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관음신앙

한국의 관음신앙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신앙설화

• 주제 : 신앙
• 국가 : 한국
• 참고문헌 : 불교설화대사전

한국의 관음신앙은 삼국유사에 나타난 중생사 관음, 백율사 관음, 민장사 관음, 낙산사 관음, 분황사 대비관음 등이 유명하다.
모두 이것은 영험설화에서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다만 경흥(景興)대사가 만난 11면 관음 이야기를 적어 보겠다.
신문왕이 즉위하여 경홍법사를 국로(國老)로 삼아 삼량사(三郎寺)에 머물게 하였다.
그런데 국사가 우연히 병에 걸려서 월여간이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때에 한 비구니(比丘尼)가 문병차 와서 화엄경(華嚴經)의 선우원병(善友原病 ― 좋은 벗이 병을 회복케 해 준다는 말)의 설(說)을 인용해 말하기를「지금 법사의 병은 우로(憂勞)의 소치이니 희소(喜笑)하면 나을 것입니다.」고 하면서 십일상(十一相)의 가면을 만들어 갖가지 웃음소리 춤을 추게 하니 뾰족도 하고 깎는듯하여 그 변태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모두가 턱을 떨어뜨릴 지경이었으니, 법사도 대희(大喜) 대소(大笑)하였는데 그런 뒤로 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대(團大 ― 地 ․ 水 ·火 ․ 風)가 가합(假合)하여 신체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무병할 수가 없다.
병에는 사대(四大)로부터 생기는 네 가지 병이 있으니
첫째는 풍황달열(風黃怛熱)을 주로하는 신병 (身病)이오,
둘째는 전광혼란(顚狂昏亂)을 주로하는 심병(心病)이요,
셋째는 칼과 나무토막에 다친다는 동작(動作)의 과로로 인하여 생기는 객병,(客病)이요,
넷째는 기갈한서(飢渴寒署)와 고락우희(苦樂憂喜)를 주로하는 구유병(俱有病)이요,

그리고 사대가 서로 조화롭게 못하면 백병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울증은 치유될 수 있다는 영험을 낳게 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성행한 탈(假面) 놀이가 삼국시대에는 악귀(惡鬼)를 몰아내는 것으로써 시작 되었다.
하거니와 어쩌면 이것이 한국 탈놀이의 시초(始初)가 아닌지 모르겠다.
그 뒤 비구니는 문을 나가 삼랑방 남쪽에 있는 남항사(南巷圖)의 불전(佛殿)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사람을 뒤따르게 해서 그 비구니를 찾아가 보니 그가 숨을 때 가지고 있던 지팡이는 법당 안에 있는 십일면 관세음보살 원통상(十一面觀世音菩薩圓通像)앞에 놓여 있었다.
또 남해금산의 이야기와 낙가산 보문사가 유명한 이야기다.
경남 남해 금산 보작암은 원효(元曉)성사가 이곳에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 신라 32대 신문왕(神文王) 3년(서기 983년)에 창건한 관음도량이다.
당시의 산이름은 보광산(普光山)이며 지금의 금산으로 고치고 그 뒤에 절 이름이 보리암으로 고쳐졌다는 것이다.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가 등국하기 전에 큰 뜻을 품고 팔도강산의 명승지를 두루 찾아 다니면서 기도를 올렸는데, 이 보광산은 산수가 미려한 명승지일 뿐만 아니라, 그 영기가 수승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영장에서 기도를 올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꿈에 관세음보살이 금척(金尺)을 주었는데 마음속으로 무척 기뻐하였다. 그 뒤에 과연 큰 뜻을 성취하여 등극하게 된 것이다.
태조는 이러한 영광이 보광산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이라고 생각하고 불은에 보답하는 뜻으로 기도 꿈에 금척(金尺)을 얻은 일을 회상하며 보광산을 금색비단으로 둘러쌓아 놓도록 하였다.
이를 시행할 것을 신하들과 상론하였더니가
「이 큰 산을 금색 비단으로 싸서 봉(封) 한다 하오나 빈약한 국고로서는 당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비단이란 눈·비를 맞으면 썩는 것이므로 해마다 싸야 될 것이오니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해 내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다른 묘안이 라도‥‥」
「산 이름에 비단금(錦)자를 붙여서 금산이라고 하면 바로 비단 비단산이 되어서 천만년을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인 줄 아뢰오.」
이렇게 해서 지금의 금산(錦山)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보리암(普提庵)이라고 고친 것은 이 보광사에서 진실한 신심으로 관음기도를 하면반드시 보리(菩提 - 正覺)를 성취하게 된다고 하여 (보리암)이라고 이름을 고쳤다는 것이 기도 하다.
서해(西海) 강화 낙가산 보문사(普門寺)는 신라 때에 관음도량으로 회정(懷正)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이 보문사는 동해의 파산사나 남해 금산의 보리암과는 다른 특색이 있다.
이 보문사의 관음상은 아기를 안고 있는「송자(送子)관음」 상을 봉안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요, 또 18나한을 같이 모시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 하겠다.
이 송자관음은 자식을 구하는 이가 이곳에 와서 성심껏 기도를 올리면 그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는 가피력이 널리 전하여지고 있다.
옛날 신라 때에 3산면에 사는 어부가 바다에 나가 그물을 치고 고기떼가 걸리기를 기다렸는데 고기는 걸리지 아니하고 메주처럼 생긴 인형(人形)으로 새겨진 돌멩이가 스물두 개나 걸려 나왔다.
고기를 잡으려던 어부가 깜짝 놀라서 바다에 도로 쏟아버리고 배를 옮겨 그물을 쳤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앞서와 같은 인형 돌멩이가 스물두 개가 걸려 올라왔다. 그래서 또 바다에 쏟아 버리고 배를 다른 곳에 옮겨서 다시 그물을 쳤더니 전과 같은 인형 돌멩이가 또다시 걸려 올라온 것이다.
어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것이 천지조화이지 이럴 수가 있나하고 탄식하면서 다른 어부에게 푸념하는 것이었다.
「그 인형 돌멩이가 보통 돌멩이가 아니라 인형같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서 부처의 돌멩이일세! 그러니 저 비탈벼랑에 있는 바위굴 속에 갔다가 모셔보게나!」
그 어부는 이렇게 권하므로 그의 의견대로 바위굴 속에 이 돌멩이를 모셨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이 어부는 거부장자가 되고 자식들도 많이 남아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설화가 있다. 이러한 불 ·보살의 신묘한 영험이 있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인근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복(析福)치성을 올렸다는 설화가 있다.
그 뒤에 회정(懷正)대사가 이 낙가산을 찾아왔는데, 이곳이 필시 관음도량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칡넝쿨과 다래넝쿨로 가려있는 바위굴을 찾아내고 굴속을 살펴보니 돌멩이 인형이 널려 있었다.
회정대사가 보아하니 한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임이 분명하고 좌보처 미륵(彌勒)보살, 우보처 제화갈라(提和渴羅)보살, 그리고 일좌(一座)와 18나한상이 분명한 것으로 친견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16나한이 원칙인데 18나한은 어디서 근거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혹시나 해서 보결나한(補缺羅漢)으로 더 조성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당초에 조각된 성현들의 상호가 선(線)이 분명치 않으므로 얼마 후에 다시 보첨(補添)조각하여 뚜렷이 나타나게 하였다.
회정대사는 이 22존은 친견하고 3존상과 18나한은 굴속에 모시게 하고 송자(送子)관음보살은 따로 관음전(觀音殿)을 지어 모시게 한 다음 낙가산(落迦山) 보문사(普門寺)로 부르게 하였다는 보문사 창건의 연기(緣起)가 있다. 이와 같은 창건의 연기가 있는 보문사에는 이에 얽힌 일화도 적지 않다.
이 보문사는 관음도량도 되고 나한도량도 되는데 기도처로서 크게 각광을 받아왔다.
그런데 나한기도를 올릴 적에 나한님의 칭호를 처음에는 십팔성중(十八聖衆)이라고 불렀다. 기도객이 남녀 할 것 없이 수 없이 와서 소리를 내어 청명기도를 하는데 <십팔성중> 하고 부르는 것이 발음에 있어 상스럽지를 못하다하여 (이구성종 ― 二九聖衆)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랬더니 어느 날 밤에 나한이 나타나서 힐끗 보며 하는 말이
「이구성중이라니, 지구성중은 아니고 이구성중이 란 말이냐‥‥‥」
라고 빈정거렸다. 그래서 이로부터는 <제대성중-諸大聖衆>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도 나한기도를 올리는 이는 제대성중하고 부르며 기도정근하는 것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나한성중-羅漢聖衆)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동해의 낙산사(洛山寺), 남해(南海)의 보리암(普提庵), 서해(西海)의 보문사(普門寺)는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인 동시에 <보타락가>의 대표적인 시현지(示現地)라 하겠다.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은 종파를 초월한 통불교적(通佛敎的) 신앙으로 받아들고 있으니, 모든 사찰에 관음보살을 시적(示跡)의 영장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위의 3대 관음성지 이외에도 관음의 영장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금강산에 자리 잡은 보덕굴(普德屈 - 지금은 이북에 있음), 강원도 인제의 내설악 성덕산 관음사(聖德山 觀音寺) 등을 들 수 있다.
금강산의 보덕굴(普德堀)은 「보덕각시의 연기」와 「법기보살의 연기」가 오늘에 전해지고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40년 전에 하나의 포교서(布敎書)로서 간행 분포한 바 있었고, 이것을 다시 알기 쉽게 새로운 말로 엮어『구도의 길』이라는 제하(題下)의 책자를 이전에 펴낸 바 있다.
여기에 잘 나타나 있듯이 우리나라 성관음 시적지(示達地)로서는 으뜸이라 하겠다.
서울 근교에도 옛부터 관음의 영응도량(靈應適場)이 있어 왔으니 동(東)에는 안양암(安養庵 - 東大門區 昌信洞)이 있고, 서(西)에는 옥천암 해수관음(玉泉庵 海水觀音-西大門區 弘濟洞)이 있으며, 남(南)에는 관악산 삼막사(冠幕山 三幕寺) 등이 그것이다.
이 세 곳이 명성을 떨쳤으니 오늘에도 기도 참배하는 이가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는 모든 사찰의 가람(伽藍)가운데는 관음전(觀音殿) ·극락전(極樂殿)을 위시해서 보광전(普光殿) ·원통전(圖通殿) 등의 법당이 있는 것으로 특이하다.
특히 관음보살을 본존(本尊)으로 모신사찰도 많으니 관음사(觀音寺)·극락사(極樂寺)·낙산사(洛山寺)· 보문사(普門寺) · 보광사(普光寺) ·원통사(圓通寺) · 성덕사(聖德寺)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또 대웅전(大雄殿)안에는 보처존(補處尊)으로 관음보살을 모시지 않은 절이 없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이 통불교적 신앙이라 함을 실감할 수 있거니와 특히(관음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하고 관세음보살을 주존(主存)으로 삼아 보문사(普門寺 - 서울 城北區 普門洞)를 본사(本寺)로 현 보문종(普門宗)이 창종(1972)된 바 있거니와 보문종은 관음보살의 보문시현(普門示現)에 그 뜻이 있다고 하겠다.
관음신앙은 일반 불교신자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 이르기까지 현세적 구세주로서 관음상을 만들고 있고 또 구고구난(救苦救難)을 관세음보살에게 귀앙(歸仰)해 마지않는다 하겠으니 한국불교는 관음신앙이 명실상부하게 그 중추적 위치에 서 있다고 하겠다.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난을 당하였을 때나 수화(水火)의 액운이 겹쳤을 적에도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한 영험기는 여러 사기(史記)나 고승전에서 볼 수 있거니와 이것은 앞에서도 기술하였듯이 의상대사의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낙산의 관음성지를 조성하였던 특수성에 비추어 불교본연의 정신과 관음보살의 원통시현(圓通示現)을 재인식하고 그러한 정신을 오늘에 실현하는 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와 같이 한국불교는 통불교적으로 관음신앙이 그 저변에 깔려 있음을 재인식 · 재확인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염피관음력(念被觀音力)에 힘입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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