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귀희

박귀희

[ 朴貴姬 ]

요약 성악가(가야금병창). 가야금병창 명인.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23호 가야금병창(伽倻琴併唱) 예능보유자. 경북 칠곡(漆谷) 출생. 호는 향사(香史). 본명은 오계화(吳桂花).
출생 - 사망 1921년 ~ 1993년
박귀희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하판동에서 장병관(張炳官)과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박귀희는 8세 때 대구(大邱)로 이사하여 대구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 서구 봉산동 소재 국악전수소에서 (朴基洪)의 동생 (朴枝洪)에게 를 배우다가 대동가극단(大東歌劇團)의 대구공연을 계기로 14세 때 (李花中仙)의 대동가극단에 입단하여 ·· 등을 따라다니며 순회공연을 가졌다.

15세 때 대동가극단을 나와 귀향해 박지홍에게 와 ""(花草四巨里)를 학습했다. 대구 화원 용연사(龍淵寺)에 들어가 백일공부로 (曺學珍)에게 를 배웠으며, 1937년 대구에서 활동한 (姜太弘)에게 을 사사하였다. 16세 때 김남순(金南順)에게 와 검무 및 춤을 배웠다. 18세 때에는 (朴東實)의 지도 아래 ·김녹주· 등과 함께 와 를 공부했다.

그런 중에 일본레코드사의 요청으로 "천하태평"(天下泰平) 등을 취입했으며, 21세 때 (劉成俊)의 문하에서 를 사사했다. 1939년 이 창단한 (東一唱劇團) 주최 ""(一目將軍) 공연 때 그녀는 (安基玉)·(吳太石)·임방울(林芳蔚)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사 주최 전국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뒤, 서울에 살며 1941년부터 오태석에게 3년 동안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동일창극단의 대표 임방울과 함께 창립단원인 그녀는 1943년 9월 제일극장에서 이운방(李雲芳)의 "남강의 풍운"으로 동일창극단의 창단공연을 가졌을 때 ··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판소리 다섯바탕의 소리를 배우던 중에 한양창극단(漢陽唱劇團)에 입단하여 강남중· 등과 더불어 전국을 순회 공연했다. 1945년 창극 "일목장군" 공연 때 남장(男裝)으로 출연하여 인기를 끌었다.

1945년 · 방송을 위해 (京城放送局)에 출연했다. 1946년 (大韓國樂院)의 산하단체로 창단된 (國劇社)의 이사를 역임하였다. 1948년 국극사의 창단원인 조상선·· 등과 함께 (劉里村) 작 조상선(趙相鮮) 안무 및 편곡의 ""(善花公主)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48년 9월 1일 (女性國樂同好會)가 출범했을 때 그녀는 회장 (朴綠珠), 부회장인 와 , 총무인 , 그리고 단원인 김소희·한영숙· 등과 함께 그해 10월 창단공연으로 시공관에서 공연한 창작 창극 "옥중화"(獄中花) 및 1949년 2월 시공관에서 무대에 올린 (金亞夫) 작의 "햇님과 달님"에 출연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재건된 여성국악동호회의 주최로 부산극장에서 유치진(柳致眞) 작의 "가야금" 공연 때 그녀는 김소희··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55년 김소희와 함께 성북구 돈암동에 민속예술학원(民俗藝術學院)을 세우고 원장직을 맡았다. 대한국악협회(大韓國樂協會) 이사장에 선임되어 후진양성에 힘썼다. 1960년 국악교육을 위하여 국악인들을 규합하여 (國樂藝術學校)를 설립하여 상임이사에 선임됐다. 국악예술학교 설립 당시 교직원이었고, 담당 과목은 가야금병창이었다. 1960년대 킹스타레코드에 ""·""·"" 등 남도소리 10여 곡을 취입했다. 1961년 일본 동경에 한국무악원(韓國舞樂院)을 세워 재일동포에게 조국의 음악과 무용을 1979년까지 가르쳤다.

1962년한국민속가무예술단(韓國民俗歌舞藝術團)의 단장에 선임되어 일본순회공연을 전개하였다. 1962년 창단된 국립국극단(國立國劇團) 주최 제1회 창단기념 창극 대춘향전공연 때 그녀는 김소희··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65년 국립국극단의 단원을 거쳐 1971년 제23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73년 2월 8일 사재(私財)를 출원하여 재단법인 (國樂學院) 설립인가를 받아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1976년 12월 문화재관리국과 문화재보호협회가 공동 제작한 『』에서 가야금병창을 취입하였다. 1977년 3월 24~27일 (國立唱劇團)의 심청가 공연 때, 8월 27일 국립창극단의 판소리감상회 때, 9월 16~19일 국립창극단의 흥보가 공연 때, 11월 26일 국립창극단의 판소리 정기감상회 때, 1978년 2월 25일 국립창극단의 판소리감상회 때, 3월 30일 인간문화재 종합예술제 때, 5월 18일 박녹주의 흥보가 전수자연창회 때, 6월 10~12일 민요대잔치의 남도민요 공연 때, 10월 28일 국립창극단의 판소리감상회 때, 1979년 4월 9일 대한민국 국악제 개막연주회 때, 5월 14일 제8회 판소리유파발표회 때, 10월 20일 제10회 중요무형문화재 가야금병창 발표공연 때, 10월 31일 제4회 무형문화재 정기공연 때 출연했고, 1980년 제3대 국립창극단의 단장(1980~1981)을 역임하였다. 1980년 5월 국립창극단의 판소리감상회 때, 10월 국립창극단의 판소리감상회 때, 1981년 8월 21일 대한민국 국악제의 「민속악의 밤」 때, 1982년 4월 29일 조선일보 제1회 국악대공연 때, 6월 15일 대한민국 국악제 「민속기악의 밤」 때, 그리고 11월 5일 제13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때 출연하였다. 1983년 5월 6일 국악대공연 때, 1984년 5월 7일 조선일보사 주최 제3회 국악대공연 때, 4월 20일 국립중앙극장 대극장에서 가야금병창발표회를 열었다.

1989년 종로구 운니동의 운당여관 등 전 재산을 기증하여 금천구 시흥동의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새로 신축하여 1992년 준공식을 열었다. 1990년 10월 19일 90명무·명창 큰 잔치 때 출연했고, 1991년 5월 8일 조선일보사 주최 제10회 국악대공연 때, 의 91가을맞이 우리가락 한마당 때 출연했고, 12월 14일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가야금병창 발표회를 열었다. 1992년 3월 8일 고(故) 국악선열추모 92범국악인 자선대공연 때, 그리고 10월 20일 제23회 중요무형문화재 무대종목 발표공연 때 출연하였다. 1992년 평생 모은 운당여관의 전 재산을 국악예술학교에 헌납하여 시흥동 현 교사를 신축·이전케 하고 1993년 세상을 떠났다.

지구레코드사가 제작한 LP음반 5매의 『』 취입 때 김연수·박녹주··박초월·김소희와 함께 출연하였다. 1989년 KBS국악대상 때 특별공로상을 받았고, 서울시문화상·국악대상·국민훈장 동백장·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했다. 향사의 제자로는 안숙선·강정숙·김성녀·윤소인·이영신 등이 활동하고 있다.

1995년 7월 13일 고 향사 박귀희 선생 2주기 추도식을 열었고, 1997년 7월 14일 고 박귀희 선생 4주기 추모음악회가 열렸다.

출판물로 『향사박귀희가야금병창곡집』(1979)·『순풍에 돛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1994)가 있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324~26쪽

참조어

오계화(吳桂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