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

국립창극단

[ 國立唱劇團 ]

요약 우리나라 판소리와 창극을 관장하는 예술기관. 일명 국립국극단(國立國劇團).

1962년 2월 20일 중앙국립극장의 직제개정에 따라서 국립극장 소속 산하단체의 하나로 창단된 국립국극단의 명칭은 1973년 5월 1일 국립창극단으로 개칭될 때까지 사용됐다. 창단 당시의 단장 김연수(金演洙) 아래 김소희·박귀희·강장원·강종철·김경애·김경희·김득수·김정희·김준섭·남해성·박봉선·박초월·안태식·임유앵·장영찬·정권진·한승호·한일섭, 이상의 단원을 두었다.

1962년 3월 명동 시공관에서 창극 대춘향전으로 제1회 창단기념공연을 개최했고, 1966년 12월 국립국극단은 개편됐다. 1967년 새로운 형식의 창극을 모색하기 위해 창극정립위원회를 국립극장에 결성하였다.

국립창극단의 공연활동 중 1기(1962~1976)에는 판소리 중심의 창극공연이 주류였고, 연출가 허규(許圭)가 단장으로 취임한 2기(1977~1989)에는 연극과 놀이를 지향한 창극공연이 특징적이며, 3기(1990년 이후)는 창극이 판소리 애호가의 테두리를 벗어나 대중예술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로 구분된다. 1976년까지는 연출가 이진순(李眞淳)이 연출을 도맡았기 때문에 대춘향전을 비롯해 여타 창극공연은 소리 중심의 전통극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1977년 국립창극단은 기존 세대의 창극관과 다른 견해를 가진 허규를 영입함으로써, 발전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1989년까지 그가 맡은 창극 연출의 특징은 판소리의 기본에 충실하되 새로운 창극 양식에 각종 민속연희의 놀이가 도입됐기 때문에 재미나고 볼거리가 많아 창극(唱劇)의 대중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국립창극단의 공연 프로그램(『세계화시대의 창극』)

국립창극단의 공연 프로그램(『세계화시대의 창극』)

1980년 국립극장 30주년을 맞아 제33회 공연물로 무대에 올린 허규 작·연출의 "최병도전"은 1908년 원각사에서 최초의 창작 창극으로 무대화된 "최병두타령"의 새로운 연출물이었다. 당시 국립극장의 극장장직을 겸임한 허규는 1983년부터 국립극장에 일요상설무대를 기획하여 판소리 감상회를 비롯해 창극·민요·기악·가곡·시조·범패 등 다양한 종목을 무대에 올렸다. 1984년 국립창극단은 완판창극 작업을 3년째 계속했으며, 1985년 4월 네 번째 완판창극 적벽가를 공연하였다. 86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으로 국립창극단 제50회 공연물로 "용마골 장사"를 허규 연출로 무대에 올렸다. 88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 때에는 허규 연출의 "배비장전"과 "춘향전"을 공연하였다.

국립창극단의 배비장전 공연(국립창극단 제공)

국립창극단의 배비장전 공연(국립창극단 제공)

국립창극단의 역대 단장 일람표(2000년 이전까지)

국립창극단의 역대 단장 일람표(2000년 이전까지)
순서 이름 재임기간

제1대

김연수(金演洙)

1963년 3월~1974년 12월

제2대

김연수(金演洙)

1975년 1월~1979년 12월

제3대

박귀희(朴貴姫)

1980년 1월~1981년 12월

제4대

박후성(朴厚性)

1982년 1월~1990년 12월

제5대

강한영(姜漢永)

1991년 1월~1995년 12월

제6대

전황(全潢)

1996년 1월~1997년 12월

제7대

안숙선(安淑善)

1998년 1월~1999년 12월

1990년 박후성의 연출로 제71회 흥보전의 공연 이후 국립창극단은 창극의 예술성과 오락성을 갖춘 대중공연예술을 지향했다. 이런 창극활동을 관장해온 국립창극단의 단장은 위의 표와 같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1.294~95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715~16, 759~61쪽

참조어

국립국극단(國立國劇團), 창극단(唱劇團),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 , 화랑창극단(花郞唱劇團) , 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