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성

조선향토대백과 유물유적정보관 : 유적

극성

[ 棘城 ]

분류 유물유적정보관>유적>성곽 · 봉수>고적
유물유적시대 고려
행정구역 황해북도>황주군>침촌리
등급 준국보급(보존급)
지정번호 국가지정문화재 보존급 제1110호

황해북도 황주군 침촌리의 남쪽 정방산 북쪽 기슭에 있는 옛 성터. 고려시대 방어상 목적으로 성 주변에 가시나무밭을 만들어 사람들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가시 "극(棘)" 자를 따서 극성이라 하였다 한다.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전해오는데 자비령행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처음 축성했을 때의 길이는 정방산 정수리부터 멀리 대동강 기슭의 박비포까지 43,659척에 달하였다 한다. 1452년에 돌로 개축하면서 길이를 5,030척으로 축소하고 높이는 7척되게 하였다.

고려 말 홍두적이 침략해 왔을 때 이곳을 방어하던 군사들은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용감하게 싸워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636년 병자호란시기 누루하치를 두목으로 하는 청나라군은 정방산성전투에서 패하여 남쪽으로 나가는 길이 막혀버리자 정방산성을 에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이번에는 방비를 갖추고 대기하는 극성과 맞닥뜨려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화가 난 누루하치는 조선침략 첫 시작부터 길잡이로 나선 장수 용골대를 끌어다 놓고 “네놈의 말을 듣고 따라왔다가 숱한 죽음만 내었으니 네놈은 죽어 마땅하다”고 하면서 칼을 빼들고 당장 목을 치려고 하였다. 바빠맞은 용골대는 죽을 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주면 반드시 길을 찾아내겠다고 애걸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얻은 용골대는 군사 여러 명을 끌고 지형을 살피러 나갔다가 서쪽으로 극성이 끝나는 곳의 대동강 기슭에 방비가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탐지해냈다. 기뻐서 돌아온 용골대의 보고를 듣고 누루하치는 야밤삼경에 도적고양이처럼 몰래 군대를 이끌고 이 강기슭으로 통과하며 극성을 우회함으로써 서흥으로 나갈 수 있었다. 훗날 청나라와의 전쟁상황을 회고하면서 정약용은 이 강기슭의 빈 공간에 보루를 만들어 전날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 것을 조정에 상소하였다고 한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옛날 극성 일대에는 여러 차례에 걸친 외적을 격멸하는 싸움으로 하여 백골이 수없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낮에는 내리쪼이는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밤이면 퍼런 불빛을 뿜는 해골들 때문에 사람들은 무서워서 대낮에도 이곳으로 다니기를 꺼려하였다 한다.

고려 말~조선 초에 황해도 일대에서 농민폭동이 빈번히 일어나고 극성 주변이 농민군의 활동무대로 되자 문종은 극성을 돌로 개축하고 방어군을 주둔시켜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한편 성 안에는 극성제단을 만들고 직접 제문을 지어 사람들의 마음을 회유하였는데, 극성제단은 그때 이 일대에 원한을 품고 널려 있는 해골들의 혼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므로 그것들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루어 위로한다는 뜻에서 만든 것이라 한다.

마지막 수정일

  • 201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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