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명

김진명

[ 金振鳴 ]

요약 성악가(민요). 서도명창. 평양음악무용대학(平壤音樂舞踊大學) 교수. 황해남도 벽성군 화양면 신왕리 출생.
출생 - 사망 1913 (또는 1914)년 ~ 1997년

어려서부터 향토민요 을 익히기 시작한 그는 17세 때 신봉익의 지도로 ·를 비롯해 ""·""·"용강기나리"·""·""·"" 등의 민요와 를 배웠다. 18세 때 동아일보 주최 서선명창대회(西鮮名唱大會)에 나가 "도라지타령"을 불러 1등으로 당선되자 빅타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채용되어 음반에 여러 를 취입하였다.

1928년부터 서도명창 (申鳳鶴)에게 ""(山念佛)·""·""(寧邊歌)·"수심가"(愁心歌)·"배따라기"·"서도"·""(楚漢歌)·"기성팔경가"(箕城八景歌) 등의 서도민요를 배웠다. 1933년 서선명창대회에서 독창 1등을 했으며, 황해도의 "구 도라지타령"·"은율금산포 백도라지"·"신 도라지" 등 수십 편의 민요를 빅타음반에 취입하였다.

일제강점기 (젓대)·() 등과 함께 또는 일본 빅타관현악단 반주로 취입한 "간장타령"(肝腸打鈴)·"야월선유가"(夜月船遊歌)를 포함한 10여 곡의 민요는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1933~1939년 (京城放送局)에 출연하여 ·과 함께 "간지타령"(簡紙打令)·"해주 산염불"을 비롯한 10여 곡의 민요를 방송하기 위해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였다.

1930년대 ·이진봉· 등과 함께 활동했다. "박연폭포"·""·"" 등의 를, 그리고 "수심가"·""·"영변가" 등의 서도민요를 취입했고, 빅타음반에 ""을 음반에 취입하였다. 1935년 귀향해 개성 서본정에서 후진을 양성하게 됐다. 징용기피자의 신세로 방랑생활을 하다가 1942년 봄 (柳大福: 일명 류대복)과 함께 음악생활을 하기 위해 평양으로 돌아왔으나 예술활동이 금지되어 귀향하여 조용히 살았다.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출연자 총출동)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출연자 총출동)

1945년 해방 후 한일가무단 연구부를 조직하여 민요부장으로 일했고, 1945년 유대복·· 등과 함께 평양의 한일가무단에서 활동했다. 1947년 4월부터는 조선고전악연구소의 민요부 가수로 활동했으며, 1948년 국립예술극장 협율단의 민요부 부장을 지냈다. 그 후 국립예술극장 민요부장 및 음악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수많은 민요가수를 양성했다. 공연활동을 하면서 ""·"싸우는 계월향" 등의 을 했다. 1951년 3월 결성된 의 분과위원을 맡았으며, 1952년 가요 "얼룩소야 어서 가자"( 작사)를 내놓았고, 그의 "산천가"와 "양키 토벌가"는 전통적인 민요형식을 토대로 시대의 미감을 잘 반영한 새로운 민요창작의 모범으로 음악계의 주목을 끌었다.

1952년 국립고전예술극장 민요부의 부장으로, 그 후 민족가극단에서 활동했고, 1955년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1957년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때 그가 작곡한 민요합창 "어부의 노래"로 은메달을 받았다.

1960년 초에 서도민요를 바탕으로 "강 건너 마음에 새노래 들려온다"를 창작했고, 인민들이 즐겨 부르는 "모란봉"·"청진포 뱃노래"·"바다의 노래" 등의 민요를 창작했다. 1962년 인민배우가 됐고, 국가훈장 1급을 비롯한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모란봉"·"개나리"·"바다의 노래"·"공화국 은덕일세"·"향로봉에서"·"풍년맞이" 등 수십 편의 노래를 창작했으며, 민족가극 "햇빛을 안고"·"아름다운 시절"을 창작하였다.

1990년 범민족통일음악회 및 「90송년통일전통음악회」의 음악사절로 서울에서 "배따라기" 및 혼성민요독창에 출연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23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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