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일본국 회례사 통사 윤인보의 선행 귀환 보고

[조선 세종]일본국 회례사 통사 윤인보의 선행 귀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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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회례사(回禮使)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가 먼저 돌아와서 복명하여 계(啓)하기를, ˝신 등이 처음 그 나라에 도착하니, 대우가 매우 박하며, 그 국도(國都)에 들어 오지 못하게 하고 심수암(深修庵)에 사관을 정해 주니, 국도와 거리가 가까운 30리쯤 되는데, 항상 병정을 시켜 지키게 하여, 그 나라 사람들과 통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중[僧] 혜공(惠珙)이란 자가 와서 묻기를 ‘들으니 명나라가 장차 일본을 치려 한다 하니, 진정 그러한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모르겠다.’하였더니, 혜공이 또 말하기를, ‘조선이 명나라와 마음을 같이 한다는데 어찌하여 모르는가. 앞서 명나라가 환자(宦子)를 일본에 보내 조칙(詔勅)을 내렸는데, 「만약 신하로서 섬기지 않으면 조선과 같이 일본을 토벌하리라.」고 하였고, 얼마 뒤에 그 사신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도망쳐 돌아간 일이 있으므로 의심이 나서 묻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 그 국왕이 보당사(寶幢寺)에서 신 등을 불러 보는데, 그 국왕은 머리를 깎고 가리복(伽梨服)을 입었으며, 집사하는 사람들도 다 중[僧]이고, 시종하는 자가 10사람에 불과하더이다. 인견하고 나서는 신 등의 사관을 송월암(松月庵)에 옮겨 주고 대우가 조금 낫더이다. 중 혜공과 주송(周頌)이 와서 말하기를, ‘국서(國書)에 영락(永樂) 을 썼기에, 우리 어소(御所)에서 그것을 싫어하여 경도(京都)에서 사신을 접견하지 아니한 것이니, 어찌해서 우리[日本]의 응영 연호(應永年號)를 쓰지 아니하였는가.’ 하더이다. 어소(御所)라 하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임금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부고(府庫)가 없고, 외국 사신이 오면 오직 부인(富人)으로 한 사람 지정하여 접대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 하더이다. 또 어떤 사람이 비밀히 말하기를, ‘국왕의 거하는 곳이 체면을 가누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어서 국도(國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도 하더이다. 국왕[御所]이라는 자는 매양 여러 절간[寺]으로 다니면서 재(齋)를 올리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으므로, 그 명령이 가까운 국도(國都) 부근에나 통할 뿐이라고 하더이다. 토지는 다 강성한 종족(宗族)들에게 쪽쪽이 나누어져 있어, 무슨 일이든지 왕의 뜻대로 안 되어 갈 뿐이라 하더이다.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부자(父子)는 성심으로 우리를 대우하였고, 축전 주수(筑前州守) 등만원(藤滿員)과 일기도주는 다 원망하는 말을 하였고, 소이전(小二殿)은 또 말하기를, ‘거년에 조선이 우리 대마도를 쳐들어 왔으니, 우리가 병선(兵船) 2, 3백 척을 청하여 조선 해안 몇 고을을 쳐부셔야 우리 마음이 쾌하겠다.’ 하며, 대마도 도도웅와(都都熊瓦)의 아우 도도웅수(都都熊守)는 또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가두어서 우리 대마도 사람으로서 너희 나라에 붙잡혀 가 있는 것과 같이 할 것이나, 본국과 더불어 통호(通好)하고 있기에 감히 그렇게 못하니, 그 붙잡혀 가 있는 사람들을 빨리 돌려보내게 하라.’고 하더이다.˝ 하였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세종 2년 10월 8일(계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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