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원종]삼별초의 항쟁 1

[고려 원종]삼별초의 항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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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오 11년(1270) ○ … 6월에 장군 배중손(裴仲孫), 야별초 지유 노영희(盧永僖) 등이 난을 일으키고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외치기를, ˝오랑캐 군사가 크게 이르러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모두 구정(毬庭)으로 모이라˝하였다. 잠깐 동안에 국인(國人)이 많이 모이었는데 혹은 달아나 사방으로 흩어져서 배를 다투어 강을 건너기도 하고, 혹은 물 속에 침몰되기도 하였다. 삼별초가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고 강으로 돌아다니며 크게 외치기를, ˝무릇 배에서 내리지 않는 자는 모두 목을 베겠다˝하니 듣는 사람이 모두 두려워서 배에서 내렸다. 혹 배를 띄워 옛 서울로 향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적이 작은 배를 타고 쫓아가며 쏘니, 모두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성중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흩어져 숲속에 숨고,아이와 부녀들의 우는 소리가 거리에 요란하였다. 이에 금강고(金剛庫)의 병기를 끄내어 군졸에게 나눠 주고 성을 둘러싸고 굳게 지켰다. 중손과 영희가 삼별초를 거느리고 시랑(市廊)에 모이어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협박하여 왕을 삼고,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대장군 유존혁(劉存奕), 상서 좌중 이신손(李信孫)을 좌우승선으로 삼았다. 앞서 적이 장군 이백기(李白起)에게 함께 난을 일으키기를 꾀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니 죽였다. 장군 현문혁(玄文奕)은 도망하여 옛 서울로 달아나니, 적선 4, 5척이 날개처럼 양쪽으로 쫓으므로, 그 아내는 옆에서 화살을 뽑아 주고, 문혁이 홀로 쏘았는데 나는 화살이 서로 잇달으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다가 문혁의 배가 얕은 여울에 붙으니, 적이 쫓아와서 그 팔을 쏘아 맞히어 배 가운데 쓰러졌다. 아내가 말하기를, ˝내가 쥐같은 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하고 드디어 두 딸을 끌고 강에 빠져 죽었다. 적이 문혁을 붙잡았으나 그 용맹을 아깝게 여겨 죽이지 않았는데, 얼마 뒤에 문혁이 옛 서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또 직학(直學) 정문감(鄭文鑑)을 승선으로 삼아서 정사를 잡게하니, 문감이 말하기를, ˝적에게 붙어서 부귀를 누리느니보다 차라리 지하(地下)에 몸을 깨끗이 하겠다.˝하고 곧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아내 변씨(邊氏)도 또한 물에 몸을 던지었다. 참지정사 채정(蔡湞), 추밀원부사 김연(金鍊), 도병마녹사 강지소(康之邵)는 난이 일어난 것을 듣고 교포(橋浦)로 도망하여 나가니, 적의 기병(騎兵)이 쫓다가 따르지 못하였다. 강화에서 지키던 군사가 많이 도망하여 육지로 나가니, 적이 능히 지키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배를 모아 공사(公私)의 재물과 자녀(子女)를 모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구포(仇浦)로부터 항파강(缸破江)까지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접하여 무려 1천여 척이나 되었다. 그때에 백관들이 모두 왕을 맞으러 나갔는데 그 처자들은 모두 적에게 포로가 되어 통곡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전 중서사인 이숙진(李淑眞), 낭장 윤길보(尹吉甫)가 노예들을 모아서 남은 적을 구포에 추격하여 5명을 죽이고, 부락산(浮落山)에 이르러 바다에 임하여 군사의 위세를 올리니, 적이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오랑캐 군사가 이미 이르렀다 하며 드디어 도망하였다. 숙진이 낭중(郎中) 전문윤(田文胤)등과 함께 부고(附庫)를 봉쇄하고 사람을 시켜 지키니, 그 때문에 무뢰배들이 나쁜 행동을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 김방경을 역적추토사(逆賊追討使)로 삼아 군사 60여명을 거느리고, 몽고 송만호(宋萬戶) 등의 군사 1천여 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적선이 영흥도(靈興島)에 대어 있는 것을 바라보고 방경이 치려하니, 송만호가 두려워하여 말리었다. 적은 이에 도망하였다. 적중(賊中)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온 자가 남녀 노유 모두 일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송만호가 적의 도당이라 하여 모두 사로잡아 돌아갔다. 9월에 ○ 장군 양동무(陽東茂)와 고여림 등이 수군(水軍)으로 진도를 치니, 적이 장흥부(長興府)로 들어가 관군 20여 명을 죽이고, 도령 윤만장(尹萬藏)을 사로잡고, 재물과 곡식을 노략질하였다. 11월에 ○ 적이 제주도를 함락시켰다. 일찍이 안찰사 권단이 영암부사(靈岩副使) 김수(金須)를 보내어 군사 2백명으로 제주도를 지키게 하고, 또 장군 고여림을 보내어 군사 70명으로 뒤를 이었다. 적이 제주도를 공격하니 수와 여림의 무리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나주 사람 진자화(陳子和)가 적중에 바로 들어가 그 장수 곽연수(郭延壽)를 죽이고 나왔다. 또 들어가서 또 그와 같이 하니, 사졸(士卒)이 기뻐서 뛰었다. 조금 뒤에 다시 들어갔다가 적에게 해를 당하니 적이 이긴 기세를 타서 관군을 모조리 죽이었다. ○ 윤 11월에 왕이 다루하치에게 청하여 다시 김방경을 보내어 적을 쳤다.
• 출처 : 『高麗史節要』 권18 원종 순효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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