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실

박동실

[ 朴東實 ]

요약 성악가(판소리)·민족음악가수. 판소리명창. 평양음악대학(平壤音樂大學) 교원.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담양읍 객사리 또는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관리 출생.
출생 - 사망 1897년 ~ 1968년
박동실

9세 때 아버지의 지도로 판소리 공부를 시작한 그는 남다른 음악적 소질과 좋은 목청의 소유자여서 1년 남짓한 기간에 춘향가 한바탕을 완전히 소화했다. 이 시기 김채만(金采萬)의 지도를 받아 심청가적벽가를 배워 더욱 세련됐으며, 13세 때에는 광주 양명사라는 창극단체에서 춘향전 공연 때 춘향 역을 맡았다. 어려서 부친과 외조부 및 명창 김재관에게 판소리를 배운 그는 15세 때 서울 원각사(圓覺社) 무대에서 창극 춘향전의 주역을 맡아 어린이명창으로 알려졌다. 1916년부터 10여 년간 남원에서 조직된 화순협률사(和順協律社)를 비롯한 여러 창극단체에서 활동했다.

1921년 광주협률사(光州協律社)에서 조몽실·성원목·임옥돌 등과 함께 4년 동안 활동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1935년부터 광주에서 소리를 가르쳤다. 1930년대 안기옥과 함께 후진양성에 정진하여 임소향·공기남·조상선·조해숙·김소희·김녹주·한응호·한애순 등 많은 명창을 길렀다.

1939년 화랑창극단(花郞唱劇團) 주최 김아부(金亞夫) 작 박동실 편곡의 "봉덕사(奉德寺)의 종소리"와 "팔담춘몽"(八潭春夢) 등의 공연 때 출연했다. 임방울·박초월·박귀희 등과 함께 창단한 동일창극단은 김아부 작, 박동실 편곡, 박진(朴珍) 연출로 "일목장군"(一目將軍)을 공연하였다. 해방 전까지 화순협률사를 비롯해 여러 창극단체에서 춘향 역 또는 심청 역을 맡았다. 1930년대부터 안기옥과 함께 가야금산조·판소리·창극으로 광주·함흥·청진 등지를 순회공연했다. 1941년 창극 "초동삼"(樵童三)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했다. 그가 오케고악단반주로 취입한 남도잡가(南道雜歌) "초한가"(楚漢歌)는 오케음반에 전한다.

1945년 8·15광복 직후 전남 광주에서 창악인 중심으로 구성된 광주성악연구회(光州聲樂研究會)에서 오태석·조상선·성원목 등과 함께 그해 10월 광주극장에서 공연한 박황 각색의 흥보전 공연 때 출연했다. 1945년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의 창극단에서 임방울·김연수·박녹주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1946년 대한국악원 산하단체인 국극협회(國劇協會)의 대표였다. 해방 후 특히 "유관순전"(柳寬順傳) 등 이른바 "열사가"(烈士歌)를 창작해 부른 명창으로 유명했다.

1947년 8월 함화진(咸和鎭)의 뒤를 이어 박헌봉(朴憲鳳)이 대한국악원의 원장으로 취임했을 때 임원으로 활동했고, 1947년에 새로 구성된 국악원의 창악부장을 지냈다. 1948년 전라도 광주(光州)에서 창극활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했고, 1948년 5월 창작 창극 "고구려의 혼"을 시공관에서 공연하였다.

1950년 6·25사변 때 "인민군서울입성환영가"라는 단가형식의 노래를 지어 위문공연을 하고 월북한 후 진남포 국립예술극장 협률단에 입단해 활동했다. 1951년 3월 결성된 조선음악동맹(朝鮮音樂同盟)의 상무위원 겸 고전음악 분과위원장을 맡았으며, 평양에 와서 조선고전악연구소, 국립고전예술극장에서 창극배우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국립고전예술극장에서 안기옥·정남희·조상선 등을 비롯하여 김진명·김관보·홍탄실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창극 춘향전과 "이순신장군"을 무대에 올렸다. "보천보 출진"과 "비봉산포위섬멸" 등의 판소리대본과 음악을 창작했으며, 가요 "추수를 급히 하자"를 비롯한 여러 편의 성악작품을 작곡하였다. 그 외에 판소리 양식으로 만든 "여성영웅 조옥희"·"해군영웅 김군옥"·"역사가" 등 9편의 작품 및 판소리 장가형식의 작품 "조국해방 실천사"·"새로운 조국"·"조국의 기발"을 포함한 10여 편을, 단가형식의 작품 "김장군을 따르자"·"해방의 노래"·"단결의 노래" 등을 무대에 올렸다.

1956년부터 평양음악대학 교원으로 후진을 양성했다. 1955년 공훈배우, 1961년 인민배우가 됐으며, 국가훈장 1급을 비롯한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334~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