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소향

임소향

[ 林素香 ]

요약 성악가(판소리). 본명은 임유원(林酉元). 북한의 민족성악가수. 경북 김천(金泉) 또는 성주군 초전면 대장리 출생. 조선권번(朝鮮券番) 기생. 장기는 가야금.
출생 - 사망 1918년 ~ 1978년
임소향

1918년 임화춘(林和春)의 1남5녀 중 셋째 딸로 출생한 그녀는 가난 때문에 남의 집 수양딸로 보내졌다. 양부모에 의해 소리에 입문했으며, 대구 달성권번(達城券番)에서 소리수업을 받을 때의 동기(童妓) 시절 검무·승무·살풀이춤도 배웠다.

상경하여 1930년대 정정렬(丁貞烈)에게 판소리를 배운 그녀는 1934년 일본에서 취입한 심청전 전집과 화용도 전집 음반에서 조조군사 설움타령을 불렀고, 뺑덕어멈 역할을 맡았다. 낱장 음반으로는 정남희·조앵무와 함께 부른 폴리돌의 "농부가"와 빅타의 춘향가 중 "이별가"가 있다.

1935~1941년 임종성(林鍾成)·정석연(鄭石燕)·정원섭(丁元燮) 등과 함께 가야금병창(伽倻琴併唱)·"강상가"(江上歌)·"강상(江上)에 둥둥"·"개고리타령"을 포함한 십여 곡의 민요단가 그리고 남도잡가(南道雜歌)·사설시조·시조 등을 방송하기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하였다.

1936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研究會)의 직속단체로 창극좌(唱劇座)가 창단됐을 때 강태홍·김세준·김연수 등과 함께 창극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의 주최로 열린 1936년 2월 9~11일 가극(歌劇) 배비장전(裵裨將傳) 공연 때 그녀는 송만갑·이동백·김창룡 등과 함께 출연했다고 조선일보(朝鮮日報) 1936년 2월 8일자에 전한다. 1936년 4월 흥보전 공연 때 놀보 마누라 역을 맡아 오태석(흥보)·박녹주(흥보 마누라)·정남희(놀보)·조상선(마당쇠) 등과 함께 공연하였다. 같은 해 9월 15~16일, 25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가극 춘향전 공연 때 월매 역을 맡은 그녀는 정남희(이도령)·오태석(방자)·김재선(金載先: 사령)·박녹주(춘향)·김창룡(사또)·이동백(운봉현감)·송만갑(곡성현감)·정정렬(임실현감) 등과 함께 출연했다. 1936년 12월 15~20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가극 심청전 공연 때 뺑덕 어머니로 출연하였다.

1937년 2월 26~3월 2일 가극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의 공연 때, 6월 21~25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가극 "편시춘"(片時春) 때 출연했다. 1938년 8월 8일 창극(唱劇) 옹고집전(雍固執傳) 때 옹고집의 어머니로 출연했고, 10월 4~5일 새 창극 농촌야화(農村夜話)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39년 1월 29일 창극 춘향전 때 월매(月梅)로 출연했고, 10월 7~16일 창극 춘향전 때 월매로 출연했으며, 동양극장에서 숙영낭자전을 창극화해 무대에 올렸을 때 모친(母親) 역을 맡은 임소향은 이동백(총지휘)·정정렬(편곡)·김용승(기획), 그리고 정남희(백선군)·박녹주(숙영낭자)·조상선(백진사)·김주(매월)와 함께 출연했다. 1940년 2월 20~30일 창극 옥루몽(玉樓夢) 공연 때 허부인(許婦人)으로 출연하였다.

창극활동을 통해 명고수 한성준(韓成俊)의 눈에 띄어 한성준의 수양딸이 되어 한때 한성준무용단원으로 온양 출신의 이강설과 장홍심(함흥) 등과 함께 무용수로 활동했다. 1936년 8월 28~29일 수해구제구악대회 때 및 1938년 3월 12~13일 여류명창대회 때 출연했다. 1938년 5월 23일 조선성악연구회 제5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선임됐으며, 1939년 5월 22일 조선성악연구회 제6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당선되었다.

1939년 박석기(朴錫紀)가 창단한 화랑창극단(花郞唱劇團)의 조상선·한주환·김여란 등과 함께 춘향전을 비롯해 창작 사극 "봉덕사(奉德寺)의 종소리"와 김원학의 창작 창극 "팔담춘몽"(八潭春夢)의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40년 1월 15~16일 조선음악연구회의 일류명창대회 때, 3월 18일 한해구제명창대회 때, 3월 20~21일 밀양명창대회(密陽名唱大會) 때 출연하였다.

1940년 12월 24일 제일극장에서 화랑창극단의 공연 때 조상선·한주환·김여란 등과 함께 출연했고, 1940년 한양창극단(漢陽唱劇團) 창립에 참가했다. 1943년 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 배우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취입한 음반으로는 Polydor 19235AB 창극 심청전 전집 및 19277B 화용도 전집이 있다. Columbia 40075 등에 판소리 흥보가와 단가 "고고천변"(皐皐天邊)을 함한 여러 노래를 취입했으며, 빅타음반에서 김초향 등과 함께 흥부가(KJ-1087 등) 외 여러 곡을 취입하였다. 그녀가 취입한 민요 "농부가"·"성주푸리"는 일본 빅타음반에 전하고, 그녀가 가야금병창(伽倻琴併唱)으로 취입한 "고고천변"·"골패타령"·"까투리타령"을 포함한 10여 곡의 민요와 단가 등은 폴리돌음반에 전한다. 『三千里』(1936) 8권 8호에 발표된 "조선·한성·종로 삼권번(三券番) 기생 예도(藝道) 개평(慨評)"에 소개되었다.

해방 직후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의 창극단에서 오태석·백점봉·조상선 등과 함께 활동했고, 1948년 8월 15일 남한정부가 수립되고 좌익음악인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월북하였다.

1950년부터 평양국립민족극장 배우로 활동했고, 1952년 공훈배우가 됐으며, 국기훈장 2급을 비롯한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747~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