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

테세우스

영웅

[ Theseus ]

요약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에 비견되는 아테네 최고의 영웅이다.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의 핏줄을 받았으나 트로이젠의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 뒤 온갖 괴물들과 악당들을 물리친 영웅이 되어 아테네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가 물리친 괴물들 중에는 황소 머리가 달린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특히 유명하다.
테세우스와 아이트라

테세우스와 아이트라

외국어 표기 Θησεύς(그리스어)
구분 영웅
상징 무적의 용사, 국가의 수호자
어원 모임, 회합
관련 상징 곤봉
관련 사건, 인물 미노타우로스, 아리아드네,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

테세우스 인물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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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 인물관계도
에리크토니오스탄탈로스판디온필리아피테우스아이게우스아이트라미노스히폴리테파이드라데모폰

테세우스는 판디온(혹은 스키로스)의 아들 아이게우스피테우스의 딸 아이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아마조네스의 여왕 히폴리테(혹은 안티오페)와 사이에서 아들 히폴리토스를 낳았고, 미노스의 딸 파이드라와 사이에서 두 아들 데모폰아카마스를 낳았다.

테세우스는 부계로는 아테네의 시조 에리크토니오스의 후손이고 모계로는 제우스의 아들 탄탈로스의 후손이다.

신화 이야기

개요

그리스 신화에서 테세우스는 아티카 지역의 대표적인 영웅으로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기반을 둔 도리스 족의 영웅 헤라클레스와 쌍벽을 이룬다. 그는 아티카 지역의 악당들과 괴물들을 퇴치하고 아테네의 왕위에 오른 뒤, 주변에 흩어져 살던 주민들을 아테네 시로 모으고 아티카 지역을 아테네를 중심으로 통합하는 일종의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런 다음 이를 상징하는 판아테나이 축제를 창설하고, 헤라클레스가 제우스를 기리는 올림피아 경기를 만든 것처럼 포세이돈을 기리는 이스트미아 경기도 코린토스에 창설(또는 재건)하였다. 그는 또 숙부 니소스의 나라였던 메가라를 왕국에 병합한 뒤 비석을 세워 나라의 경계를 확실히 하여 아테네를 강력한 국가로 발전시켰다.

출생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는 두 명의 아내가 모두 아기를 낳지 못하자 후사를 걱정하여 델포이로 가서 자식을 얻을 방도를 물었다. 그러자 “아테네로 갈 때까지 포도주 뚜껑을 열지 말라”는 수수께끼 같은 신탁이 내려졌다. 아이게우스는 아테네로 돌아가는 길에 트로이젠에 들러 그곳의 왕이자 유명한 예언자이기도 한 피테우스에게 신탁의 의미를 물었다. 피테우스는 신탁이 뜻하는 바를 당장에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 없이 성대한 주연을 벌여 아이게우스를 취하게 만든 다음 그의 침실에 딸 아이트라를 넣었다.

아이게우스와 동침한 날 밤 아이트라 꿈에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그녀를 근처의 섬으로 인도하였고, 그곳에서 아이트라는 다시 해신 포세이돈과 동침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이트라는 하룻밤에 두 남자의 씨를 받아 테세우스를 잉태하였다 (그래서 테세우스는 포세이돈의 아들로 간주되기도 한다).

아이게우스는 아이트라가 임신한 걸 알고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바위를 들어 올리고 그 밑에 칼과 신발을 넣은 다음 아이가 바위를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자라면 아테네로 보내라고 말하고 트로이젠을 떠났다.

테세우스는 열여섯 살 때 벌써 그 바위를 들어 올려 그 밑에 있던 칼과 신발을 꺼내들고 아버지에게로 떠났다. 이때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와 같은 업적을 쌓으려는 야심을 품고 손쉬운 바닷길 대신 온갖 괴물과 악당들이 들끓는 육로를 선택했다. 그 결과 테세우스는 트로이젠에서 아테네에 이르는 코린토스 만 주변의 악당과 괴물을 모두 퇴치하고 위대한 영웅이 되어 아테네에 입성하게 된다.

아테네로 가는 길

테세우스가 아테네로 가는 길에 처음 만난 악당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아들로 ‘곤봉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페리페테스였다. 거대한 곤봉을 휘두르며 행인들을 마구 때려죽였기 때문에 그런 별명으로 불리었는데 테세우스는 곤봉을 빼앗아 똑같은 방식으로 그를 때려죽였다. 이후로 곤봉은 헤라클레스의 사자 가죽에 비견되는 테세우스의 상징이 되었다.

테세우스의 다음 희생자는 코린토스 지협에서 활동하는 시니스라는 이름의 악당이었다. ‘소나무를 구부리는 자’라는 별명을 가진 시니스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힘껏 구부린 소나무에 팔다리를 묶어 찢어 죽이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테세우스는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시니스를 소나무에 묶어 찢어 죽였다. 이때 테세우스는 시니스의 딸 페리구네와 관계하여 아들 멜라니포스를 낳았다고 한다.

테세우스와 시니스

테세우스와 시니스 아티카 적색상도기, 기원전 490년경, 뮌헨 국립고대미술박물관

그 다음으로 테세우스는 메가라와 코린토스 사이에 위치한 크롬미온을 지나면서 파이아라고 불리는 괴물 암퇘지를 퇴치하였다. 반인반수의 괴물 티폰에키드나의 자식이라는 파이아는 성질이 포악하여 마을을 공격하고 사람을 해치는 등 그때까지 크롬미온 지역에 막심한 피해를 끼치고 있었다. 하지만 파이아는 크롬미온의 암퇘지라고 불리던 여자 산적이었다는 설도 있다.

메가라에서는 스키론이라는 악당이 테세우스의 희생제물이 되었다. 스키론은 포세이돈의 아들로 메가라에서 아테네로 가는 해안의 벼랑길에 살던 포악한 강도였다. 그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돈과 물건을 빼앗은 다음 자신의 발을 씻게 하고는 그 사람이 발을 씻어주려고 몸을 숙이면 걷어차서 벼랑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면 커다란 바다거북이가 바닷물에 떨어진 사람을 잡아먹었다. 테세우스는 스키론을 똑같은 방식으로 바다거북이의 밥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다른 전승에 따르면 스키론은 강도가 아니라 메가라의 장군이었으며, 테세우스는 아테네로 입성하는 길에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아테네의 왕이 되고 나서 엘레우시스로 원정을 떠난 길에 그랬다고 한다.

스키론을 물리치는 테세우스

스키론을 물리치는 테세우스 아티카 적색상도기, 기원전 500년경, 루브르 박물관

테세우스가 다음으로 지나간 곳은 엘레우시스였다. 그곳의 왕 케르키온은 행인들을 붙잡아 강제로 자신과 씨름을 붙인 뒤 패하면 목숨을 빼앗은 폭군이었다. 테세우스는 케르키온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죽인 뒤 엘레우시스의 왕위를 차지하였다. 나중에 그는 이곳을 아테네에 부속시키고 케르키온의 손자 히포토온에게 통치를 맡겼다.

테세우스의 마지막 상대는 아테네 인근 케피소스 강가에 사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악당이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잡아 늘이는 자’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었다. 이곳에 그는 여인숙을 차려놓고 손님이 들어오면 집안에 있는 쇠 침대에 눕혔다. 쇠 침대는 큰 것과 작은 것 두 개가 있었는데, 키가 큰 사람에게는 작은 침대를 내주고 작은 사람에게는 큰 침대를 내주었다. 그래서 키가 침대보다 커서 밖으로 튀어나오면 침대의 크기에 알맞게 머리나 다리를 톱으로 잘라내고 작으면 몸을 잡아 늘여서 죽였다. 테세우스는 이 악당의 여인숙에 들어가서 그를 똑같은 방식으로 침대 밖으로 튀어나온 머리를 잘라서 죽였다.

아테네 귀환과 메데이아의 박해

메데이아

메데이아 프레데릭 샌디스, 1868년, 버밍엄 미술관

아테네에 입성했을 때 테세우스는 이미 숱한 괴물과 악당을 퇴치한 영웅으로 평판이 자자했다. 당시 아이게우스 왕 곁에는 코린토스에서 이아손에게 버림 받고 아테네로 온 마녀 메데이아가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아주겠다는 말로 연로한 아이게우스 왕을 유혹하여 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메데이아는 테세우스가 아이게우스의 아들임을 금방 알아보고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게우스 왕이 아테네 주민들에게 추앙받는 젊은 이방인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이용하여 왕에게 그를 독살하도록 권했다.

그를 환영하는 척 연회를 베푼 다음 술에 독을 넣어 살해하자는 것이었다. 테세우스는 아이게우스 왕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연회가 시작되고 음식이 나오자 테세우스는 일부러 바위 밑에서 꺼낸 아버지의 칼을 꺼내 고기를 쓸기 시작했다.

칼을 본 아이게우스 왕은 깜짝 놀라 테세우스의 독배를 빼앗은 뒤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확인하였다. 테세우스를 죽이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메데이아는 용이 끄는 마차를 타고 아테네를 떠나 고향 콜키스로 돌아갔다.

팔라스의 50명의 아들들

테세우스가 아이게우스에 의해 아테네의 적법한 왕위계승자로 공표되자 숙부인 팔라스와 그의 50명의 아들들(팔라티데스)이 반란을 일으켰다. 원래 아이게우스는 형제들과 함께 힘을 합쳐 아버지 판디온이 숙부 메티온에게 빼앗긴 아테네의 왕권을 되찾은 뒤 왕위에 오를 때 왕권을 팔라스 등 다른 형제들에게도 나누어 주기로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다 아이게우스는 판디온의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 필리아가 판디온과 결혼하기 전에 스키로스에게서 얻은 아들이라는 설도 있었다.

그래서 팔라스 일족은 아테네 왕권을 계승할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팔라스와 아들들은 군대를 일으켜 왕권을 힘으로 빼앗으려 했지만 테세우스는 이들의 모반 계획을 사전에 알아채고 먼저 공격하여 팔라스와 50명의 아들들을 모두 죽였다. 일설에 따르면 테세우스는 이들을 살해한 죄를 씻기 위해 아테네에서 추방되어 1년간 트로이젠에서 지내야 했다고 한다.

크레타로 가는 인신공물

그 무렵 아테네는 당시의 해양강국이었던 크레타에 9년에 한 번씩 아테네의 젊은 남녀를 각각 일곱 명씩 인신공물로 보내야 했다. 크레타 왕 미노스는 그의 아들 안드로게오스가 아테네의 마라톤 들판에서 날뛰는 황소를 잡으려다 뿔에 찔려 죽은 사건이 있은 뒤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테네 왕국에 그와 같은 요구를 했던 것이다. 인신공물로 간 아테네 젊은이들은 크레타의 미궁 라비린토스에 갇혀 있는 황소 머리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에게 먹이로 바쳐졌다.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 왕의 아내 파시파에가 포세이돈의 저주로 황소와 정을 통하여 낳은 괴물이었다 (→‘파시파에’ 참조).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전면의 두 여인은 아리아드네와 파이드라
작자 미상, 16세기 초, 프티팔레 미술관, 아비뇽

벌써 세 번째로 공물을 바칠 때가 되자 아테네의 민심은 극도로 나빠졌다. 아테네 주민들 사이에 아이게우스 왕에 대한 원망이 확산되자 테세우스는 자진하여 인신공물이 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일설에 따르면 미노스 왕이 새로 나타난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를 인신공물에 포함시키도록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테세우스가 미궁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살아서 나오면 더 이상 인신공물을 요구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고 했다.

아리아드네의 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흑색상 도기, 기원전 6세기

미노스 왕에게는 아리아드네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크레타에 도착한 테세우스를 보자 곧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녀는 테세우스에게 미궁에서 살아나올 수 있도록 도울 테니 그 대신 아테네로 돌아갈 때 자신을 아내로 맞아 데려가 달라고 하였다.

아리아드네가 이렇게 금방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아프로디테 여신이 도운 덕분이라고 한다. 신들을 공경하는 경건한 젊은이였던 테세우스는 크레타로 출발하기에 앞서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무사귀환을 빌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라비린토스는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밖으로 나오는 길을 찾을 수 없는 미궁이므로 그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더라도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에게 붉은색 실 뭉치를 건네주고는 실을 풀면서 들어갔다가 나중에 그 실을 따라서 다시 나오라고 말해주었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가 말한 대로 실 뭉치의 실을 풀며 미궁으로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맨주먹으로 때려죽인 다음 풀린 실을 따라 다시 미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테세우스는 항구로 나가 미노스 왕의 배들에 구멍을 뚫어 추적해오지 못하게 한 뒤 아리아드네 공주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데리고 아테네를 향해 닻을 올렸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경의 그리스 역사가 필로코로스에 의하면 당시 테세우스는 크레타 섬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열린 경기에서 타우로스(‘황소’)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를 무찌르고 우승을 차지하였는데, 이 사내는 왕비 파시파에의 정부였다고 한다. 미노스 왕은 테세우스의 용맹을 칭찬하며 그를 다시 아테네로 돌려보내주었다고 한다.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크레타를 출발한 테세우스 일행은 얼마 후 낙소스 섬에 정박하였는데, 테세우스는 여기서 잠든 아리아드네를 그대로 두고 떠나버렸다. 홀로 남겨진 아리아드네는 낙소스 섬에 머물고 있던 디오니소스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낙소스 섬에서 잠든 아리아드네

낙소스 섬에서 잠든 아리아드네 존 벤덜린, 1812년, 펜실베이니아 미술아카데미

아리아드네가 낙소스 섬에 남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테세우스가 다른 여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버리고 갔다는 설이 있고, 아리아드네의 모습에 반한 디오니소스가 밤새 납치해간 것이라는 설도 있고, 헤르메스(혹은 아테나)가 테세우스에게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갈 것을 명령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와 사이에서 여러 명을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

검은 돛과 흰 돛

아이게우스 왕은 사랑하는 아들 테세우스가 크레타 섬으로 떠날 때 흰 돛과 검은 돛 두 개를 주며 크레타로 갈 때는 검은 돛을 달고,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르고 아테네로 돌아올 때는 흰 돛을 달라고 말했다. 아이게우스 왕은 이미 수많은 공적을 세운 아들 테세우스의 용맹함을 믿고 있었지만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매일 바닷가 절벽 위에 나가 아들이 흰 돛을 달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섬에 남겨두고 온 슬픔으로 (혹은 승리의 기쁨에 도취하여) 돛을 바꾸어 다는 것을 잊어버렸고, 크레타로 떠났던 배가 그대로 검은 돛을 달고 돌아오는 것을 본 아이게우스 왕은 아들이 죽은 줄로 믿고 낙담하여 절벽 아래 바다로 몸을 던졌다. 이때부터 그곳은 ‘아이게우스의 바다’라고 불렸다 (오늘날의 ‘에게 해’).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

부왕 아이게우스에 이어 아테네의 왕위에 오른 테세우스는 흑해 연안의 여전사 부족 아마조네스 원정에 나서 그들의 여왕 히폴리테(혹은 그녀의 여동생 안티오페)를 사로잡아 아내로 삼았다. 하지만 히폴리테는 납치된 여왕을 되찾기 위해 아마조네스들이 아테네를 공격해왔을 때 전투 중에 죽고 말았다. 히폴리테는 그 사이에 테세우스에게 아들 히폴리토스를 낳아주었다.

한편 미노스 왕이 죽고 나서 크레타의 왕위에 오른 미노스의 아들 데우칼리온은 아테네와 동맹을 맺기 위해 누이동생 파이드라를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새 왕비 파이드라는 그 사이 아름다운 청년으로 성장한 전처의 아들 히폴리토스를 보자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일설에 따르면 파이드라가 히폴리토스를 사랑하게 된 것 역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작품이라고 한다.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운 히폴리토스에게 반하여 구애하였지만 처녀신 아르테미스 여신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히폴리토스는 동정을 맹세하며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분노한 아프로디테는 파이드라에게 의붓아들에 대한 연심을 불어넣었다.

파이드라의 자살

파이드라의 자살 알렉상드르 카바넬, 1880년, 파브르 미술관

파이드라는 히폴리토스를 향한 끓어오르는 사랑을 억누르지 못하고 고백하였지만 역시 냉정하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절망감과 수치심을 참을 수 없었던 파이드라는 오히려 히폴리토스가 자신을 유혹하고 겁탈하려 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버렸다. 아내의 죽음과 유서를 발견한 테세우스는 아들 히폴리토스를 저주하면서 포세이돈에게 아들의 죽음을 빌었고, 얼마 뒤 히폴리토스는 해변에서 전차를 몰고 달리다 갑자기 나타난 괴수에 말들이 놀라는 바람에 낙마하여 즉사하였다. 그 괴수는 포세이돈이 테세우스의 기도를 듣고 보낸 것이었다.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오스

테살리아 왕 페이리토오스는 아테네 왕 테세우스의 명성을 듣고 그를 시험해보려고 마라톤에 있는 그의 소떼를 습격하였다. 소식을 들은 테세우스가 뛰쳐나오면서 둘 사이에는 싸움이 벌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서로 상대방의 풍모에 마음을 빼앗긴 두 영웅은 싸움을 시작하는 대신 친구가 되기를 원하여 그 자리에서 평생 변치 않는 우정을 맺었다. 이후 두 사람은 많은 모험을 함께 하였다. 그들은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과 아르고호 원정에도 함께 참가했고, 테세우스가 아마조네스를 공격하여 그 여왕을 잡아올 때도 함께 하였다.

테세우스가 아내 파이드라를 잃은 뒤 페이리토오스 역시 상처를 하자 두 영웅은 서로에게 제우스의 딸을 아내로 맞아주기로 약속했다. 테세우스는 스파르타의 헬레네를 신붓감으로 꼽았다. 그러자 페이리토오스는 그를 도와 헬레네를 스파르타에서 유괴하여 아테네로 데려왔다. 하지만 헬레네가 아직 결혼을 하기에 너무 어렸기 때문에 테세우스는 그녀를 아테네의 성에 데려다 놓고 어머니 아이트라에게 돌보게 하였다.

페이리토오스가 신붓감으로 고른 여인은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하계로 내려간 페르세포네였다. 하지만 두 친구는 거침없이 하계로 내려가 저승의 왕 하데스에게 이미 그의 아내가 된 페르세포네를 내어놓으라고 요구했다. 하데스는 두 영웅을 정중히 맞이하는 척 하며 의자를 권했다. 하지만 그 의자는 앉는 순간 모든 일을 잊게 하여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게 만드는 망각의 의자였다.

두 사람은 나중에 헤라클레스가 열두 과업 중 하나인 저승의 개 케르베로스를 데려가기 위해 하계로 내려왔다가 구해줄 때까지 줄곧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의 구원을 받은 것은 테세우스 한 사람뿐이었다. 헤라클레스가 페이리토오스를 데려가려고 붙잡자 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신들이 죄인을 보내려 하지 않는다고 여겨 구출을 단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테세우스만 지상으로 돌아왔고 페이리토오스는 영원히 하계에 남고 말았다.

테세우스의 죽음

테세우스가 저승에 붙잡혀 있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테네는 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헬레네의 쌍둥이 오빠 디오스쿠로이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쳐들어와서 테세우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테네를 다스리던 그의 두 아들 아카마스데모폰을 쫓아내고 아테네의 왕권을 에레크테우스의 자손인 메네스테우스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결국 테세우스는 아테네로 돌아가지 못하고 스키로스 섬으로 갔다 (이는 테세우스의 아버지 아이게우스가 판디온이 아니라 이 섬의 명조인 스키로스의 아들이라는 설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그 무렵 스키로스 섬을 다스리고 있던 리코메데스 왕은 테세우스가 자신의 왕권을 빼앗을까봐 두려워 그를 환대하는 척하며 바닷가로 데려가서 절벽에서 밀어 살해하였다. 그 후 메네스테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나가 전사하자 아테네의 왕위는 다시 테세우스의 아들 데모폰에게로 돌아갔다.

훗날 아테네와 페르시아가 마라톤 들판에서 전투를 벌일 때 아테네 병사들은 엄청나게 크고 강력한 용사가 선두에서 싸우며 지휘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테세우스가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현신한 것이라고 믿었다. 델포이의 신탁은 아테네인들에게 스키로스 섬에 묻혀 있는 테세우스의 유골을 수습해서 아테네에서 장례지낼 것을 명했다. 이를 실행에 옮긴 이는 아테네의 장군 키몬이었다. 키몬은 기원전 475년에 하늘의 계시에 따라 스키로스 섬의 한 언덕에서 엄청나게 큰 용사의 유골과 무구가 묻힌 관을 발굴했는데, 아테네인들은 이것이 신탁이 말한 테세우스의 유골이라고 여겨 아테네로 운구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참고자료

  • 헤로도토스, 『역사』
  • 아폴로도로스, 『비블리오테케』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테세우스 편』
  • 히기누스, 『이야기』
  • 파우사니아스, 『그리스 안내』
  • 스트라본, 『지리지』
  • 트제트제스, 『리코프론 주석집』
  • 카를 케레니, 『』, 궁리출판사
  • M. 그랜트, J. 헤이즐, 『』, 범우사
  • 피에르 그리말, 『』, 열린책들
  • W. H. Roscher, 『Ausführliches Lexikon der griechischen und römischen Mytholog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