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재

박춘재

[ 朴春載 ]

요약 성악가(민요). 잡가명창. 대한제국(1897~1910) 시절 가무별감(歌舞別監). 고향은 경성부 금부후동(禁府后洞). 기예는 조선가곡. 서울 출생. 박춘경(朴春景)의 제자.
출생 - 사망 1881 (또는 1883, 1877)년 ~ 1948 (또는 1950)년
박춘재

박창배(朴昌培)의 외동아들로 서대문 모화관(慕華館) 곧 현재의 독립문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한문을 배웠으나 소리를 더 좋아해 (洪弼源)과 홍진원 혹은 홍필광(洪弼光) 형제에게 와 선소리 을 배웠다. 그 후 사계(四契)축 잡가명창 의 수제자가 되어 와 잡가를 사사했으며, 18세 때인 1900년(광무 4) 이 되어 어전(御殿) 연주의 특전을 얻었다.

1896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에 참가하여 미국 빅타레코드사에서 녹음했고, 1906년 빅타레코드사의 초청으로 다시 미국에 건너가 (京畿雜歌)를 취입했다. 1904년(광무 8) 박춘재는 (文泳洙)·(李正華)와 더불어 재담(才談)과 발탈 같은 곡예로 인기를 끌었다. 재담으로는 당시의 제1인자였다. 특히 긴잡가··(京畿立唱)·(西道立唱)··경서도민요에 뛰어난 그는 (光武臺)·(演興社)·(長安社) 시절 ··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1911년 당시 경성부 서부 신문외(新門外) 석교(石橋)에 거주했고, 1911년 1월 30일 경성부 중부 수표교(水標橋)의 김대현··김홍도, 중부 교동(校洞)의 , 서부 수각교의 문영수, 이상의 6명은 동경축음기상회의 초청으로 축음기에 취입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일본축음기상회(日本蓄音器商會)는 그가 취입한 음반을 1911년 10월 14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 광고하였다. 그의 ""와 "제석타령"은 1912년 4월 26일 에서 공연하는 강선루일행(降仙樓一行)의 연극에 출연한 (月中仙)의 , 가패(佳佩)와 채련(採蓮)의 , 화향(花香) 등의 , 채련 등의 전기(電氣)춤, 점홍(點紅)의 호접무(蝴蝶舞), (文泳甲)의 (捺蕩牌)와 함께 공연되었다.

1911년 일본축음기상회(일축)의 초청으로 그는 유명갑·김홍도·문영수·심정순과 함께 동경 본사에서 취입했고(Nipponophon K6001-K6101), 1913년 일축의 2차 녹음 때 ···이정화 등과 함께 취입했다(K6104-K6267). 1914년 매일신보의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소개되었다. 1915년 8월 31일부터 광무대(光武臺)에 특별 출연했으며, 같은 해 1915년 10월 가정박람회 및 12월에 선소리와 안진소리로 광무대에 출연하였다.

1915~1916년 광무대에서 ·강진·김옥엽·문영수·이산옥 등과 함께 활동했고, 그의 소리는 ··로 이어졌고, 특히 그의 특기였던 발탈놀음은 광복 후 수제자 박천복(朴天福)에게 전수되었다. 1920년대 (京城放送局)에 출연해 (京畿座唱)·경성잡가(京城雜歌)·경성좌창(京城座唱)을 방송했고, 일본축음기상회의 일축음반(日蓄音盤)에 서울소리와 를 취입하였다. 1928년 광무대 소속 (虎聲座)에서 그는 ·이일선·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7~1933년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문영수와 함께 ·""·"대감노리"·"대감타령"(大監打鈴)을 비롯한 30여 곡의 민요를 방송했다. 과 함께 시에론음반에 취입한 (俗謠) ""과 ""은 『三千里』(1934) 6권 11호에 소개되었다. 1928년 일본콜럼비아축음기회사(콜럼비아사)에서 취입했다(C40010, C40022, C10106, C111). 1938년 조선일보사 주최 조선특산물전시회 때 특별 출연하여 발탈과 맹인재담을 공연하였다.

일제강점기 그가 "가세 가세"·"개 넉두리"·""를 포함 50여 곡의 민요는 일축(日蓄)조선소리반에, 그리고 그가 취입한 "무당덕담"(巫堂德談)·""·"" 등은 일축제비표 조선레코드에 전한다. ·문영수· 등과 함께 취입한 "장대장타령"·"제석거리"·"" 등은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하고, ·· 등과 함께 취입한 "간지타령"(簡紙打令)·"긴배따라기"·""을 포함한 20여 곡의 민요는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일제강점기 그가 취입한 속요(俗謠) "개 넉두리"·"곰보타령"·"장대장타령"은 시에론음반에 전하고, 그가 취입한 "수륙천리"(水陸千里)는 오케음반에 전한다. 그가 취입한 "각색장사 흉내"·""(景福宮打令)·"" 등 20여 곡의 민요는 『조선레코드총목록』에 전한다. 1930년대에는 레코드에 ""·"재담난봉가"·"" 등 난봉가류의 노래 및 "병정가"·"경복궁타령" 등을 취입함으로써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평양 출신의 문영수와 함께 2중창을 많이 불렀고, 그의 난봉가 계통의 노래를 특이하게 잘 불러 관중의 갈채를 받았다. 특히 본가락에 익살기가 짙은 가락과 을 곁들여가며 을 휘어잡는 그의 특기가 일품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 잡가의 거장 최경식(崔景植)의 주동으로 조직된 (朝鮮歌舞研究會)의 ·· 등과 함께 잡가를 발전시켰다. 제자로는 박천복·오영근·김경호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陽山道)·"" 같은 민요와 "개넋두리"·"무녀덕담"(巫女德談)·"장대장타령" 등과 같은 경기소리와 ""(愁心歌)·""(寧邊歌)·"" 등과 같은 서도입창을 일축음반의 제비표조선레코드에 취입하였다. 빅타음반에 "간기타령"을 취입했고, 콜럼비아음반에 "장님흉내"를 취입하였다.

1950년 8월 21일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에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379~80쪽
  •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011년,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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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재 『무쌍신구잡가』 출처: 한국전통연희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