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전 현령 나대용의 상소 가운데 창선을 건조하여 쓸 만한지를 시험하게 하다

[조선 선조]전 현령 나대용의 상소 가운데 창선을 건조하여 쓸 만한지를 시험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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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 삼도 통제사(兼三道統制使) 이운룡(李雲龍)이 치계하기를, ˝나주(羅州)에 사는 전 현령(縣令) 나대용(羅大用)의 상소 내용에 ˝신은 나주에서 성장하였다. 계미년에 등과(登科)하여 6년 동안은 북쪽을 방어하였고 7년 동안은 남쪽을 방수(防戌)하였으며, 신묘년 연간에는 수사(水使) 이순신(李舜臣)의 감조 전선 출납 군병 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이 되었다. 임진 왜변의 초기에 옥포(玉浦)에 머물고 있던 왜적이 진격해 와 싸움을 벌일 때 신은 발포 가장(鉢浦假將)으로서 앞장서 돌격해 들어가 적선 2척을 포획하였고, 사천(泗川)·선창(船滄)·당항포(唐項浦) 등지의 15여 회에 달하는 전투에서는 모두 수공(首功)을 세웠으므로 이름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마침내 강진 현감(康津縣監)에 제수되었으며 그 뒤로 연이어 금구(金溝)·능성(綾城)·고성(固城)의 현령에 제수되었다. 나 자신은 군대일에 익숙해지다 보니 군병(軍兵)의 기밀에 대해서도 조금 짐작할 수 있게끔 되었다. 신축년 11월에 어미 상(喪)을 당하여 돌아갔다가 연이어 아비 상을 만나 6년 동안 거상(居喪)하다 보니 당연히 해야 할 책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비로소 복(服)을 마쳤기에 한 가지 계책이 있어 구?챰효?찾아와 호소한다. 대체로 왜적을 막는 데에는 주사(舟師)보다 앞설 것이 없다. 임진·계사 년간의 전선(戰船) 숫자는 거의 2백여 척에 달하였으나 오히려 부족하였다. 그런데 정유재란 뒤에는 간신히 마련한 전선의 숫자가 삼도(三道)를 통틀어 60여 척이었으니 각처에 배분하는 데 있어 극히 소홀하여 뜻밖의 사태가 일어날 경우 속수 무책일 수밖에 없으니 뉘라서 숫자를 늘리는 것을 바라지 않을까마는 군사가 부족하여 만들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그 군사의 숫자로써 배를 늘리는 계책을 말해보겠다. 거북선[龜船]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의 숫자가 판옥선(板屋船)의 1백 25명보다 적게 수용되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각 영(營)에 한 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다. 신이 늘 격군을 줄일 방도를 생각하다가 기해 년간에 감독할 때,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다른 모양의 배를 만들었는데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았으므로 이름을 창선이라 하였다. 격군 42명을 나누어 태우고 바다에 나아가 노를 젓게 하였더니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고 활쏘기의 편리함도 판옥선보다 나았다. 그뒤로 나라가 평화로워지자 한 번도 전쟁에 쓰지 않은 채 여러 해를 버려두어 썩어가고 있다. 이후로는 신분이 미천하다 보니 말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람들이 실답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다시는 이어 만들지 않았고 그 제도마저도 그대로 버려둔 상태이다. 만일 다시 이 배를 만들도록 하여 대소(大小)의 여러 장수에게 각기 1척씩 맡긴다면 배 숫자는 전보다 배나 되지만 사수와 격군은 더 늘지 않아도 저절로 충분할 것이다. 또 연해(沿海)의 각 고을에는 배의 사수·격군의 전 숫자를 창선에 옮겨 싣고, 각 고을의 배는 그 고을 수령의 수하군(水下軍) 및 하번(下番) 군사가 강 어귀에 정돈하여 변란에 대비하다가 변란 소식이 들리면 즉시 전쟁터로 달려가게 하고 그 가운데 직질(職秩)이 높은 수령에게 조방장(助防將)이란 호칭을 띠고 미리 단속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상소에 대한 비변사의 계목에 의거하건대 ˝계하(啓下)를 점련한다. 주사의 숫자는 과연 상소에 말한 바와 같이 전보다 줄었는데, 그 이유는 정유년에 패몰당한 뒤로 빈 배가 있어도 사수와 격군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창선의 제도는 상소에서 아뢴 내용을 가지고 본다면 수전(水戰)에 유용하고 적을 제압하는데 편리한 것으로 사실 예사로운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전에 시험해 보지 않았으니 쓸 만한가의 여부(與否)에 대해서 통제사(統制使)에게 물어 본 다음에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는데, ˝아뢴 대로 윤허한다. 창선이 쓸 만한가의 여부를 속히 계문(啓聞)하여 시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임진년부터 이후로 수전(水戰)에 종사하여 전선의 모양에 대해서는 정묘하게 강구해 보지 않은 것이 없으나 창선의 제도는 일찍이 시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요컨대 격군 42명을 채워 싣고 바다를 빨리 달릴 수 있다고 한다면 선체가 협소하여 좌우에 방판(防板)을 설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방판을 제거시켜 버리면 시석(矢石)을 막을 수 없어 전투에 임해 손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대체로 임진·정유·무술년의 싸움에서는 모두 판옥선(板屋船)처럼 큰 배에 힘입어 이길 수 있었으니 이것은 이미 보아온 증거입니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 12월 24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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