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후성

박후성

[ 朴厚性 ]

요약 성악가(판소리). 판소리명창. 국립창극단(國立唱劇團)의 단장. 광주(光州) 출생. 본명은 박금동(朴金童).
출생 1921년

14세 때 (韓甲得)에게 를 배우면서 당시 광주권번의 소리선생 (成元穆)에게 를 사사했다. 경주권번의 소리선생 (朴化燮)에게 5년 동안 ····를 배웠다. 1939년 가 창단한 (花郞唱劇團)의 ·· 등과 함께 을 비롯해 사극 "봉덕사(奉德寺)의 종소리"와 김원학의 창작 ""(八潭春夢)의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39년 화랑창극단의 춘향전 공연 때 이도령 역을 맡았고, 1940년 12월 24일 제일극장에서 화랑창극단의 공연 때 ·· 등과 함께 출연했다. 1941년 (朝鮮唱劇團)의 장화(長靴)홍련 공연 때 장쇠 역을 맡아 전국을 순회하였다. ·에게 소리를 배웠고 화랑창극단이 해산되자 (朝鮮聲樂研究會)에 입회하여 (丁貞烈)에게 춘향가와 적벽가를 전수하였다.

1942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경무국(警務局)의 압력으로 인하여 화랑창극단과 (唱劇座)를 통폐합하여 (朝鮮唱劇座)로 개칭하고, 편곡의 (薔花紅蓮傳)을 공연했을 때, 장쇠 역을 맡은 그는 김연수(배좌수)·(계모)·김녹주(장화)·김옥련(홍련)·(노복)·최명숙(단신)·(정부사)과 함께 출연하였다. 1942년 조선창극좌에 입단하여 활동했다.

1945년 8·15광복 직후 전남 광주에서 창악인 중심으로 구성된 (光州聲樂研究會)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초 창단된 (國劇協會: 대표 )가 무대에 올린 "(魂)" 공연 때 그는 성원목··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48년 운영난에 빠진 국극협회를 인수한 그는 ·· 등을 규합하여 (國劇協團)을 창단하여 그해 10월 춘향전으로 창단공연을 부산에서 열었다. 1949년 (朴晃) 작·(李眞淳) 연출의 "왕자(王子) 사유(斯由)"와 "예도성(濊都城)의 삼경(三更)"을 공연했으며, 또한 새 창작물 박황 작·(李有眞) 연출의 ""(嘆夜曲)을 1950년 6월 부산 동아극장에서 공연하던 중에 6·25전쟁 때문에 국극협회를 해산하였다.

1951년 1월 대구에서 한일섭··공기준 등과 함께 대동국악사(大同國樂社)를 창단하고 이일파(李一波) 작의 ""(五月夢)을 대구 만경관(萬頃館)에서 공연했다. 허빈(許濱) 작의 "검백(劍白)과 공주(公主)"를 연출했으며, 1953년 국악사(國樂社)가 삼남(三南) 지방에서 공연한 박황 작의 "운곡사(雲谷寺)의 비화(秘話)"를 연출하였다. 1953년 창단한 국악사의 창단공연으로 박황 작의 "님은 가시고"를 대구극장에서 막을 올렸을 때 출연자는 ·· 등이었다. 1957년 여성극단을 운영하였다.

1958년 (大韓國樂院)의 직속단체로 출범한 (示範國劇團)의 춘향전 공연 때 방자 역을 맡은 그는 장영찬(이도령)·김득수(후배사령 및 집장사령)·남해성(춘향)·(춘향모)·(향단)·(사또)·(초동)과 함께 출연하였다. 1960년부터 일본에서 활동했고, 1962년 이후 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62년 김연수(金演洙)와 함께 국립창극단(國立唱劇團)을 창단하여 1990년까지 단장을 역임했고, 제자로는 은희진·김영자·안숙선 등이 있다. 1977년 3월 24~27일 국립창극단의 심청가 공연 때, 9월 16~19일 국립창극단의 흥보가 공연 때, 1978년 6월 10~12일 민요대잔치의 공연 때, 그리고 1980년 4월 국립창극단의 판소리감상회 때 출연하였다.

1982년 제4대 국립창극단의 단장(1982~1990)을 역임했고, 1984년 4월 4~12일 국립창극단의 창극 심청가 공연 때, 6월 15~20일 창작 창극 "서동가"(薯童歌) 공연 때, 9월 27~30일 창극 흥보가 공연 때, 그리고 12월 18~21일 100주기 기념공연 때 출연하였다.

1993년 9월 11일 대한민국 국악제: 대전엑스포 기념공연 때, 그리고 9월 13일 대한민국 국악제 서울공연 때 출연했다. 1995년 3월 30일 문화체육부에서 대통령표창장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389~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