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향

이소향

[ 李素香 ]

요약 성악가(가야금병창)·가야금 연주가. 경상도 합천(陜川), 경주(慶州) 또는 포항(浦港) 출생. 호는 소전(少田). 본명은 이악이(李岳伊). 장기는 가야금. 조선권번(朝鮮券番)·종로권번(鍾路券番) 기생.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研究會) 이사. 한국민요연구회(韓國民謠研究會) 회원.
출생 - 사망 1905년 ~ 1989년
이소향

1905년 동해안 별신굿의 세습무(世襲巫)인 아버지 이하중(李河仲)의 둘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 가야금과 소리 기초를 경주권번(慶州券番)의 강태홍(姜太弘)에게 가야금병창을 배우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1925년 함흥 반룡권번(盤龍券番)에서 이말량(李末良)과 함께 정남희(丁南希)에게 가야금병창을 수학한 후 상경하여 조선권번에 기적(妓籍)을 두고 1927년부터 1939년까지 김세준·정원섭·지용구·한성준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27~1939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하여 김세준·정원섭·지용구·한성준과 함께 가야금독주·가야금병창(伽倻琴併唱)·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자진육자백이"·"개고리타령"·남도가요(南道歌謠)·남도단가(南道短歌)·남도잡가(南道雜歌)·"농부가" 등 수십 곡의 민요를 비롯하여 단가 "만고강산"(萬古江山)·"소상팔경"(瀟湘八景)·"죽장망혜"(竹杖芒鞋) 등, 그리고 단소독주·조선음률(朝鮮音律)·평시조(平時調) 등 여러 갈래의 곡을 방송하였다.

1928년 광무대(光武臺) 소속 호성좌(虎聲座)에서 그는 이동백·박춘재·이일선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28년 무렵 김추월·배설향·이화중선 등과 같이 이-글조선레코드에 취입을 시작했으며, 특히 가야금병창으로 유명했다.

1930년 11월 19일 조선극장에서 열린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 제1회 공연 때 조학진·김창룡·박녹주 등과 함께 출연했다. 1931년 3월 30~31일 조선음률협회의 제2회 공연이 열렸을 때 가야금병창으로 "조어환주"(釣魚換酒)를 공연했으며, 1931년 9월 21~23일 제2회 팔도명창대회 때 출연하였다. 1932년 1월 16일 수양유치원(秀養幼稚園)을 위한 남도일류명기음률대회(南道一流名妓音律大會) 때 설경패·조홍련·이금홍 등과 함께 출연했다. 6월 22일 조선음률협회의 제3회 공연 때 "어화청춘"과 적벽가를 공연했으며, 7월 8일 경성음률협회(京城音律協會) 주최 전조선명창대회 때 출연하였다.

1934년 6월 12일 장곡천정공회당에서 열린 조선성악연구회의 제1회 공연 때 출연했고, 1936년 7월 15~16일 부민관에서 열린 납량음악회 때 김초향·신금홍·박녹주와 함께 출연하였다. 1937년 매일신보 주최 명창대회에서 1등으로 수상했다. 7월 2~3일 원산고아원의 기금조성을 위한 조선성악연구회의 명창대회 때 출연하였다.

1937년 2월 26~3월 2일 조선성악연구회의 주최로 열린 가극(歌劇)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의 공연 때, 6월 21일 편시춘(片時春) 공연 때, 1938년 3월 13일 토끼타령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38년 5월 23일 조선성악연구회의 제5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선출됐고, 1939년 5월 22일 조선성악연구회 제6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당선되었다. 1938년 5월 3~4일 전조선향토연예대회 중 여류명창경창대회 때 김난옥(金蘭玉)·성산호주(成珊瑚珠)와 함께 남도소리를 공연했다. 1938년 5월 24일 연예시간에 열린 「명창의 밤」 때 출연하였다.

『三千里』(1936) 8권 8호에 발표된 "조선·한성·종로 삼권번(三券番) 기생 예도(藝道) 개평(慨評)"에 소개됐고, 『三千里』(1931) 3권 9호에 발표된 "춤 잘 추는 서도기생 소리 잘하는 남도기생"에 소개되었다. 일제강점기 취입한 음반으로는 Okeh 1583AB(화초사거리)를 비롯한 5매, 일축조선소리반 853A(조어환주)·B(박석틔), Regal 180AB(가야금병창 화용도), 그리고 Victor 49127AB(가야금병창 호접몽)과 19165A(가야금병창 청춘원)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그녀가 가야금병창으로 취입한 "공명제풍"(孔明祭風)·"박석틔"·"조어환주"(釣魚換酒)는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그녀가 김덕진(金德鎭: 해금김옥진(金玉眞)·김일지홍(金一枝紅) 등과 함께 취입한 "가난타령"·가야금병창·경기속요(京畿俗謠)·"군신읍별"(君臣泣別)·"오호 곽씨부인"(鳴呼郭氏夫人)을 포함한 판소리의 여러 눈대목은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박녹주의 장구반주로 취입한 가야금병창·남도잡가·단가·"몽중가"·삼국지·심청전·"왕왈 연(王曰然)하다" 등은 오케음반에 전한다. 그녀가 취입한 가야금병창·"군밤타령"·단가·"둥개타령"·"범피중류"(泛彼中流)를 포함한 10여 곡은 태평음반에 전한다.

해방 후에는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의 민요부원 시절 국악연예사(國樂演藝社)에도 출연했으며, 후에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의 민요교사를 지냈다. 1960년 청구고전성악학원(靑丘古典聲樂學院)의 제1회 민요대발표회 때 유개동·이은주·정득만 등과 함께 특별 출연했고, 안비취·묵계월·이은주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61년 서울에서 민요연구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658~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