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호남 균세사 이후가 호남 해도의 상황을, 영남 균세사 박문수가 전선의 일을 아뢰다

[조선 영조]호남 균세사 이후가 호남 해도의 상황을, 영남 균세사 박문수가 전선의 일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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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균세사 이후가 호남의 해도도(海島圖)를 올리고 아뢰기를, ˝섬 가운데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번성하고 생활이 풍족하여 육지(陸地)의 백성들보다 나았습니다. 차차 깊이 들어갔더니 등주(登州)·내주(萊州)와 서로 마주 바라본 곳이 있었는데, 대개 섬의 백성들이 모두가 죄를 범하고 도피했거나 혹은 사노(私奴)로 몰래 피신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섬의 백성들이 주현(州縣)에 통속(統屬)되지 않았는가?˝ 하였다. 이후가 말하기를, ˝해도는 부근의 고을에 소속되어 약간의 세금을 거두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섬 사람들이 생전 관장(官長)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별성(別星)으로서 위의(威儀)를 갖추고 들어가니, 남녀 노소(男女老少)가 크게 놀라고 조금은 괴이하게 여기며 모두 다 산(山)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불러서 안심시키고 모았습니다. 풍원군(豊原君)이 본도(本道)의 감사(監司)가 되었을 때 고을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조가(朝家)에서 마땅히 가어(駕御)를 기미(??)하는 방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축(圖軸)을 유중(留中)하라.˝ 하였다. 영남 균세사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신이 전선(戰船)과 귀선(龜船)의 제도를 상세히 보았더니, 전선은 매양 개조(改造)할 때마다 그 몸뚱이가 점차 길어져 결코 운용(運用)하기가 어렵고 귀선에 있어서는 당초 체제(體制)는 몽충과 같이 위에 두꺼운 판자를 덮어 시석(矢石)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신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기록한 바를 보았더니, 귀선의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銃) 쏘는 구멍을 내었는데 지금은 각각 여덟 개의 구멍을 내었으니, 거북선이 종전에 비해 지나치게 커진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으므로 개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새로 제수된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순행하여 살펴서 장문(狀聞)하게 하라.˝ 하였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영조 27년 2월 21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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