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석

오태석

[ 吳太石 ]

요약 가야금 연주가·성악가(가야금병창). 가야금병창(伽倻琴併唱) 명인. 전라남도 순천(順天) 또는 낙안(樂安) 출생.
출생 - 사망 1895년 ~ 1953년
오태석

1895년 판소리명창 오수관(吳壽寬)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조실부모한 그는 박덕기(朴德基)에게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를 배웠다. 20세 무렵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익혔으며, 30세 때 상경하여 가야금병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1927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개원 초창기부터 출연해 가야금산조를 방송하였다.

1928~1945년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이정엽·정원섭·지용구 등과 함께 가야금병창·가야금산조·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신관도임"(新官到任)·"신연(新延)마지"를 포함한 30여 곡의 눈대목과 "진도아리랑"·"초한가"(楚漢歌) 등의 여러 민요를 방송하였다.

1928년 7월 28일 호남악우회(湖南樂友會) 주최 납량명창대회 때, 그리고 11월 21일 전조선명창연주회 때 이동백·김창환·김정문 등과 함께 출연했고, 1929년 11월 13일 일본 대판지점(大阪支店)의 취입소에서 콜럼비아 축음기회사의 제2회 취입 때, 복혜숙·김영환·김초향 등과 함께 취입했으며, 1930년 11월 19일 조선극장에서 열린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 제1회 공연 때 이소향·조학진·김창룡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31년 3월 30~31일 조선음률협회의 제2회 공연이 열렸을 때 가야금병창으로 "죽장망혜"와 "초한가"를 공연하였다. 1932년 1월 23일 장문평(張文平) 씨 발의로 조선악정회(朝鮮樂正會)를 창립할 때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고, 6월 22일 조선음률협회의 제3회 공연 때, "대장부한"(大丈夫恨)을 공연했으며, 10월 3일 「조선음악의 밤」 때 박녹주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33년 2월 25일 「조선명창대회」 때, 1933년 6월 22~23일 및 8월 23~24일 조선악협회(朝鮮樂協會) 주최 「동서음악대회」(東西音樂大會) 때, 8월 12일 조선악협회의 조선음악학원(朝鮮音樂學院) 창립을 위한 「조선악 감상의 밤」 때, 8월 20일 조선음악학원 설립을 위한 「전통악과 무용의 밤」 때 출연하였다.

1934년 3월 3일 개성고려청년회 주최 조선정악대회가 열렸을 때 출연했고, 5월 11일 이동백·강태홍·김동강 등의 발기인과 함께 조선성악원(朝鮮聲樂院)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研究會)로 개칭하여 다시 출범시켰다. 9월 12~14일 삼남수해구제연주회 때, 그리고 1935년 11월 27~28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추동명창대회 때 출연하였다.

1936년 2월 9~11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가극 배비장전 공연 때, 송만갑·이동백·김창룡 등과 함께 출연한다고 조선일보(朝鮮日報) 1936년 2월 8일자에 전한다. 4월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좌 창립기념공연으로 창극 흥보전 공연 때 흥보 역을 맡은 그는 박녹주(흥보처)·정남희(놀보)·임소향(놀보처)·조상선(마당쇠) 등과 함께 출연했으며, 6월 8~11일 조선성악연구회가 연쇄창극(連鎖唱劇) 유충렬전 공연 때, 충렬 아버지 역을 맡은 그는 정남희(유충렬)·이계선(충렬부인)·강태홍(정한담)·조상선(최일귀)·이동백(충렬 장인)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 주최로 열린 1936년 9월 15~16일, 25일 가극 춘향전 공연 때, 10월 28일 가극 흥부전 공연 때, 1937년 2월 26~3월 2일 가극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의 공연 때, 6월 21~25일 가극 편시춘 때, 1938년 3월 13~17일 가극 토끼타령 때, 8월 8일 창극 옹고집전(雍固執傳) 때, 10월 4~5일 새 창극 농촌야화(農村夜話) 공연 때, 1939년 1월 29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창극 춘향전 때, 10월 7~11일 창극 춘향전·심청전을 공연할 때 출연했고, 1940년 2월 20~30일 창극 옥루몽(玉樓夢)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36년 8월 28~29일 수해구제구악대회 때, 1938년 1월 11일 김석구독창회 때, 4월 28일 판소리대회의 심청전 전창(全唱) 때, 5월 4~10일 전조선향토연예대회 중 조선성악연구회의 판소리대회 때, 그리고 10월 16~17일 광주극장에서 열린 명창대회 때 출연했고, 1938년 5월 23일 조선성악연구회 제5회 정기총회 때 상무이사(常務理事)로 선임됐으며, 1939년 5월 22일 조선성악연구회 제6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선임됐다. 1939년 5월 21일 이동백은퇴공연(李東伯隱退公演)의 지방순회공연 때 출연했다. 그리고 하창춘이 창단한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 주최 "일목장군"(一目將軍) 공연 때 그는 안기옥·임방울·정광수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40년 1월 15~16일 조선음악연구회(朝鮮音樂研究會)의 일류명창대회가 열렸을 때, 그리고 3월 16~18일 한해구제명창대회 때 출연했다. 1943년 9월 제일극장에서 이운방(李雲芳)의 창작 창극 "남강(南江)의 풍운(風雲)"으로 동일창극단의 창단공연을 가졌을 때 안기옥·임방울·정광수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가 취입한 음반으로는 Regal C130A, Taihei 188~A 및 C8080~AB, Columbia 40042~A(1929), Victor 49015~A(1926), Columbia 40320~A 및 40320~B, Okeh 1785~A 및 1785~B 등이 있다. 임방울과 함께 취입한 가야금만곡(伽倻琴漫曲)·가야금병창·"각색 즘생(짐승)"·"경복궁타령"(景福宮打令)·"고고천변"(皐皐天邊)을 포함한 30여 곡의 민요와 판소리의 눈대목 및 단가는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하고, 이소향·지동근과 함께 취입한 가야금병창·경기속요(京畿俗謠)·"곽씨부인 사망"·"늴늬리야"·단가를 포함한 20여 곡은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가야금병창으로 취입한 "둥게타령"·"매화타령"(梅花打令)·"문경새재"를 포함한 10여 곡의 민요는 폴리돌음반에 전하고, 김계선(젓대·短簫)·문윤옥(文允玉: 提琴)·김소희 등과 함께 취입한 가야금병창·"곽씨부인 북망산행"(北邙山行)·"곽씨부인 사별"·"기생점고" 등의 눈대목 및 "농부가"·"닐리리야"·"방아타령"(芳兒打鈴) 등의 민요는 오케음반에 전한다. 그가 취입한 가야금병창·"군로사령"·"기생점고"·남도잡가(南道雜歌) "농부가"를 포함한 10여 곡은 태평음반에 전한다.

그의 글 "남창이 본 여류명창"은 『三千里』(1935) 7권 10호에 발표됐다. 『三千里』(1935) 7권 10호에 발표된 오비취의 글 "여창이 본 남류명창"에 소개됐으며, 『朝光』(1937) 17호에 발표된 "조선성악연구회 현재 멤버"에 소개되었다. 『三千里』(1939) 11권 4호의 "오호(嗚呼) 송만갑 애도(哀悼)" 특집에서 "오태석씨 조사(弔辭)"를 발표하였다.

1945년 8·15광복 직후 광주에 사는 박동실·오태석·조몽실 등과 함께 광주성악연구회(光州聲樂研究會)를 조직하고 대춘향전 창단공연 때 출연했다. 1948년 국극사(國劇社)의 창단원인 조상선·정남희·백점봉 등과 함께 유리촌(劉里村) 작 조상선(趙相鮮) 안무 및 편곡의 "선화공주"(善花公主) 공연 때 출연하였다.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의 창극단에서 백점봉·조상선·정남희 등과 함께 활동했고, 1952년 1월 대구에서 열린 박후성(朴厚性)의 대동국악사(大同國樂社) 주최 박황(朴晃)의 "님은 가시고" 공연 때 김원길·신봉학·성원목 등과 함께 출연했다. 1953년 부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54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