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

목화

분류 과학기술/의약 > 시놉시스

중국에서 목화씨를 놀래 가져 온 문익점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30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사간원 좌정언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을 왕에 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정보를 드고 고려에서는 원제(元帝)의 참뜻을 알아보기 위하여 문익점을 원나라에 보냈다.
원제는 문익점에게 덕흥군을 지지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문익점이 이를 듣지 않자 그를 먼 교지(交趾)에 유배시켰다.

그러다가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원나라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어 문익점은 1366년 무사히 풀려나게 되었다.
그는 9월에 연경으로 오게 되었는데 도중에 문득 밭에 백설 같은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문익점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꺾으려고 하였다.
그 때 한 노파가 달려오더니 큰 소리로 나무랐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데 감히 국법으로 금하고 있는 것을 꺾으려고 하는가? 관이 알게 되면 당신과 나는 함께 벌을 받을 것이다.”
문익점은 노파의 위세에 눌려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토록 완강히 말리는 내막을 알고 싶어졌다.
“노인장, 도대체 이 흰꽃이 무엇이길래 국법으로까지 금하고 있단 말이오? 나는 멀리 고려에서 온 사람이라 내막을 알리 없으니 설명을 좀 해주시오.”

그러자 노파는 마지못해 하면서 설명을 해주었다.
“이것은 목면화이다. 이 나라의 법이 엄하여 나라 밖으로 가지고 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녕 가져가고 싶으면 아무도 모르게 가져가서 죄가 드러나지 않게 하라.”
“참으로 고맙소. 오늘 귀한 꽃을 보고 기념으로 가질 것이니 내 조심해서 가져가리다.”
문익점은 노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씨앗 세 개를 붓대에 숨겨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문익점은 이듬해 봄에 그 씨앗을 집 들에 심고 정성것 가꾸었다.
그러나 풍토가 맞지 않아 겨우 한 알만이 자라나 가을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렸다.

다음해에 그 씨앗을 다시 심었더니 여러 알이 잘 자라서 3년째 되는 해에는 꽤 많은 씨를 얻게 되었다.
이웃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다투어 시를 나누어 가서 차츰 각 지방에 목화가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솜털을 벗겨내는 방법을 아무도 몰랐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홍원(弘願)이라는 원나라 중이 찾아와서 목화를 보고 놀라면서 말했다.
“이것은 남방의 것인데 어찌하여 여기에 왔을까?”

홍원은 그때 문익점의 집에서 묵고 있었는데 문익점의 이야기를 듣고는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소거(?車, 목화씨를 가려내는 기계)로 시를 벗겨내고 탄궁(彈弓, 솜타는 활)으로 솜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萊)는 방차(紡車, 솜으로 실을 만드는 기계)를 만들어 실을 뽑았으며 문영(文英)은 직조법을 발명하였다.
문익점의 장손인 승로(承魯)는 의성 군수로 재직할 당시 밭 300평을 사들여 목화를 재배하고 민간에 장려하였다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옷감으로 명주나 갈포, 또는 모피 밖에 없었던 때라 목화가 들어온 뒤부터 의복사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되었다.

민간에서는 목화의 뿌리를 통경·진통 등에 다른 약재와 같이 처방하여 약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