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경상도 도체찰사 이원익이 가덕도·안골포에서의 전황을 보고하다

[조선 선조]경상도 도체찰사 이원익이 가덕도·안골포에서의 전황을 보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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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도체찰사(慶尙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신의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이 이달 19일 술시(戌時)에 성첩(成帖)한 치보 가운데 ˝18일 한산도에서 발선(發船)시켜 저물녘에 장문포(場門浦)에 들어가 자고, 이튿날 일찍 통제사 원균(元均)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대(隊)를 나누어 학익진(鶴翼陣)을 이루어 안골포(安骨浦)의 적의 소굴로 직진하였더니, 적도(賊徒)들이 다 줄지어 서서 혹 해안에 잠복하기도 하고 혹은 암석 사이에 기계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제장(諸將)들이 경예(輕銳)한 군사를 거느리고 북을 울리면서 전진했더니 적들도 배를 타고 싸움을 걸어와 서로 응전하였는데, 포탄과 화살이 함께 쏟아져 해안이 진동하였는데도 군사들은 조금도 물러날 뜻이 없었다. 마침내 적선에 육박하여 많은 숫자를 살상하니, 적은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간신히 해안 위로 도망하기에 인하여 타고 온 배 2척을 빼앗았다. 또 가덕도(加德島)로 향했더니 가덕도의 적은 이미 안골포에서 내원(來援)했기 때문에 적들이 또 배를 타고 그들의 소굴로 들어갔다. 우리 수군들이 급히 배를 저어 추격하여 거의 모든 적선을 포착(捕捉)하기에 이르자 적들은 마침내 배를 버리고 작은 섬으로 숨어 들어갔다. 제장들이 포위하고 난사하였으나 그들 배만 빼앗았고, 인하여 섬 안으로 들어가 찾아보았는데 혈점(血點)만 땅에 가득할 뿐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수군이 그만두고 돌아오려 할 즈음에 안골포의 적도들이 또 배를 타고 역습해 왔으므로 아군은 다시 돌아서 접전하였다. 적도들은 알몸을 드러낸 채 서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는 혹 배 꼬리를 둘러싸기도 하고 배의 좌우를 협공하기도 하면서 비처럼 탄환을 쏘아댔으므로 아군 역시 방패(防牌)에 의지하여 화살을 다발로 쏘아대며 점차 유인해 나오다 날이 저물자 파하고 돌아왔다. 평산 만호(平山萬戶) 김축(金軸)은 눈 아래에 탄환을 맞았는데 즉시 뽑아냈고 그밖에 하졸(下卒)들은 하나도 중상을 입지 않았는데, 보성 군수(寶城郡守) 안홍국(安弘國)이 끝내 이마에 철환(鐵丸)을 맞아 뇌(腦)를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으니, 매우 참혹하다. 현재 배 위에 있으므로 소상히 기록하지 못하고 우선 상황을 치보하여 알린다.˝ 하였습니다. 호남(胡南)에서 괄군(括軍)하는 일로 제석 산성(帝錫山城)에서 수군으로 옮겨 온 자의 숫자가 천 명이 못되는데, 그 나머지 아직까지 입거(入去)하지 않은 자는 현재 출발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중적(衆賊)이 대마도에 많이 모여 있는데 그들이 바다를 건너는 것은 반드시 6~7월 동남풍(東南風)이 부는 때를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당하여 수군이 해로(海路)를 왕래하면서 혹 적과 서로 마주쳐 막아 죽이고 혹은 의심하고 꺼려 나오지 못하게 한다면 모두 유익할 것입니다. 전선(戰船)을 정제하여 해양을 출입하게 하되, 가덕도·안골포 등의 적진이야말로 출입하는 길목에 해당되니 그들과 서로 접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보성 군수 안홍국이 탄환에 맞아 죽은 것은 매우 놀랍고 참혹한 일입니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6월 29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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