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의 공덕

보시의 공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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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공덕
• 국가 : 인도
• 참고문헌 : 비이자문경

석존께서 여러 제자들과 함께 중부 인도의 아유쟈국의 고오가 강기슭에 계셨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서쪽 멀리서 일륜(日輪-태양)과 같은 광명이 비쳤다.
이 광명을 본 아난(阿難)은,
『세존님, 저 광명에는 위덕이 있사온데 무슨 빛입니까?』
『저 광명은 몸에 오신통(五神通)을 지니고 오백 명의 선인(仙人)을 거느린 비야샤라는 선인이 가지고 있는 광명이다.』
비야샤 선인은 모든 학문에 통달하고 있을 뿐아니라. 그의 몸가짐도 엄숙하였다.
그도 석존이 강기슭에 계신 것을 멀리서 뵙고, 제자들을 데리고 석존을 찾아와서 예배를 드린 다음,
『세존님을 여기서 뵈옵는 것은 저희들의 크나큰 기쁨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이곳에 온 것은, 세존님께 한 가지 여쭈어 볼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질문에 대하여 해답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했다.
『좋다, 그대가 묻고 싶은 것을 말하여 보라.』
『네, 그럼 여쭈어 보겠습니다. 보시(布施)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또 무슨 까닭으로 보시를 하는지 시주(施主)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보시의 덕은 죽은 다음에도 그 사람에게 복덕을 준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지? 또 세존께서 입적하신 후에, 그 답에 공양을 바치는 사람은 복덕을 받는다고 하는데 세존 입적 후, 누가 그 공을 받는 것인지? 이런 것들에 대하여 의문이 있는 것입니다.』
『남보다 뛰어난 학자라 묻는 것이 매우 깊은 곳을 파고 들었다. 우선 보시의 복덕에 대하여 설명하리라. 이렇게 보시의 공덕을 듣는 그대에게도 어느 정도 보시의 공덕이 주어질 것이다. 보시라는 것은 사람에게 재물(財物)을 베풀 때 그 보답(報答)이 자기에게 되돌아 오는 까닭에 보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주라는 것은 자기 소유의 음식, 침구 등을 자기 손으로 남에게 베푸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믿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에게 베풀 때가 자기 손으로 직접 하지 않고, 사람의 손을 거쳐서 베푼다면 그 사람은 진실한 의미의 시주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보시에는 서른 세가지의 부정(不淨)이 있는데, 이를 각별(各別)히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이러하다.
一은 그릇된 나쁜 마음으로 매사를 반대로 보는 것으로서 청정한 신앙이 없는 사람이 보시를 했다하여도 그것은 깨끗한 보시가 아니다.
二는 은혜(恩惠)를 갚기 위하여 재물을 베푼다 하여도 그것은 참된 보시는 아니다.
三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무엇을 주었다 하여도 그것은 깨끗한 보시가 아니다.
四는 마음속으로 어떤 목적이나 욕망을 가지고 교환식(交換式)으로 무엇을 주었다 하여도 그것은 보시가 아니다.
五는 재물을 불속에 버렸다 하여도 희사(喜捨)의 공덕은 아니므로 이것도 보시가 될 수 없다.
六은 재물을 물 속에 버렸다 하여도 역시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七은 왕의 환심(歡心)을 사려고 재물을 왕에게 바쳐도 보시가 되지는 않는다.
八은 도적의 협박(脅迫)이 두려워서 도적에게 재물을 주었다 하여도 깨끗한 보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당연히 버려야 할 것을 사람에게 주었다 하여도 역시 깨끗한 보시는 안되는 것이다.
九는 다섯 가지 버려야 할 것 중의 하나인 독(毒)을 사람에게 준다면 결코 보시가 될 수 없다.
十은 칼을 주어도 보시가 아니다.
十一은 사람을 교사(敎唆)하여 고기를 주어도 그것은 깨끗한 보시는 되지 않는다.
十二는 생물(生物)들에게 평등이 베풀어 주어서 양육하더라도 그렇게 함으로서 일종(一種)의 세력을 얻으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깨끗한 보시는 아니다.
十三은 자기가 명성을 얻고자, 재물을 주어도 깨끗한 보시는 되지 않는다.
十四는 노래하고 즐기기 위하여 기녀(妓女)에게 재물을 주어도 그것은 깨끗한 보시는 아니다.
十五는 파산(破産)할 지경이 되어서 재물을 버렸다하여도 그것은 깨끗한 보시는 될 수가 없다.
十六은 자기의 주택에 재물을 버렸다 하여도 그것은 보시가 아니다.
十七은 왕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보시가 될 수는 없다.
十八은 사슴, 새와 같은 것이 곡식을 먹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한 연민의 정없이 마음대로 못먹게 한다면 이것도 역시 보시는 아니다.
十九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연구를 위하여 공장(工匠) 공작을 통하여 물건을 만들어 내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도 그것은 보시가 아니다.
二十은 어떤 사람이 중태에 빠져서 죽음이 두려워서 의사에게 재물을 주었다 하여도 그것은 보시가 아니다.
二十一은 만약 어떤 사람이 남을 때리거나 욕을 한 다음 후회하는 마음으로 재물을 그 사람에게 주었다 하여도 그것은 깨끗한 보시가 되지 않는다.
二十二는 보시란 사람이 은덕을 베푸는 마음으로 보시한 다음 자기에게 공덕이 있을까 하고 의심한다면 그 역시 모처럼의 보시가 되지 않는다.
二十三은 보시를 하고나서 보시한 것을 후회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은 보시가 아니다.
二十四는 보시를 한 후에,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재물을 가지면 그것을 모두 되돌려 받아서 다시 자기 소유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면, 그 보시는 깨끗한 보시가 될 수 없다.
二十五는 보시를 한 다음 그 보시의 복덕을 자기에게로 돌리고 다른 사람은 모른체 하는 이러한 독점적(獨占的)인 생각을 갖는다면 그 보시는 부정한 것이다.
二十六은 사람이 다 늙어서 재물을 남에게 베풀거나, 또는 중년(中年)쯤 된 나이에 병에 걸려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믿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염라 대왕의 사자는 이것을 보고 미소를 띠운다. 형제, 친척들이 눈물을 흘리고 울고 불고해야 비로소 보시할 마음이 생겨서 그 때 보시를 한다하여도 그것은 깨끗한 보시는 아니다.
二十七은 자기의 이름을 날리기 위하여 재물을 베풀어 어디의 누구는 대 시주라는 명성을 얻으려는 명예심(名譽心)에서 보시를 한다면 그것은 깨끗한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二十八은 만약 어떤 사람과 서로 사이가 나쁜데 상대방이 시주를 많이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나 질투와 증오감을 가지고 보시를 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보시는 될 수 없다.
二十九는 여자와 놀기를 목적으로 하거나 본능(本能)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금, 은 보석, 비단 침구 등을 주어도 그것은 보시라고 말 할 수 없다.
三十은 어떤 사람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상속(相續)할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그 재물을 보시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끗한 보시가 아니다.
三十一은 이 사람에게 주면 복덕이 있고, 저 사람에게 주면 복덕이 없을 것이라는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생각해서 재물을 주었다 하여도 그것은 깨끗한 보시가 아니다.
三十二는 더러운 옷을 몸에 걸친 빈곤(貧困)한 사람은 돌보지 않고, 오히려 재산이 있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보시를 한다면 그것은 결코 보시가 될 수 없다.
三十三은 진기한 꽃이나 나무의 열매를 갖고 싶어서 교환하는 뜻에서 재물을 주었다 하여도 그것은 보시가 아닌 것이다.
이상 서른 세가지의 부정한 보시를 하고도 이것을 진실된 보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데 이것은 모두가 부정한 보시이므로 그 한계(限界)를 잘 분간해서 참된 보시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부정한 보시에는 공덕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말라 비틀어진 씨앗을 황폐(荒廢)한 밭에 심었다고 하면 비가 와도 그 씨앗은 부패하거나, 운좋게 싹이 나왔다 하더라도 꽃은 안피고 열매도 안열리는 것과 같이 부정한 마음으로 행한 보시는 결코 공덕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지혜로움을 갖추신 세존님, 간곡하신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한 번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만, 어떻게 하면 보시의 공덕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가령 부처님의 훈계를 잘 지키는 사람과 계율을 깨고도 가책(苛責)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이 두 사람이 모두 보시를 할 경우 그 응보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잘 들어 보아라. 마음에 믿음을 가지고 베푸는 것을 보시라고 함이니 미래를 두려워 하지 않고, 또 타인을 경시하지 않고, 행하는 것을 참다운 보시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복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지계자(持戒者)거나, 무계자(無戒者)거나 간에 마음에 믿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염원(念願)을 품고 재물을 베푼다면 이런 사람을 참다운 시주자라고 하는 것이다. 보시에는 법을 풀어서 들려 주는 법시(法施), 사람을 구하여 주는 의·식·주를 베풀어 주는 자생시(資生施), 사람이 사는 옥택시(屋宅施), 등명시(燈明施), 향시(香施) 등 다섯 가지가 있는데, 이들 다섯 가지의 보시를 만족하게 하는 사람을 시주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시자는 그 과보(果報)를 절대로 잃지 않는 법이다.』
『깨끗한 보시라함은 어떠한 보시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믿는 마음을 가지고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에 대하여 자심(慈心), 상심(常心) 희심(喜心)의 세가지 마음을 가지고 재물을 베풀 때 이것을 깨끗한 보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내가 입적 후 그 탑에 공양을 바치는 사람의 복덕에 대하여 이야기 하리라. 내가 입적 후 탑에 공양하는 사람들의 공덕은 현재 나에게 공양을 한 공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법신인 부처님이라는 것은 육체라는 것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육체가 존재하건 안하건 부처님을 공양하는 마음은 모두가 평등하고 같은 것이다.
가령 전륜왕이 여러 나라를 향하여 모름지기
「살생하지 말지어다.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아라.」
하고 영(令)을 내렸을 때 이 명(命)을 직접 들은 것은 한 사람 뿐이지만 왕을 자기 눈으로 보지 않았다 하여도 모든 백성들이 왕명(王命)을 충실히 지키며 생활을 한다면 왕에게 직접 공양 하지않더라도 왕은 백성을 가상히 여기고 또 백성은 왕명을 쫓아서, 나쁜 짓을 안하므로 천상계에 태어나는 과보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의 육신을 보고도 마음에 사견을 갖는다면 저 데바닷다 모양으로 지옥의 악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내가 입적한 후에도 계율을 잘 지키고 공양을 바치면 훌륭한 과보를 얻게 됨은 명약 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그리고 보시의 복덕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이러하다. 보시의 복덕은 시주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며, 보시의 복덕은 형태(形態)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주의 육신은 없어져도 복덕은 그림자 같이 따라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시의 복덕은 잃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주의 손에, 몸속에, 뱃속에 복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밀감 즙(蜜柑汁)이 밀감 자체를 떨어져서 있는 것은 아닌 것같이 시주를 떠나서 있는 것은 아니다. 시주의 베품은 적다 하더라도 복덕은 매우 큰 것이다. 어떤가, 이제 보시에 대한 의문이 풀렸을 줄 아는데』
『간곡하신 설법을 들으니, 이제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후부터, 그는 석존의 가르침대로 보시를 행하였다고 한다.

<毘耶恣問經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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