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문

조선향토대백과 유물유적정보관 : 유적

칠성문

[ 七星門 ]

분류 유물유적정보관>유적>성곽 · 봉수>성문
유물유적시대 조선
행정구역 평양시>중구역
등급 국보급
지정번호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8호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에 있는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문. 칠성문은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운 후 고려 때에 고쳐짓고 1711년에 다시 지었다. 『평양대지』에는 1764년에도 다시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칠성문에서 문길이 있는 아랫부분은 대체로 고구려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보수는 계속하였다. 칠성문이란 이름은 북두칠성 쪽에 있는 북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문은 성벽의 연장으로 되는 축대와 그 위에 세운 문루로 되었으며 양쪽 성벽을 약 10m쯤 사이나게 어기게 쌓고 그 두 성벽사이를 이으면서 가로 세웠다. 이 성문에서는 한쪽 성벽을 성문앞쪽으로 내밀어 쌓고 그 끝을 보강하여 옹성으로 이용하였다.

축대는 다듬은 돌로 정연하게 쌓고 거기에 홍예문길을 냈다. 축대 위에는 성가퀴를 쌓았으며 문루를 세웠다. 문루는 정면 3칸(7.38m), 측면 2칸(4.36m)의 홑처마 합각집이다. 문루의 바깥쪽으로 돌아가면서 세운 흘림기둥은 가운데칸을 넓혀 중심을 강조하였다. 가운데칸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집안은 통천장으로 하면서 시원히 틔워 놓았다. 두공은 없고 마구리 대들보 밑에는 아름다운 초엽을 받쳤다. 칠성문은 양쪽 성벽을 조금 어기어 쌓고 그 사이에 문길을 모로 낸 것이기 때문에 문루도 성벽방향과 모로 놓였다. 성문을 이렇게 놓는 것은 고구려식 성문의 특색의 하나이다. 건물에는 화려한 모루단청을 입혀 그 품위를 높였다.

문루는 규모가 작은 편이나 구조가 간결하면서 밑 부분의 복잡한 구조와 잘 어울려 위엄있게 보인다. 1010년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들이 칠성문 앞에서 호된 타격을 받은 적이 있다. 임진왜란시기인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전투 때 우리 군사들과 의병들은 칠성문으로 제일 먼저 쳐들어가 왜적들을 격멸하고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마지막 수정일

  • 201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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