·(충렬 장인) 등과 함께 출연했다고 조선일보(朝鮮日報) 1936년 5월 26일자에 나온다.

1936년 10월 28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가극 흥부전 공연 때, 1937년 6월 21~25일가극 편시춘 공연 때, 그리고 1938년 3월 13~17일 가극 토끼타령 때 출연했다. 1938년 5월 23일 조선성악연구회 제5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선임되었다.

1938년 8월 8일 창극 옹고집전(雍固執傳) 때, 그리고 1939년 1월 29일 창극 춘향전 때, 1939년 숙영낭자전 공연 때 백진사 역을 맡은 그는 이동백(총지휘)·정정렬(편곡)·김용승(기획), 그리고 정남희(백선군)·박녹주(숙영낭자)·임소향(모친)·(매월)와 함께 출연하였다. 1937년부터 홍루몽(紅樓夢) 등 10여 편의 창극작품의 창작과 공연에 참가하였다. 1938년 정정렬의 사망 후 제자를 맡아 키웠다.

1939년 가 창단한 (花郞唱劇團)의 ·· 등과 함께 춘향전을 비롯해 창작 사극 "봉덕사(奉德寺)의 종소리"와 김원학의 창작 창극 ""(八潭春夢)의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39년 화랑창극단이 무대에 올린 김용성(金龍成) 작의 ""를 연출했다. 1939년 5월 22일 조선성악연구회 제6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선출됐다. 1939년 10월 7~16일 동양극장에서 열린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창극 춘향전 때 변진사(邊進士)로 출연했다. 1939년 10월 7~11일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 춘향전·심청전을 공연할 때, 그리고 1940년 2월 20~30일 창극 옥루몽(玉樓夢) 때 양현(楊賢)으로 출연하였다.

1940년 3월 18일 한해구제명창대회 때 출연했고, 『朝光』(1937) 17호에 발표된 "조선성악연구회 현재 멤버"에 소개되었다. 1934~1941년 최명곤과 함께 "개고리타령"·"김매는 노래"·"" 등의 여러 를 방송하기 위해 (京城放送局)에 출연했다. 그가 취입한 "까투리타령"·"둥게타령"·""(梅花打令)·""·""은 폴리돌음반에 전한다. 조상선이 과 함께 취입한 가야금은 오케음반에 전한다. 화랑창극단의 단원인 그는 1940년 12월 24일 제일극장에서 박석기가 창단한 화랑창극단의 창단공연 때 한주환·김여란·김소희 및 조진영·한독득·엄준옥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3년 (朝鮮唱劇團)의 작곡·연출을 하면서 공연에 참가했으며, 1945년 3월부터 전남 남원(南原)에서 박동실·공기남·유창균·김룡기 등과 공연단을 만들어 지방공연을 다녔다.

1945년 8·15광복 직후 광주에 사는 박동실·오태석· 등과 함께 (光州聲樂研究會)를 조직하고 대춘향전을 창단공연을 하였다. 1946년 정남희와 함께 산하단체인 (國劇社)의 대표였다. 1946년 국극사 주최 "선화공주" 공연 때 쇠돌이 역으로 출연했으며, 1946년 서울에서 정남희와 함께 서울 국악원과 합동으로 창극 춘향전을 시공관에서 공연했을 때 출연하였다.

1947년에 8월 새로 구성된 국악원의 국극부장(國劇部長)을 맡아 원장 (朴憲鳳), 총무국장 (劉起龍), 공연국장 (任曙昉), 기획국장 (李致鍾), 서무부장 (鄭己重), 창악부장 박동실(朴東實), 민요부장 (崔景植), 기악부장 정남희(丁南希), 무용부장 (金千興), 연구부장 (蔡東鮮)과 함께 활동했고, 국극사의 대표 정남희, 이사 오태석··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8년 국극사의 창단원인 조상선·정남희· 등과 함께 유리촌 작 조상선 안무 및 편곡의 "선화공주"(善花公主)를 무대에 올렸다. 1950년 4월 국극사 주최 만리장성(萬里長城) 공연 때 석흥 역을 맡은 그는 정남희(맹진사)·(成秋月: 부인)·신숙(맹강녀)·(정도령)·(칠성)·(시녀)·(만명)·백점봉(장백)·(무장)과 함께 출연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월북하여 국립민족예술극장 창극배우, 1951년 3월 결성된 의 고전음악 분과위원을 맡았다. 1955년 공훈배우, 1959년 인민배우가 되었다. 민족가극 "황해의 노래"·"이순신장군"을 비롯한 수십 편의 민족가극, 창극창작과 공연에 참가했다. 중창곡 "어랑타령"을 편곡했고, 수 편의 민족성악작품과 판소리 작품을 창작·공연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834~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