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

한일회담

[ 韓日會談 ]

시대명 현대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양국간의 외교교섭.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1952년 2월에 제1차 회담이 개최된 후 65년 6월 22일에 한일협정이 체결되기까지 14년 동안 6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다. 제1차 회담은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의 중개로 51년 10월 21일부터 열린 예비회담을 거쳐, 이듬해 2월 15일부터 당시의 정부와 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정부 사이에 본회담이 시작되었으나, 쌍방의 주장이 크게 엇갈려 4월 21일 중단되었다. 제2차 회담은 53년 4월 15일에 열렸으나, 평화선문제·재일교포의 강제퇴거문제 등으로 7월 23일 다시 결렬, 같은 해 10월 6일부터 재개된 제3차 회담도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타 강이치로(久保田貴一郞)의 「일본의 36년간의 한국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했다」는 망언으로 10월 21일 또다시 결렬되었고, 그 후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제4차 회담은 57년 말부터 열린 예비회담을 거쳐 58년 4월 15일에 시작되어 재일교포의 북송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다가, 60년 에 의한 정권의 붕괴로 다시 중단되었다.

그 후 민주당정부는 한일회담 재개를 추진, 같은 해 10월 25일 제5차 회담이 열렸으나 5·16군사쿠데타로 다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가 대폭 삭감된 상황에서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대규모 투자재원을 확보해야 했던 군사정부는 일본자본의 유치라는 절박한 필요성에 따라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에 전력을 집중했다. 이러한 군사정권의 방침은 일본을 동맹세력으로 하여 한반도의 안정화를 꾀하고 중공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및 일본자본의 해외진출 욕구와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로써 61년 10월 20일 제6차 회담이 재개되었는데, 합의사항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이견과 양국내의 격렬한 반대투쟁으로 인해 타결이 늦어지자, 정부에서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특사로 파견, 비밀회담을 갖고 타결조건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게 했다. 이때 교환한 메모 내용을 근거로 65년 2월 20일 이 가조인되었으나 주요 의제였던 ·어업문제·문화재반환문제 등에서 우리 측이 지나치게 양보하는 등 음모적이고 굴욕적인 한일회담 추진 과정에 대한 반대투쟁이 거세게 일어나자, 군사정권은 6월 3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한일협정)을 정조인하고, 8월 14일에는 공화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국회에서 이를 비준함으로써 14년을 끌던 한일회담은 마무리되었다.

관련이미지

한일협정비준 동의안을 놓고 벌인 여야의 단상난투(1965.7.14).

한일협정비준 동의안을 놓고 벌인 여야의 단상난투(1965.7.14).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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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
1. 5·16과 군사독재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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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제개발과 민중수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