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스님 구름을 타고 중국을 왕래하다

남지스님 구름을 타고 중국을 왕래하다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신앙설화

• 주제 : 신앙
• 국가 : 중국
• 시대 :
• 참고문헌 : 삼국유사

삽량주(揷良州) 아곡현(阿曲縣)의 영축산(靈鷲山) 암자에 행동이 기이한 스님이 있었는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인근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고, 스님도 또한 나타나지 않고 그 성명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스님은 항상 법화경을 강설하였는데, 신통력이 대단하였다. 용삭(龍朔) 초년에 이량공(伊亮公)의 가노(家奴) 지통(智通)이 7살 때 출가하였는데, 까마귀가 날아와서,
「영축산으로 가서 낭지(朗智)스님의 제자가 되십시오.」
하였다. 지통이 그 말대로 영축산을 찾아갔다.
어느 마을 앞 나무 밑에 앉아서 쉬는데, 홀연 이인(異人)이 나타나서,
「나는 보현대사(普賢大師)인데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왔다.」
하고 곧 계를 주고는 사라졌다. 지통은 몸과 마음이 황홀해지고 곧 지각(知覺)이 환히 트이었다. 다시 길을 가다가 또 한 스님을 만났다. 지통이 물었다.
「낭지스님은 어디 계십니까?」
「어째서 낭지스님을 찾느냐?」
지통이 까마귀의 하던 말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스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바로 낭지다. 지금 당(堂) 앞에 까마귀가 와서, 성아(聖兒)가 장차 스님께 올 것이니 마땅히 나아가 맞으라고 하기에, 와서 너를 맞는다.」
하고, 손을 잡고 탄식하며,
「신령스러운 새가 너를 깨우쳐 내게 오게 하고, 또 내게 알려 너를 맞이하게 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로운 징조이냐 ? 아마도 산신령의 도움인가 보다 전하는 말에 이영축산의 주인은 변재천녀 (辯才天女)라고 한다.」
지통이 감격하여 땅에 엎드려 예배하였다. 잠시 후에 낭지스님이 계를 주려고 하니까 지통이,
「제가 오다가 어느 마을 앞 나무 밑에서 이미 보현보살에게 정계(正戒)를 받았습니다.」
고 했다 낭지스님은 감탄하여,
「착하도다. 네가 이미 친히 보현보살의 계를 받았구나. 나는 태어나서부터 아침 저녁으로 은근히 지성(至聖)을 만나 뵙기를 원했지마는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네가 이미 친히 계를 받았으니 내가 네게 미치지 못함이 많을 것이다.」
하고. 도리어 지통에게 경례하였다.
이리하여 지통이 계를 받던 나무를 보현수(普賢樹)라 일컬었다. 지통이 낭지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이 곳에 와 계신 지가 얼마나 되십니까?」
「법흥왕(法興王) 정미년(丁未年, 왕 14년, 서기 527)에 처음으로 이곳에 왔으니 지금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고 낭지스님이 대답했다. 지통이 이 산에 온 것이 문무왕(文武玉) 원년 정미년(丁未年, 서기 661)이니 이미 134년이 지난 것이다.
뒤에 지통스님이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처소에 가서 법화경의 오묘한 뜻을 깨닫고 교화에 많이 이바지하였는데, 그가 곧 추동기(錐洞記)의 저자이다.
원효대사가 반고사(盤高寺)에 머물러 있을 때 자주 낭지스님을 찾아가 뵈었는데, 스님은 대사에게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專心論)을 짓게 하였다.
대사는 그 두 가지를 지어 은사(惑士) 문선(文善)으로 하여금 가져다 낭지스님에게 바치게 하였는데, 그 책 끝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붙였다.
「서쪽 골짜기 사미는 머리 조아려 동족 메뿌리 상덕(上德) 암진(巖前)께 절한다. 가는 티끌 불어 영축산을 보태게 하고, 작은 물방울 날려 용연(龍淵)에 던진다.」
영축산 동쪽에 대화강(大和江)이 있는데, 중국 대화지(大和渽)의 용의 식복(椎訓)을 위해 베풀었던 것이므로 용연(龍淵)이라 하였다.
지통스님과 원효대사는 다 대성으로, 다같이 낭지스님께 사사하였으니, 도가 높고 뛰어남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낭지스님이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여러 무리와 함께 경의 강설을 듣고는 곧 돌아오곤 하였는데, 그 곳 스님들이 그들 이웃에 사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뿐, 그가 머물러 있는 곳을 아무도 몰랐다.
하루는 절에서 여러 사람에게,
「본래부터 이 절에 있는 사람은 제외하고 다른 절에서 온 스님들은 각기 자기가 있는 곳의 이름난 꽃과 진기한 식물을 가지고 도량에 바치라.」
하고 명령 하였다.
낭지스님은 이튿날 영축산의 과일나무 한 가지를 꺾어다가 바쳤다. 절의 스님이 이것을 보고,
「이 나무의 범명(梵名)은 달제가(梅提伽)인데, 여기서는 혁(赫)이라고 한다. 오직 서천축과 해동(海東, 우리나라를 말함) 두 나라 영축산에 만 있는 것이다. 이 두 산은 다 제십 법운지(第十 法雲地)로서 보살이 사시는 곳이다.」
하고 낭지스님의 행색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해동 영축산에 사는 성자임을 알아보았다.
이로 인하여 스님의 이름이 중국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낭지스님이 거처하던 암자를 혁목암(赫木庵)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혁목사(赫本寺)의 북쪽 언덕에 있는 옛 절터가 그 유적이다.
영축사기(靈駕寺記)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낭지스님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암자자리는 가섭불(迦葉佛) 때의 절로 기록 되어 있다. 원성왕(元聖王) 때에 이르러 고승 연회(緣會)가 이 산중에 와 살면서 낭지 스님의 전기를 지어 세상에 전해졌다고 한다.」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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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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