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궁예와 태조

[고려 태조]궁예와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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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나라 개평(開平) 3년 기사(909)에 태조는 궁예가 나날이 포악해지는 것을 보고 다시 곤외(?外)에 뜻을 두었었는데 마침 궁예가 나주 지방 방비 사업을 걱정하여 태조에게 나주로 가서 지킬 것을 명령하고 관등을 높여 한찬(韓粲), 해군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태조는 성의껏 군사들을 무마하여 위엄과 은혜가 병행되니 사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용기를 내어 싸울 것을 생각하였고 적들은 그 기세에 위압되었다. 태조는 수군을 거느리고 광주 염해현(鹽海縣)에 머물렀다가 오월국(吳越國)으로 들여보내는 견훤의 배를 노획하여 돌아오니 궁예가 매우 기뻐하여 특별히 표창을 하였다. 궁예는 또 태조에게 명령하여 정주(貞州-경기도 풍덕??豊德??)에서 전함들을 수리한 후 알찬 종희(宗希) 김언(金言) 등을 부장(副將으로 하여 군사 2천 5백을 거느리고 광주 진도군(珍島郡)을 가서 치게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다시 진격하여 고이도(皐夷島)에 머무르니 성안 사람들이 이쪽 진용이 대단히 엄숙하고 씩씩한 것을 보고 싸우기도 전에 항복하였다. 다시 나주 포구에 이르렀을 때에는 견훤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전함들을 늘여 놓아 목포(木浦)에서 덕진포(德眞浦)에 이르기까지 머리와 꼬리를 서로 물고 수륙 종횡으로 군사 형세가 심히 성하였다. 그것을 보고 우리 여러 장수들은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태조는 말하기를, "근심하지 말라.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군대의 의지가 통일되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지 그 수가 많고 적은 데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곧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니 적선들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에 풍세를 타서 불을 놓으니 적들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여기서 적의 머리 5백여 급을 베었다.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처음에 나주 관내 여러 군들이 우리와 떨어져 있고 적병이 길을 막아 서로 응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못 동요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견훤의 정예 부대를 격파하니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안정되었다. 이리 하여 삼한 전체 지역에서 궁예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태조는 다시 전함을 수리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나주에 주둔하려고 하였다. 그때에 김언 등이 자기들의 공로는 많은데 상이 없다고 하여 해이하여졌다. 태조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부디 해이하지 말라! 오직 힘을 다하여 복무하고 두 마음을 먹지 말아야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임금이 포학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며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호상 음해를 일삼고 있다. 이리 하여 중앙에 있는 자들은 자기 신변을 보전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차라리 정벌에 종사하고 왕실을 위하여 진력함으로써 자기 몸을 보전하는 것이 더 낫다."여러 장수들이 태조의 말을 그럴듯이 여겼다. 태조는 드디어 광주 서남 지경 반남현(潘南縣) 포구에 이르러 적의 경내에 첩보망을 늘여 놓았다. 그때에 압해현(壓海縣-나주 압해도) 반란군의 두령 능창(能昌)이 섬에서 일어났는데 수전을 잘 하여 ??수달??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망명한 자들을 끌어모으고 갈초도(葛草島-전라도 영광 지역)에 있는 소수의 반란군들과도 서로 연계를 맺어 태조가 오는 것을 기다려서 태조를 해치려고 하였다. 태조는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능창이 벌써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섬의 도적들과 함께 사변을 일으킬 것이다. 도적의 무리는 비록 적으나 만일 세력을 규합하여 우리의 앞뒤를 막는다면 승부를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물에 익숙한 자 10여 명으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가벼운 배를 타고 밤에 갈초도 나룻가로 가서 음모하려고 왕래하는 자들을 사로잡아 그 계획을 좌절시키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여러 장수들이 다 그 말을 좇아서 과연 한 척의 작은 배를 잡으니 그것이 바로 능창이었다. 태조는 그를 잡아서 궁예에게 보냈더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고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말하기를 ˝해적들이 다 너를 추대하여 두령으로 하였지만 지금은 나의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계책이 신기하지 않으냐.˝ 하고 곧 여러 사람들에게 선포한 다음 그를 죽이었다. 건화(乾化-중국 後梁太祖??의 연호) 3년 계유(913)에 궁예는 태조가 여러 번 변방에서 공적을 나타냈다 하여 관등을 많이 높여 파진찬(波珍粲)으로 임명하고 시중(侍中)을 겸하게 하여 소환하였다. 그리고 수군 사업은 전부 부장(副將)인 김언 등에게 맡겼으나 정벌에 관한 일들은 반드시 태조에게 품의하여 이를 실행하도록 하였다. …
• 출처 : 『高麗史』 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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