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과 섬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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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항로

탐라국 시대는 고려시대에 제주도가 성주(星主, 탐라국왕)·왕자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시기를 말한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성주와 왕자의 호칭은 신라 전성기에 탐라 왕족인 고후(高厚)·고청(高淸) 등 세 형제가 신라에 내조하자, 이 때 신라왕이 이들에게 성주(星主)·왕자(王子)·도내(徒內)의 작위를 주었다는 데에서 유래하고 있다. 특히 성주는 국왕을 지칭한 것으로, 고려에서도 신라의 예를 따라 탐라국의 왕을 성주라 불렀다. 그리고 성주는 거의 독립적인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태자·세자라 하였으며, 숙종 10년(1105)에 군현으로 편성된 뒤에도 성주는 여전히 존재하여 대대로 그 지위를 세습하며 조선초기까지 내려 왔다. 그러나 조선조 태종 2년(1402)에 중앙의 행정력이 제주에 미치게 되면서 성주를 좌도지관, 왕자를 우도지관으로 개칭하면서부터 전과 같은 대우는 없어졌다.

제주도는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목관(牧官)·대정(大靜)·정의(旌義)가 그것이다. 또한 이들 세 지역을 통틀어서 제주삼읍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고려 이래의 대촌현이 제주목으로, 산방현이 대정현으로 개편되고, 여기에 정의현이 신설되어 1목 2현의 삼읍제가 조선조 태종 16년(1416)에 정립된 것이다. 이에 따라 나머지 현촌들은 모두 삼읍에 소속되어 직촌으로 개편된다. 직촌은 곧 삼읍에 소속되어 그 관할에 있는 촌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삼읍이 정립된 후 제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와 목사를 보좌하는 종5품의 판관, 그리고 대정과 정의 두 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고, 관아의 설치와 읍성이 구축되면서 그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한편으로는 중앙집권정책도 강화된다. 성주·왕자제와 토관제가 폐지되고 공부와 전세가 경정되는가 하면 교육기관인 향교가 설치되고, 경지개간과 귤 재배의 장려, 말의 증식과 목마장의 울타리 시설, 수비군과 봉수·연대의 설치, 역참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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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와 육지와의 관계는 선박의 발달, 교통수단의 발달과 관련이 깊은 제주항로의 발달과 연계해 변화해 왔다. 제주와 육지와의 해운항로는 고려시대 이전에는 하나의 국가로서 교역이 중심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진상, 유배, 군사이동 등이 내용이 있었다. 구한말 시대에 이르러 국제간 항로가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생활교통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최근에는 해역항로를 생활교통, 물류교통, 유배항로 등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로 생활교통 중심의 노선이 일반화되어 있다.

때문에 제주항로는 매우 중시되어 국가가 관리하는 국유 항로표지는 102개, 민간부문에서 관리하는 항로표지가 28개이다. 우리가 보통 등대라고 하는 광파표지에는 유인등대가 4곳, 무인등대가 69개소가 된다. 형상표지는 1개소이며, 음파표지는 4개소, 전파표지는 4개소에 설치되어 있다.

제주와 육지 항로는 이미 고정되어 있으나 역사 기록에 보이는 항로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통일신라시대 : 완도 청해진-제주도-대재부 항로

통일신라시대 교역항로 중 제주도와 관련된 항로에 대해서 이창억 교수는 추측항로로 완도 청해진-제주도-대재부 항로를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완도에서 출발하여 직접 남행하여 100Km 정도의 제주 해협을 건너 제주도에 이르고, 제주도에서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200여Km를 항행하여 오도열도 혹은 평호도에 이른 후에 다시 대재부까지 항행한다.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07)

2. 고려시대 : 애월·조천-추자도-나주·해남

‘속탐라록’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편 끝 부분에 보면 1300년대 말엽 제주로 가는 경로가 나와 있다. "무릇 탐라로 가는 자는 나주를 출발하면 무안의 대굴포, 영암의 화무지 와도, 해남의 어란진을 지나 무릇 7주야만에 추자도에 이른다. 해남에서 출발하면 삼촌포와 거요량 삼내도를 지난다. 탐진을 출발하면 군영포와 고자황이, 노슬도, 삼내도를 지나 모두 3주야로 추자도에 이른다. 위 세 곳의 배는 모두 이 섬을 경유하여, 사서도, 대소화탈도를 지나 애월포나 조천포에 이른다. 대게 화탈도(관탈섬) 사이는 두 물줄기가 교류하여 파도가 흉흉하니, 모든 내 왕자가 이를 어렵게 여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1300년대 나주를 출발할 경우 추자도까지 7일이 걸리고, 해남에서 출발하거나 탐진에서 출발하면 추자도까지 3일이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해안-제주 해역 삽화에 뱃길 표시)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02)

3. 조선시대

가. 남사록 항로 : 선조 34년(1601) 7월 제주어사로 파견되었던 김상헌의 <남사록>에는 "강진, 해남 두 현은 모두 바다에 있는데, 무릇 제주를 왕래하는 공행은 반드시 여기에 와서 배를 탄다. 해남은 관두량이고 강진은 백도도인데, 영암의 이진포가 또 강진과 서로 붙어 있기 때문에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다 세 곳에 모이고, 매년 강진, 해남 양읍에서 도회하여 관섭, 호송하는 일을 윤정(輪定)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공행이라고 하는 것은 출장 관리의 행차를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관항적(官港的)인 성격을 띄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입도 경로를 보면 해남 관두량―모로도―진도―독거도―초도―죽도―어란―어울―웅거―마삭―장고―광아―추자―애월로 되어 있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03)

나. 환황해 연근해 항로 :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환황해 전체를 하나의 원으로 연결하는 권이 형성되는데, 산동반도의 묘도 군도, 요동반도 남단, 서한만, 대동강 하구, 경기만, 한반도 서남해안, 한반도 남동해안, 쓰시만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황해의 동안, 즉 서해의 연근해를 이용하는 항로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환황해 연근해 항로이다.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10)

다. 동중국해 사단항로 : 동중국해 사단항로는 중국 절강 지방의 중요한 항구, 예를 들어 영파나 그 외항인 주산군도의 섬들을 출발하여 동중국해를 지나 동북방향으로 사단한 다음 제주도를 경유하거나 기항해서 일본이나 한반도 각 지역으로 항해하는 항로를 말한다.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10~111)

라. 제주-유구항로 : 이 항로는 제주도와 현재 오키나와를 오가는 항로로서 늘 북상하는 쿠로시오와 봄철에 남서 방향을 부는 계절풍을 활용한 항로이다.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11~112)

마. 제주-일본열도항로 : 제주도 동쪽으로 일본열도의 쓰시마 또는 도토열도를 거쳐 규슈까지 가는 직접항로를 제주도-일본영도 항로라고 한다.『日本書紀』에 보면 탐라국이 독자적으로 일본열도의 국가들과 교섭했음을 알 수 있는데 아마 그때 이 항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12~113)

사. 인천-군산-목포-제주-좌수영-부산항로 : 1895년 6월 16일자 관보에는 일본 우선회사 준하호의 각 항구간 항해 정기표가 있다. 관보를 중심으로 보면 기선이 인천을 출발하여 군산, 목포, 제주를 경유해서 다시 인천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좌수영과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부산에서 제주를 거쳐 인천으로 향하는 항로를 운행했다.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04)

4. 일제강점기

가. 부산-제주-목포항로 : 조선총독부에서는 1911년 1월 20일 부산-제주-목포간 발착시간을 인가했다. 기항지는 장승포, 구마산, 마산, 통영, 욕지도, 삼천포, 여수, 나로도, 거문도, 조천, 산지, 추자도였다. 선박은 부산기선주식회사의 宗信丸, 慶榮丸이다.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05)

나. 목포-서귀포항로 : 목포를 출발하여 제주도에 들어오는 선박의 출발지부터 제주도 동회선의 기항지를 살펴보면, 소안도, 산지, 조천, 김녕, 성산포, 표선 등이다. 사용선박은 光陽丸이었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명령항로이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05)

다. 부산항로 : 1918년 당시 부산 제주도선의 항로 기항지는 장승포, 여수, 거문도, 성산포, 조천, 산지, 한림, 협재, 모슬포, 서귀포, 표선이었다. 선박은 昌平丸이다.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06)

제주의 해전사

제주를 중심으로 하는 전쟁은 또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였다. 정복과 약탈이 전제되었던 전쟁을 통해 제주는 육지 또는 인근 나라들과의 관계를 형성하였다. 대표적인 해전사 등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삼별초와 제주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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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역에서의 직접적인 해전은 원종 11년(1270) 삼별초 이문경 부대가 제주에 상륙하여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 관군과의 싸움을 전개하면서이다.
당시 고려 개경정부는 삼별초가 그들의 거점인 진도 용장성이 무너졌을 경우에 제주에 옮겨 항쟁을 계속 전개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영암부 감수와 고여림 장군을 제주에 파견하여 삼별초가 제주도로 상륙하는 것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명월포로부터 상륙한 삼별초 이문경부대가 제주지역의 교두보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제주에 미리 주둔하고 있던 고려 관군과의 싸움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문경은 동제원에 진을 치고 있던 방어군을 송담천에서 맞아 싸워서 승리로 이끌었다. 고려 원종 12년(1271) 5월에 김통정이 제주에 들어와 이문경 부대와 합세하면서 삼별초의 제주항전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고려정부는 연합군을 앞세워 제주도에 대한 공격계획을 수립하였고, 1273년 2월 함선 160척 수륙군 1만 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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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의 이같은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삼별초는 계속 후퇴하다가 뿔뿔이 흩어졌고 삼별초를 이끌던 김통정이 그해 4월에 전사했으며 잔여 삼별초군 1천3백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이로써 삼별초의 난은 3년 만에 완전히 종식되었다.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48~149)

2. 최영의 목호 토벌

고려 후기 제주 목호의 난을 진압한 무신으로 고려 후기 공민왕대에 홍건적,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우왕 말기에는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을 결정하고 정벌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지만, 이성계가 단행한 위화도 회군으로 실각하고 숙청되었다. 본관은 동주(철원). 아버지는 사헌규정 최원직(崔元直)이며 어머니는 삼한국대부인 지씨이다. 부인은 문화유씨이다.
(출처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http://jeju.grandculture.net)

3. 천미포 왜란

1552년(명종 7) 5월에는 정의현 천미포에 침입하여 많은 백성들을 죽였다. 이때 김충렬 제주목사와 정의현감 김인이 이를 막아내지 못하자, 같은 해 6월 남치근을 제주목사로 임명하였다. 그 후 1554년(명종 9) 5월 다시 왜구가 천미포에 침입하였다. 그러자 1555년(명종 10) 정월 김수문을 제주목사로 임명하였다. 이 해 5월에 왜구들은 70여 척의 배를 앞서워 달량포와 이진포 등 우리나라 남해안에 침입하였다. 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 등은 이들을 막아내지 못한 채 전사하였고, 왜구들은 영암까지 진출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는데, 전주부윤 이윤경이 장병들을 거느리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때 패배한 왜적들은 6월 27일 40여 척의 배에 1,000여 명이 탄 채 제주도에 상륙하였다. 김수문 제주목사는 효용군 70명을 골라 적진으로 돌진시켰다.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 이희준, 보인 문시봉 등 4명이 말을 달려 적진 한가운데로 돌격하자 왜구들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중 붉은 털의 투구를 쓴 적장 하나가 자신의 활 쏘는 실력을 믿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정병 김몽근이 그의 등을 활로 쏘아 넘어뜨리자 왜적들은 패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고, 우리 장병들은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출처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http://jeju.grandculture.net)

4. 을묘왜변(1555년, 명종 10)

천미포에서 패배한 왜적들은 6월 27일 40여 척의 배에 1,000여 명이 탄 채 제주도에 상륙하였다. 김수문 제주목사는 효용군 70명을 골라 적진으로 돌진시켰다.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 이희준, 보인 문시봉 등 4명이 말을 달려 적진 한가운데로 돌격하자 왜구들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중 붉은 털의 투구를 쓴 적장 하나가 자신의 활 쏘는 실력을 믿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정병 김몽근이 그의 등을 활로 쏘아 넘어뜨리자 왜적들은 패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고, 우리 장병들은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출처 : 김봉옥, 『증보 제주통사』, 2000. 103~104)

5. 서양함대의 출몰

18세기 후반부터 제주 인근에는 서양인들의 함대가 자주 출몰하였다. 프랑스 라페루즈가 지휘하는 해양탐사대가 1785년 8월 1일에 항해를 나섰다.
항해에 나선 해양탐사대는 대서양과 남아메리카대륙 남단을 돌아 북상하여 러시아 연해주 해역과 일본 북해도 근해를 거쳐 1787년 5월 우리나라 동해로 들어왔다. 다시 일본 남부, 필리핀, 동남아 해역을 거쳐 1788년 1월 호주 시드니항에 도착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울릉도와 제주도 근해에 접근하여 탐사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순조 16년(1816) 영국 알세스트호 선장 맥스웰과 함께 홀이 9월 1일부터 10일까지 서해 5도와 군산 앞바다 일대를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하였다.
그리고는 9월 10일 오전 10시경에 출발하여 저녁 늦게 제주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렀다. 그들은 제주도 해안의 해도를 성급하게나마 작성하고 돌아갔다.

헌종 6년(1840)에는 영국선 2척이 제주 대정현 모슬포와 가파도에 내박하여 총을 발포한 일이 발생한 바가 있었다. 이로 인해 대정현감이 파직되었고, 제주목사 구재룡도 방어의 책임을 물어서 파직되었다.

제주도에 대한 서양인의 본격적인 탐사는 1845년 6월 영국 사마랑호였다. 이 영국 해군군함의 함장 벨처는 1845년 6월 25일 제주도의 동쪽에 위치한 우도에 도착하여 이곳을 기지로 삼아 제주도와 거문도, 거금도 일대를 정밀 측량하였다.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51~152)

6. 일본어민의 제주 침탈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 이후 군수산업과 해양산업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기계화된 어선들은 우리 연해까지 침입하여 불법 어획을 자행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후 이러한 불법어획이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 제주에 상륙하여 약탈과 폭력 행사,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그 문제가 매우 심각하였다.
(출처 : 김봉옥, 『증보 제주통사』, 2000. p2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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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일제의 군사진지 구축

제주도 내에는 일제 말기 일본군이 조성해 놓은 거대 군사시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일본군 군사시설은 육-해군의 비행장, 포대, 참호, 고사포진지, 육-해군의 훈령장 및 감시초소, 대피소, 진지동굴, 특공대기지, 비행기 격납고, 탄약고, 폭탄매립지 등을 총망라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한라산 중턱에 '머리띠를 두른 형국'이라는 뜻에서 '하치마키(鉢卷)'라는 군사도로가 만들어졌으며, 이외에도 각 진지와 진지, 진지와 포구를 연결하는 군사도로도 요소요소에 남아 있다. (출처 : 안덕면, 『안덕면지』, 2006. 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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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 제주

제주도는 정부가 선호하였던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정쟁으로 인한 결과이거나 정부에 대한 역모와 연루된 죄인들을 적소에 안치하였던 정부로서는 제주에 대한 관심을 끊이지 않았다. 선조 34년(1601) 7월 제주어사로 파견되었던 김상헌의 <남사록>에 표현된 관선 항로 등은 그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유배를 거슬러 보면 다음과 같다.

1. 귤림서원

귤림서원은 조선 시대 초기 및 중기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했던 오현(五賢), 곧 충암 김정·규암 송인수·동계 정온·청음 김상헌·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유교 교육 기관이었다.

초기의 학생수는 20여 명 정도였으나 이후 35명까지 늘어났으며,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원되기 전까지 오현사와 영혜사, 향현사 등 하나의 본사와 2개의 별사, 그리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장수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귤림서원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뒤 사사된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가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를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1659년(효종 10) 제주목사 이회가 장수당을 건립하고, 1665년(현종 6) 판관 최진남이 김정의 사묘를 장수당 남쪽으로 옮기면서 사(祠: 충암사)와 재(齋: 장수당)를 갖춘 명실 상부한 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1682년(숙종 8) 예조정랑 안건지가 제주도에 파견되어 ‘귤림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며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다. 뒤이어 1695년(숙종 21) 송시열도 함께 모시면서 오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원되었는데, 1892년(고종 29) 제주 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2000년 이후 귤림서원 복원 작업에 들어간 제주시는, 2004년 10월 학생들이 공부하던 장수당과 협문 1채, 돌담 110m 등을 완성한 데 이어, 2007년 8월 향현사 복원을 마무리지었다.(출처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http://jeju.grandculture.net)

2. 광해군 위리안치

광해군은 조선조 15대 임금으로, 재위 15년인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광해군으로 강봉되었다. 강화도에 잠시 유배된 뒤 1637년(인조 15) 5월에 제주도로 이배되었다. 광해군이 위리안치되었던 곳은 서성 안이라는 설과 남성 안이라는 설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적소는 1653년(효종 4) 하멜 일행이 표착했을 때 그들이 수용되었던 곳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광해군은 제주도로 이배된 후 4년 4개월 만인 1641년(인조 19) 7월 1일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때 이시방 제주목사는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 시체를 운구하려면 형색이 변하여 취증할 수 없으므로 숭종의 예를 올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소복으로 제주도 내의 제관을 거느리고 친히 염습하였다.(출처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http://jeju.grandculture.net)

3. 김정의 유배

조선 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이다. 충암 김정은 중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조광조와 함께 미신타파·향약시행 등에 힘썼으나 기묘사화 때 제주에 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의 적거지는 제주읍성 동문 밖 금강사지(金剛寺址)였는데, 결국 그는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1521년(중종 16)에 사약을 받고 제주에서 사망하였다.(출처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http://jeju.grandculture.net)

4. 정온의 유배

동계 정온은 1601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이 분노하여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온을 국문하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거처에 가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는 유배형)하였다.

정온이 해배된 후 약 200년 뒤인 1842년(헌종 8) 대정현에 유배를 왔던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에게 청하여 대정현 막은골, 지금의 안성리에 송죽사(松竹祠)와 유허비를 세웠다. 1963년 대정 지역 칠성계가 중심이 되어 정온의 비석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에 있는 보성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겼다가, 1977년에는 보성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옮겼다. 정온의 생가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산리 50-1번지에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고, 유품은 중요민속자료 제2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http://jeju.grandculture.net)

5. 송시열 유배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1689년(숙종 15)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의 적거 기간은 불과 3개월에 불과하지만 귤림서원과 산지천에 있는 경천암에 제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주 지역에서는 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나이 83세에 제주도로 유배된 송시열은 약 100여 일 동안 산짓골 윤계득의 집을 적소로 정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이 그를 다시 국문하도록 요청하여 서울로 압송하던 중 6월 7일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 후 1694년(숙종 20)에 서인이 집권하자 관직이 복구되고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제주 유생 김성우 등은 1695년(숙종 21) 2월에 상소하여 송시열을 귤림서원에 배향하였다. 지금 오현단 서쪽 암벽에 새겨져 있는 ‘증주벽립’의 필적은 송시열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출처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http://jeju.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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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난주 유배

1773년 나주 본관 정약현과 경주 본관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난주는 당대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로서 숙부의 가르침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1791년 황사영과 혼인했다. 남편 황사영은 약관 16세에 초시,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으나, 입신양명의 길을 버리고 처숙인 정약용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박해의 길을 걸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박해의 참상과 순교자 현황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위한 외국의 지원을 청원하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를 작성하여 외국으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발송하기 전에 발각되어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으며 그 결과 처 정난주는 제주도에, 아들 경헌은 추자도에 유배되었다.

혈혈단신으로 제주목 관노로 유배된 정난주는 유배의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의 덕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뛰어난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하여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할머니’로 칭송을 받아 왔다. 유배 생활 38년째인 1838년 병환으로 숨을 거뒀는데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이곳에 유해를 안장하여 지금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7. 김정희의 유배

추사 김정희는 조선 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이다.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이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김정희의 적거지는 처음에는 대정현 교리(校吏) 송계순의 집이었으나, 나중에 지금 추사 적거지가 마련되어 있는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다.
나아가 식수 관계로 한때 창천리에 옮겨 살기도 하였다. 그가 유배되어 있던 1845년(헌종 11)에는 영국의 사마랑호가 제주도 연근해를 측량하는 등 이국선이 자주 왕래하기도 하였다. 유배되어 있는 동안 강기석·강도순·강사공·김구오·김여추·김좌겸·박계첨·이시형·이한우·홍석우 등이 그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다.
김정희의 제주 유배는 그에게 있어 추사체를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출처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http://jeju.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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