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성

조선향토대백과 유물유적정보관 : 유적

구주성

[ 龜州城 ]

분류 유물유적정보관>유적>성곽 · 봉수>성터
유물유적시대 조선
행정구역 평안북도>구성시
등급 국보급
지정번호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0호

평안북도 구성시에 있는 옛 성터. 994년의 유적이다. 구주성(구성)은 구성시 북쪽에 솟은 이구산의 자연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축조한 석성으로서 성벽으로 둘러막힌 이구산의 산줄기들이 가로세로 뻗은 것이 마치 거북이의 잔등무늬 같다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10세기 후반기부터 13세기까지 구주라고 불린 구성은 고려 서북지방의 요충지였으므로 고려 구주성을 돌로 쌓고 그 후 이곳을 정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하였으며 1231년에는 정원대도호부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 선조들의 용맹한 넋이 어린 구주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졌는데, 내성이 구주성의 본성이고 외성은 그 후 서쪽에 덧붙여 쌓은 것이다.

내성의 둘레는 약 5km이고 후에 쌓은 외성성벽의 길이는 약 1.5km이다. 내성의 동쪽벽과 북쪽벽은 동문천 쪽의 절벽을 따라 쌓았으며 서쪽벽은 능선의 바깥면에 대체로 외면축조방법으로 쌓고 남쪽의 평지대에 연결된 일부분만을 양면축조방법으로 쌓았다. 현재 성벽의 높이는 약 5m 정도이다. 구주성 석성벽은 성돌들 사이를 삼화토로 메워 성벽이 매끈하도록 공들인 것이 특색이다.

굴곡이 심한 능선의 등성이를 따라 구불구불 쌓은 성벽에서 바깥으로 돌출한 부분에는 치를 설치하였던 자리가 지금도 20여 군데나 뚜렷이 남아 있다. 『고려사』에 이 성에 치만 하여도 41개나 있다고 쓴 것으로 보아 구주성의 성벽들에는 원래 성가퀴를 비롯한 여러가지 성곽시설들이 튼튼히 갖춰져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옛 기록에 의하면 또한 구주성의 성가퀴에는 852개의 타가 있었으며 매 타에는 먼 곳을 쏘는 구멍과 가까운 곳을 쏘는 구멍이 있었다.

구주성에는 내성에 남문과 동 · 서 · 북문터, 외성에 서문터 그밖에 4개의 사잇문터가 있다. 그 중 내성남문에는 홍예문길이 있는 축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포식두공에 합각지붕으로 된 웅장한 2층문루가 서있었다. 남문은 6 · 25전쟁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79년에 원상복구 하였다.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두 성을 연결하는 이 성에서만 보이는 고유한 형식의 지하문터가 있다. (조선시대 건물참조)

기록에 의하면 성 안에는 수원이 충족하였으며 그것은 남문동쪽에 있는 수구문으로 흘러내렸다. 성에는 동쪽과 서쪽, 남쪽의 전망이 좋은 곳에 장대가 있었는데, 그 중 서장대가 가장 높고 전망이 좋아 전투를 잘 지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성의 동쪽과 북쪽의 능선을 감돌아 흐르는 동문천은 자연적인 해자로 되어 성의 방어력을 한층 제고하였다.

구주성은 고려시대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목을 지키던 성이다. 일찍 1011년 1월과 1019년 2월 이곳에서 있은 거란침략을 반대하는 싸움에서 우리 조상들은 구주성에 의거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 중 1019년에 있은 구주대첩에서 고려군은 강감찬 장군의 지휘 하에 거란군 10여만명을 섬멸하였다. 1231년에는 몽골의 제1차 침략을 반대하여 박서의 지휘 하에 5개월 간이나 싸워 끝내 적을 격퇴하였다.

마지막 수정일

  • 201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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