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효종]송상현 등을 위한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하는 고부의 유학 김양기 등의 상소문

[조선 효종]송상현 등을 위한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하는 고부의 유학 김양기 등의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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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古阜)의 유학(幼學) 김양기(金良器) 등이 상소하기를, ˝충신(忠臣)과 절사(節士)에 대해 그 고향에 사당(祠堂)을 세워주는 것은 고금의 통의(通誼)이며, 사액(賜額)하여 포장하는 것은 국가의 법도입니다. 충신(忠臣) 증 이조 판서 송상현(宋象賢)과 증 형조 판서 신호(申浩)와 증 우찬성 김준(金浚)은 본군 사람입니다. 이 세 신하는 행적이 없어지지 않았고 국가에 좋은 사책이 있어서 사람들이 누구나 보고 듣는 바이니, 실로 신들이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송상현은 대간과 시종 출신으로 동래(東萊)를 맡아 다스리고 있다가 임진년 난리에 가장 먼저 왜적의 공격을 받았는데 조복(朝服)을 입고 걸상에 앉아 몸소 적을 쏘면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는 무겁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은혜는 가볍다 하여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죽을 때까지 발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적들도 그를 의롭게 여겨 곧 그를 해친 자를 죽이고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고 나무를 세워 표시하였습니다. 신호는 젊은 나이에 붓을 던지고 나라를 위할 뿐 죽음도 잊고서 두 번이나 해전(海戰)에 나가 문득 기이한 계책을 내더니, 끝내는 명나라 장수와 함께 남원(南原)을 지킬 때 미리 이름을 써서 의대(衣帶) 속에 넣어 자기 집 사람에게 보내고, 그 성이 함락될 때 힘껏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김준은 혼조(昏朝) 10년 동안 전야(田野)에 숨어 지내다가 역적 이괄(李适)의 역변에 적은 군대로 홀로 전진하여 안주(安州)를 방어하였는데, 적병이 갑자기 닥쳐오자 성에 이르러 한 마디 말을 하니 항복한 자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으며, 힘껏 싸우다 화살이 다하자 불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습니다. 그 아비는 임금을 위해 죽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죽었으며, 첩은 남편을 위해 죽었으니, 한 집안에 삼강(三綱)이 두루 갖추어졌습니다. 아, 이 세 신하가 나고 자란 땅에 어찌 한 고을에서 보답하는 제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재목을 모으고 장인(匠人)을 모아 사우(祠宇)를 완성하였으니, 봄 가을로 향불을 피울 때 제사할 장소가 있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호남(湖南)의 여러 군에서 임진 왜란과 정유 재란 때 의리를 세워 적병을 토벌하고 몸을 던져 나라에 보답한 사람으로 고경명(高敬命) 부자와 김천일(金千鎰)·조헌(趙憲) 등 여러 신하들은 그들의 소재지에 따라 사당이 세워져 제사를 받으며 모두 사액(賜額)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청컨대 해조에 명하여 전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 상소를 예조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대신들이 모두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사액을 명하여 ˝정충(旌忠)˝이라 하였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효종 8년 2월 21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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