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원종]삼별초의 항쟁 2

[고려 원종]삼별초의 항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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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 12년(1271) ○ 정월에 박천주(朴天澍)가 진도(珍島)에 이르니 적이 맞이하여, 벽파정(碧波亭)에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면서 비밀히 병선 20척을 보내어 관군을 노략질하여 배 한 척을 빼앗고, 90여 명을 죽였는데, 나주 사록(司錄) 김응덕(金應德)이 적과 싸워서 배 한 척을 잡아다 죽였다. ○ 2월에 삼별초가 장흥부 조양현(兆陽縣, 全南寶城)에 침입하여 노략질한 것이 매우 많았고, 군함을 불태웠다. 방어도령(防禦都領) 진정(陳井)이 자원 종군하였으나 주색에만 빠져 있고 군무를 충실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하였다. ○ 3월에 삼별초가 합포현(合浦縣, 慶南昌原)에 침입하여 감무(監務)를 잡아갔다. ○ 4월에 삼별초가 금주(金州, 慶南金海)에 침입하였는데, 방호장군 박보(朴保)가 산성으로 달아나 들어가니 적이 불을 놓고 노략질하였다. ○ 몽고에서 보낸 주부개(周夫介)가 와서 조서내리기를, ˝혼도의 주청에 의하면 군마(軍馬)를 더 보내어 더위와 장마가 지기 전에 역적을 쳐서 평정하게 하여야 하겠다고 하였는데, 짐이 생각한즉 덥고 장마지기 전에 군마가 저 곳에 이르지 못하겠으니, 경이 근처에서 군사6천 명을 선발하여 진도를 쳐서 빼앗도록 하여야 하겠다. 만일 일이 일찍 끝나면 경의 백성들에게도 편리하고 유익할 것이다˝하였다. 중서성에서는 공문(公文)을 보내기를, ˝진도의 적 무리가 관청과 민가를 노략하고 여러 섬 30여 개 소를 함몰하여 그 힘이 점점 성하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교만 방자하게 되었다. 비록 항복한다고 하나 사실은 성심이 아니니 급히 쳐서 큰 해를 제거하여야 하겠다. 만일 덥고 장마질 때까지 이른다면 갑자기 쳐서 빼앗기 어려울 것이니, 본국으로 하여금 군사 1백40척을 더 출동하여 힘을 합해서 적을 치게 하노니, 거기에 해당하는 군량과 기구도 진력해서 공급하여 실수하고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여야 하겠다.˝하였다. ○ 5월에 장군 변량(邊亮)?이수심(李守深) 등을 보내어 수군 3백 명을 거느리고 진도의 적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4품관 이상 집에서 종 한 명씩을 내어 수수(水手)에 충당하게 하였다. ○ 3군이 진도를 토벌하였다. 김방경은 흔도와 함께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에서부터 들어가며, 희옹 및 홍다구는 좌군(左軍)을 거느리고 장항(獐項 노루목)에서 부터 들어가고, 대장군 김석(金錫), 만호 고을마(高乙?)는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동면(東面)에서부터 들어가니 전함이 총 백여 척이었다. 적이 벽파정으로 모여 중군을 항거하려 하였다. 다구가 앞서 나가며 불을 놓아 협공하니 적이 놀라 흩어지며 우군쪽으로 갔다. 우군이 두려워하여 중군으로 가려 하니 적이 배 두 척을 잡아서 모두 죽였다. 이보다 앞서, 관군(官軍)이 자주 적과 싸와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적이 업신여겨 방비를 하지 않았는데 관군이 냅다 치니 적이 모두 처자를 버리고 도망갔다. 적에게 붙들려 갔던 강도(江都)의 사녀(士女)와 보화 및 진도의 주민들이 모두 몽고 군사에게 잡혔다. 위왕(僞王) 승화후 온은 영녕공 준의 동모형(同母兄)이었다. 〈이보다 앞서〉준이 희옹에게 가만이 말하기를,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형의 죽음을 구하여야 한다.˝하였는데, 다구가 먼저 들어가 온(溫)과 그 아들 환(桓)을 죽였다. 적당 김통정(金通精)은 나머지 무리를 거느리고 탐라(耽羅)로 도망해 들어갔다. 처음에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 안방열(安邦悅)이 구도(舊都, 개경)로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태조의 영전에서 점을 쳤는데, 반은 존(存)하고 반은 망하는 점괘를 얻고, 망하는 것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요, 존하는 것은 해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적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진도에 들어가 있으면서 적을 달래어 말하기를, ˝용손(龍孫)은 12대에 끝나는데 남쪽으로 가서 제경(帝京)을 이룩한다˝〔龍孫十二盡向南作帝京〕는 참설(讖說)을 이에 징험할 수 있다고 하면서 드디어 적의 모주(謀主)가 되었다. 패하게 되자, 몸을 뛰쳐나와서 김방경에게 가 보려고 하였는데 군사들이 쳐서 죽였다. 이 때 적장(賊將) 유존혁(劉存奕)이 남해현을 점거하고 연해 지방을 쳐서 노략질하다가 적이 탐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배 80여 척으로 따라갔다.
• 출처 : 『高麗史節要』 권18 원종 순효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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