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준

한성준

[ 韓成俊 ]

요약 타악기(북) 연주가·무용가. 일제강점기 명고수(名鼓手). 본관은 청주(淸州).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생.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의 총무·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研究會) 승무부(僧舞部) 이사·영업부이사.
출생 - 사망 1874년 ~ 1941년
한성준

세습무가(世襲巫家) 출신으로 여덟 살 때부터 북채를 잡고 외조부 백운채(白雲採)에게서 북치는 법을 배워 기량을 높였다. 그 후 한성준은 박순조(朴順祚)의 문하에 들어가 완벽을 기하였다. 서학상에게 줄타기와 땅재주를 배운 그는 고수로서는 17세부터 창방(唱榜)을 열다섯 번 치렀고, 무용으로서는 고종 때 참봉(參奉)의 칭호를 하사 받았다.

그 후 상경해 23살부터 김창환····· 등 여러 들의 고수로 활동한 그는 창극장단인 ····의 완급장단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높은 기량뿐 아니라, ········ 등의 춤 장단에도 능숙한 명고수였다. 명고수이자 무용수·무용교육자였던 한성준은 (圓覺社)·(光武臺)·(朝鮮劇場)·(團成社)·우미관(優美館) 등의 극장에서 농악무·검무와 같은 민속무용을 가지고 출연함으로써 무용가로 이름을 떨쳤다.

1909년 원각사의 폐지 이후 송만갑 명창이 조직한 송만갑협률사(宋萬甲協律社)라는 사설 유랑창극단에서 이동백·김창룡··이선유 등의 단원과 함께 주로 지방에서 공연활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은 후 경남 통영(統營)공연을 끝으로 해산하였다.

1915년에 설립된 (京城舊派俳優組合)의 평의원. 그는 조합장은 강경수, 부조합장은 와 , 총무는 과 , 회계는 , 선생은 김창환·이동백·, 사무는 윤병두, 평의원은 곽천희·김기봉·이금희, 등 총 30명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8~1941년 ·김난파·김녹주 등과 함께 ··""(皐皐天邊)·"광한루 경개"(廣寒樓景槪)·""·""를 포함한 30여 곡의 와 등 여러 갈래의 음악을 방송하기 위해 (京城放送局)에 출연하였다.

1931년 3월 30~31일 (朝鮮音律協會)의 제2회 공연 때, 5월 3~7일 조선명창대회 때 출연했으며, 9월 21~23일 제2회 때 출연했다. 1932년 1월 22일 조선악정회를 창립했을 때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1932년 1월 23일 악정회(樂正會) 창립 때에도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다. 1932년 6월 22일 조선음률협회의 제3회 공연 때, 1933년 2월 25일 조선명창대회 때 정정렬···와 함께 출연하였다.

1933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朝鮮音樂舞踊研究會)를 조직하고 그동안 흩어진 무용을 체계화하여 (僧舞)·(鶴舞)·태평무(太平舞) 등을 무대화했다. 1933년 순천(順天) 출신 김종익의 재정적 후원으로 설립한 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인 그는 1934년 5월 11일 그는 이동백··, 등의 발기인과 함께 1934년 4월 24일에 설립한 조선성악원을 조선성악연구회로 개칭하여 다시 출범시켰다. 조선성악연구회의 (唱劇座)에서 송만갑·이동백·정정렬 등과 함께 1936~1939년 별주부전(鼈主簿傳)·(裵裨將傳)·유충렬전(劉忠烈傳)··· 등의 공연 때 출연하였다.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김소희·박녹주·정정렬·이화중선·임방울·한성준(박황 제공)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김소희·박녹주·정정렬·이화중선·임방울·한성준(박황 제공)

1935년 의 터불림장단을 듣고 그가 안무한 태평무(太平舞)는 강선영(1925년생)이 전승하여 (重要無形文化財) 제92호로 지정되었다. 1935년 12월 23~24일 창원향우회(昌原鄕友會) 주최 조선명창대회 때 출연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의 주최로 열린 1936년 2월 9~11일 가극 배비장전 공연 때, 9월 15~16일, 25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가극 춘향전 공연 때, 그리고 10월 28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가극 흥부전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37년 2월 26~3월 2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가극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의 공연 때, 6월 21~25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가극 편시춘(片時春) 때, 1939년 1월 29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창극 춘향전 때, 1940년 2월 20~30일 창극 옥루몽(玉樓夢) 때, 그는 강태홍······과 함께 관현반주를 맡았다. 1938년 5월 23일 조선성악연구회 제5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선임됐고, 1939년 5월 22일 조선성악연구회 제6회 정기총회 때 이사장으로 당선되었다.

1937년 6월 11일 빅타 축음기회사가 춘향전 전편(全篇)을 취입할 때, 1938년 1월 11일 김석구독창회 때, 그리고 1940년 3월 16~17일 한해구제명창대회 때 출연하였다. 1938년 6월 23일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창립 때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1939년 5월 13~14일 조선소리경창대회 때 이동백·김창룡·안춘민·김윤덕·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였다.

그의 반주로 ·· 등이 취입한 가야금병창·"곽씨부인 유언가"(郭氏婦人遺言歌)·"난봉가"·"달거리"·"대장부가"·"백구타령"·"사랑가"·"소상팔경"(瀟湘八景) 등 20여 곡은 일축(日蓄)조선소리반에, 그리고 그의 장구반주로 김창룡·박녹주·송만갑 등이 취입한 가야금겸창(兼唱)·가야금병창·가야금산조·"강산유람"(江山遊覽)·"개타령"·경기잡가(京畿雜歌)·남도잡가(南道雜歌)·단가·당학·"대장부 허랑하여"·"망망한 창해 중에" 등, 그리고 김창근(楊琴)·김화녀(奚琴)·양우석(短簫)·이응룡(嘴笛)·정장정(琴)·최학봉(大笒)과 합주한 "잔도도리"는 일축(日蓄)제비표 조선레코드에 전한다.

그의 장구반주로 강춘섭·권금주·김갑자 등과 함께 취입한 가야금병창·기악·남도잡가(南道雜歌)·"남원산성"(南原山城)·단가·단소독주·"몽중가"·"봉장취"(鳳長醉) 등의 여러 곡은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그가 장구반주 또는 북 반주로 일본 빅타음반에 취입한 명인명창은 강태홍·김덕준·김매홍 등이었다. 그의 장구반주로 취입한 "가난타령"·"가든 토끼 돌아서며"·가야금병창·가야금산조·"가자 어서 가"·"갈까 보다"·"강남행"(江南行)·"강상풍월"(江上風月)·"개고리타령"·"견타령"(犬打鈴)·경기속요(京畿俗謠)·경기잡가 등 여러 갈래의 음악 및 "심봉사 자탄가"(沈逢使自歎歌)·"심봉사 황성(沈逢使皇城) 가는데" 등과 같은 여러 판소리의 눈대목 등은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그의 북 반주·장구반주로 취입한 "골패타령"·"공명배군"(孔明配軍)·"까투리타령"·남도단가(南道短歌)·남도민요·남도잡가·"농부가"·단가·"동풍가"(東風歌)를 포함한 30여 곡은 폴리돌음반에 전한다. 그의 북 반주로 취입한 김연수(金練守)·김초향의 노래는 오케음반에 전하고, 그의 장구반주로 취입한 가야금독주·"곽씨부인 품팔이"·남도소리·"대장부가"·"사랑가"·"새타령"·"소상팔경"·"흥타령"은 『조선레코드총목록』에 전한다.

그의 글 "장고(長鼓)로 진경(眞境) 이르기까지"는 『三千里』(1935) 7권 10호에 발표됐다. 『朝光』(1937) 17호에 발표된 "조선성악연구회 현재 멤버"에 소개되었다. 그의 글 "고수 오십년"(鼓手五十年)은 『朝光』(1937) 18호에 발표됐고, 그가 이동백과 대담(對談)한 "가무의 제문제(諸問題)"는 『춘추』(1941) 2호에 발표되었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문하를 거친 제자만 수백 명에 달했으며, 특장으로 태평무(太平舞)에 능하였다. 고수로서도 박기홍·김창환을 비롯해 여러 명창의 반주를 담당했다. 1941년 숙환으로 68세의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명고수로 또한 무용가로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서울 경운동에 세운 그의 무용연구소에서 200여 명의 무용가를 배출시킨 한성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검무·학춤·승무·연화대가 있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930~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