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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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 칭 : 소금
• 시 대 : 조선 후기(19세기)
• 설 명 : 나트륨과 염소의 화합물.
식염(食鹽)이라고도 한다. 화학명은 염화나트륨 NaCl이다. 조미 · 염장 등 일상생활에 널리 사용되는 외에 소다(탄산나트륨), 그 밖의 공업 방면에서 대량으로 사용된다. 인간에게 소금은 생존상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다. 원시시대에는 인간은 조수(鳥獸)나 물고기를 잡아 굶주림을 채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초식동물은 식물 속에 함유된 미량의 염분을 몸 속에서 농축하여 가지고 있으며,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잡아먹고 그 염분을 소금의 보급원으로 삼았다. 다시 그것을 인간이 먹는다는 순환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농경생활을 하게 되고 언제 잡힐지도 모르는 동물을 쫓지 않고 농사지어 만든 식물을 양식으로 섭취하게 되자, 생리적 요구를 충족할 만한 소금을 보급하는 일이 어렵게 되고, 또한 식물 속에 함유된 칼륨을 많이 섭취하게 되었기 때문에 균형상 소금을 더욱더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하여 인간은 따로 소금을 만들어 이것을 식품으로 할 필요가 생겼다. 그 결과 이미 선사시대에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 ·염호나 암염이 있는 장소는 교역(交易)의 중심이 되고, 산간에 사는 수렵민이나 내륙의 농경민은 그들이 잡은 짐승이나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기 위하여 소금 산지에 모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고려 이전의 소금에 대한 문헌은 매우 적다. 다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소금을 해안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대목이 있을 뿐이다. 신라나 백제에서도 해안지방에서 소금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도염원(都鹽院)을 두어 염분(鹽盆)을 국가에서 관장하여 직접 소금을 제조 · 판매하여 재정수입원으로 삼았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사유로 이관하였다가 다시 1309년(충선 1) 염정을 민부(民部)에 이관하고 유통부분에서는 중국의 입포매법(立賣法)과 계구매법(計口賣法)을 모방하여 포(布)를 납부하게 하여 소금을 구입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연안의 주군마다 염장(鹽場)을 설치하여 관가에서 소금을 구워 백성들은 미포와 환물하였는데, 1411년(태종 11)에 염장역미법(鹽場易米法)을 폐지하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소금은 국가의 중요한 재정 세원이었다. 그리고 궁가와 아문(衙門) 경영의 소금은 일부 현물로 수납하고, 일반민영은 세금을 과해 왔다. 그 후 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가 되자 소금은 완전히 전매제(專賣制)가 되었고, 1961년에 염전매법이 폐지되자 종전의 국유염전과 민영업계로 양분되었다.

소금은 사신(邪神)이나 마귀를 쫓는 힘이 있다고 가장 널리 믿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나쁜 것을 쫓는 데 소금을 뿌리는 습관이 있다.

※ 자료참조 : 시장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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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