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일본 축전주 태수 등원만정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조선 세종]일본 축전주 태수 등원만정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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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축전주 태수(筑前州太守) 등원만정(藤源滿貞)과 그 막하(幕下)인 비주 자사(備州刺史) 지상대장씨종(砥上大臧氏種)과 좌위문 대랑 등이 사람을 시켜 토산물을 바쳤다. 만정(滿貞)이 예조에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본조(本朝)에서 귀국(貴國)에 사신을 보냈는데, 답례(答禮)하는 전사(專使)가 4월 4일에 석성(石城)의 나루에 이르러, 드디어 재부(宰府)의 사제(私第)에 오시어 글을 내려 관선(官船)으로 호송(護送)하라는 일을 알리니, 어찌 감히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관선(官船)이 조회하는 날에 사례하여, 답하는 정성을 쓰겠습니다. 먼저 서신과 방물(方物)을 바쳐 바닷 길에 탈이 없는 경사를 보이오니, 하정(下情)이 자세히 도달되어 들리게 되면 다행이겠습니다. 유황(硫黃) 2천 5백 근, 단목(丹木) 4천 5백 근, 청자분(靑磁盆) 70개, 백자완(白磁椀) 크고 작은 것 20개, 양향(良香) 13근, 진피(陳皮) 16근, 정향피(丁香皮) 65근, 벼루[硯] 2개, 금화수협 1개, 화근(火筋) 2쌍, 의상(倚箱) 1개, 부태상(付太箱) 화근(火筋) 2쌍, 패도(佩刀) 5개, 동(銅) 1백 50근을 바칩니다.˝ 라고 하였다. 예조 참의 성개가 그 서신을 답하였는데, 그 서신에, ˝바친바 예물(禮物)은 삼가 이미 수납(收納)하였소. 아울러 회례사(回禮使)의 배가 석성(石城)의 나루에 이르렀는데 관선(官船)을 내어 호송(護送)한다고 말하니 감사합니다. 지금 토산물인 정포(正布) 1천 6백 50필로써 성의를 표시하오나, 변변치 못하여 부끄럽습니다.˝ 라고 하였다. 대장씨종(大藏氏種)이 예조에 서신을 바쳤는데, 그 서신에, ˝제가 귀국(貴國) 풍화(風化)의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돌보아 생각하여 마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군(寡君)이 저로 하여금 본주(本州)의 크고 작은 정사(政事)를 모의(謀議)하게 하므로,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편안히 거처할 여가가 없었으니, 이런 까닭으로 능히 예(禮)를 따라 어리석은 정성으로 문안(問安)하지 못하고 천 리 밖에서 한갓 우러러보는 마음만 쓸 뿐입니다. 방금 과군(寡君)이 귀국에 사신을 보내어 예물(禮物)을 교환하오니, 제가 진실로 원하는 바입니다. 변변치 못한 토산물인 단목(丹木) 4백 근, 유황(硫黃) 4백 근, 장도(長刀) 4자루, 곽향(藿香) 8근, 주석[錫] 27근, 주완(朱椀) 70개, 패도(佩刀) 4개로써 성의를 표합니다.˝ 라고 하였다. 예조 좌랑 성염조(成念祖)가 서신에 답했는데, 그 서신에, ˝태수(太守)를 따라 성심을 다하여 수호(修好)하니, 진실로 기쁘게 생각하오. 바친바 예물(禮物)은 위에 아뢰어 수납(收納)하도록 하였소. 인하여 토산물인 정포(正布) 1백 50필을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쳐 보내오.˝ 라고 하였다. 대랑(大郞)은 서신과 함께 토산물인 단목(丹木) 3백 근, 호초(胡椒) 1백 10근, 유황(硫黃) 1천 근, 빈랑자 50근, 연소(鉛燒) 8근을 바쳤다. 예조 좌랑 성염조가 이에 답서(答書)하기를, ˝바친바 예물(禮物)은 위에 아뢰어 수납(收納)하도록 하였소. 전자에 회례사(回禮使)에게 과해량미(過海粮米) 30석을 전인(專人)으로 전해 보냈음은 매우 기쁘게 생각하오. 지금 또 양미(粮米) 1백 석을 귀국 사신에게 부쳐 보내어 회례사(回禮使)에게 전해 주기를 희망하오. 토산물인 정포(正布) 1백 80필을 영수(領受)하기 바라오.˝ 라고 하였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세종 5년 9월 24일(임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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