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이순신

임진왜란과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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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

1592년 4월 13(음력)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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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이순신은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그는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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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 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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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赤珍浦)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제1차 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고 있던 그는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5월 29일 이순신은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露梁)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그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 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軍官) 나대용(羅大用) 등이 부상하였고, 그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와 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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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해전 다음날 그의 함대는 가박지(假泊地)인 창신도(昌信島)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그는 매우 반갑게 맞았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 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와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계(陞階)되었다. 그 뒤 그는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見乃梁)에는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이순신은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쳐 일제히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그는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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