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명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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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 문화의 고속도로

서남해역은 종교의 원형을 전달해주는 문화자원이 강하다. 그 이유는 문화의 전파루트가 해양을 통해서 가능하였고, 또 해양은 내륙보다 일찍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남해안은 선사시대이래로 연안항로의 발달과 함께 끊임없이 외래문화가 유입되었다. 또한 서남해역은 지형학적으로 천해(淺海)와 연안(沿岸)의 조건을 동시에 갖춘 넓은 조간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주민들에게 폭넓은 생활공간을 제공하였다. 즉 바다는 육지 사람들의 전답처럼 섬주민들의 경제기반을 마련해주는 생활공간이고, 광활한 갯벌은 농경지·염전·양식장 등으로 활용되었으며, 넓은 연해와 천해는 어획공간이자 해상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선사시대 이래로 해양과 관련한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고, 주변 국가와 교류한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는 이 해역은 대외교류의 측면에서 서남해 지역은 중국지역의 산동성의 남부와 절강성, 그리고 일본열도가 만나는 일종의 삼각점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연결시키는 해양교통의 중요한 교차점이다.

최근 구석기문화의 계통성이 확인되는 유적의 발굴과 함께 신석기문화 역시 서남해안에서 확인된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의 분포는 남해안에서 서해안지역에 이르는 도서지역의 패총과 내륙부 보성강유역의 유물산포지로 구분된다. 수렵은 흑산열도와 같은 이도(離島)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궁시법(弓矢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또 채집은 전 해역에서 이루어졌으며, 어로는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다. 패류채취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서해안에서 참굴, 남해안에서 굴, 소라, 전복 등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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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의 서남해역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중국 동북부지역과 한반도 북부지역, 중국의 동부와 남부지역으로부터 새로운 문화를 발견하고 발전시켰으며, 다시 경남지역 및 일본 등지로 전파하는 일종의 문화 정류장 역할을 하였다. 청동기 취락유적은 대체로 강안이나 얕은 구릉지에서 확인된다.
해남 군곡리패총에서 시작된 패총에 대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청동기문화로부터 철기문화가 형성되는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음과 함께 해로(海路)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고대 연안해상 교통은 “삼국지”에 등재된 조공(朝貢)과 교역(交易) 관련 기록을 통해서 볼 대, 중국과 동해 연안, 한반도 서해 및 남해 연안을 거쳐 일본열도에 이르는 국제 연안항로가 개설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설화와 전설을 토대로 추적해 본 동아시아의 연안항로는 로 연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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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해역의 경우 전남 서남부 해안지역 옹관고분의 분포라든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주었다는 영암지방 왕인에 얽힌 전설 등은 이 지역에 해양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입증해준다. 또 4세기 후반 백제의 근초고왕은 해남반도 일대와 가야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고, 중국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연안항로를 통해 고대의 동아시아 국제 해상교역을 주도한 우리 나라 최초의 해상왕으로 평가되며, 9세기에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신라·당·일본의 중계무역을 독점하면서 동아시아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던 점을 감안해 볼 때, 서남해 도서 연안지역은 중국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를 잇는 서남항로의 주요 거점이었고, 서남해안 섬과 육지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은 선진문물을 보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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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해역은 해양토착세력이 형성되고, 장기간 웅거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이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주목되는 해안은 만경강 하구, 영산강 하구, 섬진강 하구 유역이다. 영산강 하구는 한반도 남부에 있는 세력들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 열도를 오고가는 경우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해양교통의 길목이었다. 또 한반도 북부를 통해서 내려오는 길과 중국 강남에서 들어오는 길, 그리고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길, 한반도의 남부동안에서 오는 길,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오는 길, 이러한 모든 물길이 상호교차하면서 반드시 경유하는 거점이었다. 또 만경강 하구는 충남과 전북을 잇는 최대의 만(灣)으로, 내륙에서 비교적 빠른 시간에 바다로 연결될 수 있다. 즉 김제는 만 내부의 돌기처럼 솟은 작은 반도이며, 그 양쪽으로 수로가 형성되어 있다. 이런 입지적 조건은 대외교섭에 있어서 해양중계지 혹은 경유항로로 적합하였다. 따라서 만경강 하구는 고대 남북을 연결하는 항로의 중계지 역할은 물론 황해를 건너온 중국 남방문화가 유입하는 입구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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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한반도의 서남해 지역은 중국지역의 산동성의 남부와 절강성, 그리고 일본열도가 만나는 일종의 삼각점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연결시키는 해양교통의 중요한 교차점이다. 이런 까닭에 선사시대이래로 해양과 관련한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고, 주변 국가와 교류한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동아시아는 선사시대부터 해양문화가 다양한 형태로 발달하였다. 그리고 황해·동해·남해·동중국해가 대륙과 일본열도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가운데 한반도가 위치한다. 따라서 한반도는 지중해적 성격을 띄고 있다. 황해는 동아지중해에서 활동의 핵심에 해당하는 중심부이고, 서남해안은 그 중심에 위치한 지역이다. 즉 서남해는 황해·남해·동중국해가 직접 만나는 유일한 해역이다. 그러므로 남북연근해항로, 황해중부 횡단항로, 황해남부 사단항로, 동중국해 사단항로, 그리고 일본항로 및 남방항로가 만나는 해양교통의 중심센타였다.

서남해와 일본열도와의 교류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전개되어왔다. 벼농사문화와 금속기문화의 전파과정을 거쳐 특히 역사시대에 들어오면 한민족의 해외진출이란 입장에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한반도의 남부지역은 일본열도로 진출하는 경유지 또는 출발지 역할을 하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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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는 일종의 내해로, 중국지역간의 교류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이루어졌다. 1차적으로는 황해북부의 연근해를 통해서 이 지역을 경유하여 문화와 주민의 정착이 이루어지거나 다시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점차 문화의 발전수준이 높아지고, 해양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해양활동범위가 확대되고, 그를 이용한 교류의 정도와 범위도 확대되었다. 벼농사의 전파, 고인돌의 전래, 기타 문화현상들이 바다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조직적인 문화의 전파 그리고 진출 침략 등이 다양한 형태로 바다를 이용하였다.

고인돌의 종착지, 한반도

1. 한반도의 고인돌 기원

한반도 고인돌의 기원에 대해서는 자생설, 남방설, 북방설로 나뉘어 설명되고 있다. 자생설의 기반에는 한반도의 고인돌이 가장 밀집된 분포를 보이면서도 형식적으로도 다양하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한반도의 고인돌 문화가 오랜 기간 동안 정착 성행하였고, 세계적인 밀집분포권을 형성한 것에 연유한다. 반면 남방기원설에서는 고인돌이 동남아시아로부터 해로를 통해 벼농사문화[稻作文化]와 함께 유입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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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 해안지방을 따라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 등의 서해안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는 것과, 남방문화의 요소인 난생설화의 분포지역과 고인돌 분포지역이 일치한다는 점은 동남아시아지역이 2차장[洗骨葬] 풍습과 정착 농경문화 지역이라는 점이 중시되었다. 한편, 북방설은 요령지방의 돌널무덤에서 변화 발전하였다는 설로 한국 청동기문화가 북방계통의 요령지방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양 지역에는 탁자식과 기반식이라는 형식이 존재한다는 근본적인 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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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고인돌의 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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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식 고인돌 : 지상에 잘 다듬어진 판돌 3매 또는 4매로 짜 맞춘 돌널(石棺) 을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판돌을 얹어 책상모양으로 구성한 형태이다. 대형의 탁자식은 요동반도와 한국의 대동강 유역에서만 보이며, 구릉이나 산중턱에 1기씩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이외 지역의 탁자식은 규모가 작고, 돌널 폭도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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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반식 고인돌 : 지하에 판돌(板石)을 세우거나 깬돌(割石)로 쌓은 무덤방(墓室)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위에 고임돌(支石) 4개에서 8개 정도를 배열하고, 그 위에 커다란 바위같은 돌로 덮어 마치 바둑판과 같은 모양을 이루는 형태를 말한다. 이와 함께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상(塊石狀)을 한 것은 호남과 영남지방에서만 보이고 무덤방이 없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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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석식 고인돌 :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뚜껑으로 덮개돌이 놓인 형식으로 요동반도, 한반도, 일본 구주지역에 널리 분포한다. 이를 고임돌이 없는 기반식으로 분류하여 ‘무지석식’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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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석식 고인돌 : 지상에 드러난 고임돌이 덮개돌 아래를 돌아가면서 그 자체가 무덤칸을 이루는 형식이다. 이 형태는 지상에 고임돌이 노출된 기반형과 덮개돌 아래에 판상석(板狀石)으로 돌려서 탁자식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이 고임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면서 주검칸과 분리시켜 주고 있기 때문에 하부구조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해 주는 역할뿐만 아니라 외형적으로 덮개돌이 웅장하고 위용을 가지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 일부가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지만 전형적인 것은 소위 ‘제주도식(濟州道式)’이라 하여 제주도에 집중되어 있다.

3. 한반도의 거석문화와 고인돌의 의미

고인돌은 강력한 지도자나 지배세력의 상징이며, 영혼의 안식처의 기능과 함께 구석기시대 이래 인류가 발전하는 모습을 극대화한 총체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더욱이 한반도는 세계 고인돌의 약 60% 정도를 차지하는 고인돌 전시장이면서도, 대부분이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분포상은 서해안을 따라 집중 분포되어 있다는 점, 각 지역마다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공동체사회의 건설 및 계급의 발생과 농경을 통한 정착생활의 문화적 요소의 표현이라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때문에 거석문화를 통해 영생불멸을 기원하고 내세에서의 환생을 기원하였던 정령신앙화의 모습이 역사시대에 다양한 신앙형태로 전승되고 있다는 것은 고인돌 문화 자체의 원형적 접근을 통해 한반도의 역사와 민족문화를 이해하는 시원적 모습의 문화원형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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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초전

서남해역은 역사 속에서 주목할 만한 해양활동을 전개하였던 해양민·해양세력·해양영웅 또한 많았다. 고대 서남해 해양세력의 상징적 인물로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오는 왕인(王仁), 9세기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도한 장보고(張保皐), 후삼국기 서남해 해양세력인 능창(能昌)과 오다린(吳多憐), 후삼국기 순천지역의 해양세력인 박영규(朴英規)와 김총(金摠), 왕건과 견훤의 나주 공방전, 고려말 최씨정권과 삼별초 및 무장(武將), 임란을 극복한 해전영웅들이 그들이다. 해양 영웅은 해역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지역별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탐구는 무관심의 영역으로 방치되었던 해양사와 해양문화를 규정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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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해역은 종교의 원형을 전달해주는 문화자원이 강하다. 그 이유는 문화의 전파루트가 해양을 통해서 가능하였고, 또 해양은 내륙보다 일찍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남해안은 선사시대이래로 연안항로의 발달과 함께 끊임없이 외래문화가 유입되었다.

이러한 문화 전파 루트는 삼국시대 이후 중국의 불교·유교문화와 근대 개화기 과정에서 천주교와 개신교가 전파하여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서남해안은 입지적 조건이 황해와 접하고 한·중·일을 연결하는 다양한 항로가 개설되어 있어서 해상을 통한 문화교섭과 경제교역이 고대사회이래로 활발하게 이뤄졌다. 해상항로는 사신과 교역이 이뤄지기도 하였지만, 전쟁과 정복의 루트로도 이용되었다. 특히 바다는 개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공간이다. 바다는 중국대륙과 일본열도와 한반도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연결해 주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한반도 서남해안에 종교가 처음 전래한 것은 백제시대이다. 백제시대에 동진의 마라난타가 해상을 통해 불교를 전래하였다는 곳이 영광 불갑사로 전해온다. 백제의 왕인박사는 영암 성기동에서 태어나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해주었으며, 통일신라기에 영암 출신인 도선국사는 중국으로 가서 수학한 이후우리나라에 풍수지리를 처음 전래해온 고승으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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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난 최치원과 관련된 설화가 옥구지역에서 전해오고 있다. 또 이 시기 중국과 교역활동을 주도한 장보고가 완도 청해진을 무대로 해양을 통한 중국과 문물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중국과 사단항로의 개설로 다양한 해상교류가 이루어졌다.

바다를 통한 종교문화의 전래는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개화기에 금강하류를 통해 천주교가 수용되었고, 그 뒤를 이어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물론 전라도가 천주교의 초전지가 아닐지라도 해류를 통하여 포교되었다는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금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와 망성 포구 나바위에 천주교 성지를 조성하였으며, 군산 포구의 거북바위(구암)에 구암교회를 세우고 목포항 유달산 아래에 양동제일교회를 건립하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서남해안에 정착한 기독교는 근대학교와 현대식 병원을 세워 근대화를 가져오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시기 신종교는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또 원불교가 전남 영광 백수면에서 태동하여 법성포와 변산반도, 익산으로 전래되어 크게 융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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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과 장보고

신라는 이른바 하대(下代)에 들어서면서 총체적으로 난맥상을 드러내며 간신히 국가의 운명을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 행정력을 상실한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점점 잃어갔고, 거듭되는 실정으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서도 왕권쟁탈전이 심각하게 벌어져 왕위는 잠시 머물다 가는 자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경쟁에서 탈락하고 소외당한 세력들은 몇몇 지방을 중심으로 독립하려 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의 야심을 실현시켜 줄 조직을 갖추면서 점차 호족으로 성장해 나갔다. 지방에서 자생적으로 태동한 순수한 호족 세력들도 때를 만나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해안 지방에는 해상 호족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신라는 국방을 목적으로 필요한 몇 곳을 지정하여 진(鎭)을 설치했다. 제일 먼저 세워진 것이 패강진(浿江鎭)으로, 782년 황해도 내륙인 대곡성(大谷城)에 설치했다. 패강진은 예성강 이북으로부터 대동강 이남 지역에 걸치는 서북 방면을 방어하는 중요한 국방상의 기능을 담당했으며, 재령·연안·배천 등 황해도와 강화도 사이의 해안 도시와 이어지면서 해양 방어도 겸했다.

흥덕왕 3년(828)에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장보고를 대사로 임명했다. 다음해에는 남양반도 해안가에 당성진을 설치했다. 이곳은 이미 백제시대부터 중국과 교통을 하던 장소로, 고구려시대에는 당성군이라 불리었으며, 신라가 경덕왕 때 이름을 당은군이라고 했던 곳이다. 김춘추와 의상이 이곳에서 출발했고, 낭혜화상(郎慧和尙)인 무염(無染)도 헌덕왕 14년에 이곳 당은포를 출발하는 조정왕자 김흔(金昕)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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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이미 하대에 접어들면서 곳곳에서 해상 세력이 출몰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질상 무정부적이고 호족성을 띠고 있어 중앙에서 통제하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한 예로 문성왕 3년에 일길찬(一吉飡) 홍필(弘弼)이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자, 해도로 도망친 사건이 있었다. 물론 그는 잡히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단순히 몸을 숨기면서 경제력을 키워가다가, 나중에는 군사적으로 성장하고, 결국에는 지방의 호족 세력으로 독립했다.

정부가 진들을 설치하고 장보고가 청해진을 거점으로 바다를 통제하면서, 군소의 해상 세력들은 일시적으로 제압되었다. 하지만 수면 아래 잠복해 있던 그들은 점차 바다 위로 고개를 내밀면서 결국은 신라 사회를 속도감 있게 해체시켜 나갔다. 그러다가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장보고가 중앙정권에 의해 제거당하자, 그가 장악하고 있던 해양력의 공간은 순식간에 진공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해양의 군소 세력들은 절호의 기회를 맞은 듯 고삐 풀린 말처럼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혈구진은 아마도 강화 지역에서 발호하는 해상 호족 세력들을 제압하고 정리하기 위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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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항쟁

1. 개요

삼별초는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신의군(神義軍)의 3개 별초군을 총칭한 것으로, 용맹한 인사를 선발해 조직한 특수한 군대조직이다. 별초라는 임시적 군대조직의 편성은 명종 대의 조위총(趙位寵)의 반란 때 나타나지만, 역사상으로 주요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최우 집권기의 일이며, 특히 대몽항전기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1232년(고종 19) 최씨정권이 정부를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한 뒤 대몽항전의 전 시기를 통해 삼별초는 가장 강력한 전투병력이었다. 당시의 군사력으로서는 2군 6위(二軍六衛)의 조직이 형식상 남아 있었고, 또 최씨정권의 순수한 사병집단인 도방(都房)의 병력도 존재했으나, 전투병력으로서 가장 위력을 발휘한 것은 삼별초였다.

삼별초는 강도(江都 : 강화도)를 수비하는 방어의 책임 뿐 아니라, 자주 섬을 나와 본토에서 몽고군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강화도에서 정변(政變)이 있을 때마다 삼별초의 무력은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최의를 죽여 최씨정권을 타도한 김준과 김준을 살해해 마지막 집정무신이 된 임연이 모두 삼별초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삼별초는 국가 재정에 의해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받는 등 권신의 사병과는 구별되었다. 그러나 권신의 정치권력과 너무 깊이 유착(癒着)되어 있어 사병적 성격이 농후하였다. 삼별초의 난의 기본적 요인은 우선 삼별초라는 강력한 전투병력이 권신들과 깊은 유착관계에 있었다는 정치적 특수사정에 있다 해야 할 것이다.

삼별초는 당시의 권력구조 안에서 역대의 권신들과 유착되어 무인정권을 보위, 옹호하는 구실을 하였다. 강화도에서는 왕실 중심의 대몽고타협파와 무인 중심의 강경파가 대립하였다. 대립은 결국 타협파의 승리로 낙착했는데, 이러한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동과정에서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왕실의 세력에 일격을 가하려 한 것은 자연의 추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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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도 항전

새로 왕을 세우고 관부를 설치한 삼별초는 반란 3일 뒤 공사 재물을 접수하고 강화도에 남아 있는 귀족·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배를 태워 진도(珍島)로 보냈다. 이 때 선박 1천여 척이 동원되었다.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것은 몽고군의 반격을 예상하고 섬에 강력한 군사기지를 설치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 해전에 약한 몽고군에 대해 전략상 우위를 확보하려는 작전이었다.

진도로 옮긴 지 얼마 있다가 전라도일대를 제압하였다. 해안도서지방은 물론, 내륙지방도 점차로 삼별초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스스로 진도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복속의 뜻을 표하는 자도 있었다.

이 때 나주에 와 있던 전라도토적사참지정사(全羅道討賊使參知政事) 신사전(申思佺)과 전주부사 이빈(李彬)이 삼별초의 위세에 눌려 개경으로 도망쳐왔다. 전주·나주와 같은 내륙의 큰 도시도 포위되어 공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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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년 9월 조정에서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방경(金方慶)을 대신 전라도추토사(全羅道追討使)로 임명해 토벌을 명했고, 몽고의 원수 아해(阿海)도 동행하였다. 고려·몽고 연합군의 진격으로 형세는 약간 정부군에 유리하게 된 듯 하였다. 그러나 삼별초의 기세는 꺾이지 않아, 전라도지방의 도서와 해안은 물론, 경상도의 남해·거제·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동래·김주(金州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 등지가 삼별초의 군사적 활동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11월 삼별초는 탐라(耽羅 : 제주도)를 공략, 남방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전라도·경상도의 조운(漕運)이 차단되어 정부는 큰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고려·몽고의 연합군은 여러 차례 진도를 공격했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271년 5월 홍다구(洪茶丘)가 새로운 몽고군 지휘관에 임명되면서 김방경·흔도(誤都)·홍다구의 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해 겨우 성공하였다. 이 때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진도 함락 당시 남녀의 포로가 1만여 인이었다고 하며, 그 가운데에는 인질로 잡힌 귀족·고관의 가족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강화 창후리 포구+강화 항몽결의비+진도 용장산성+용장산성 건물지 초석 사진+용장산성에서 본 전경+용장사 사진)

3. 제주 항전

삼별초는 파멸 직전의 타격을 받았으나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았다. 살아남은 여당들은 김통정(金通精)을 수령으로 받들고 본거지를 제주도로 옮겨 항전하였다. 삼별초는 제주에 들어와 우선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방어 시설로서는 항파두리성·애월목성·환해장성 등을 들 수 있다. 항파두리성은 제주의 삼별초 지휘부가 들어섰던 곳으로 항몽의 최고 주요 거점이었다. 애월목성은 삼별초가 애월포에 나무로 쌓은 목성인데, 아마도 애월포가 삼별초 수군 병력의 거점이자 항파두리성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관문의 하나였기 때문에 방어 시설을 쌓았을 것이다. 환해장성은 제주 해안을 전체적으로 둘러친 3백리 장성인데, 처음에는 삼별초의 진도 거점 시기에 개경 정부에서 보낸 관군이 삼별초의 진입을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어 삼별초가 개경 정부군과 몽골군의 공격에 대비해 계속해서 환해장성을 쌓았는데, 조선시대에도 계속 보수 작업이 행해졌던 것 같다. 제주삼별초의 방어 시설은 내성·중성·외성의 3중성으로 둘러쳐 진도의 용장산성보다 훨씬 강화된 느낌을 준다. 이것은 삼별초가 진도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주의 방어 시설 설치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축성 작업에 동원된 제주민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항파두리토성+항몽순의비), (삼별초의 강화->진도->제주 이동 경로 및 여몽연합군의 진격로, 역사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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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272년부터는 맹활동을 전개해 자주 본토를 공격하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요지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 해 11월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 지금의 경기도 부천)를 공격해 부사와 그 처를 납치했고, 또 합포에서 전함 20척을 불태웠다. 남도의 세공(稅貢)을 해상에서 약탈해 조운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와 같이, 삼별초는 최후까지 선전분투했으나 기울어진 대세는 어찌할 수 없었다. 원나라 세조(世祖)는 일본 정벌의 기지로서 탐라를 중요시해 1272년 8월 사신을 보내 탐라공략에 대한 적극책을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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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홍다구는 김통정에게 선무 공작을 폈으나 성과가 없자, 1273년 2월 김방경·흔도·홍다구의 연합군은 다시 탐라를 공격해 삼별초를 평정하였다. 이 때 연합군은 병선 160척, 수륙군(水陸軍) 1만인(고려군 6천인, 몽고군 2천인, 한군 2천인)이었다. 4월 수령 김통정은 산중으로 피신했다가 죽고, 여당 1,300여 인은 포로가 되었다. 이리하여 삼별초의 반란은 약 3년 만에 진압되었다.

고려 후기 제주의 삼별초 항쟁을 이끈 장수로서 1271년(원종 12) 5월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도의 삼별초는 토벌되고 배중손이 전사하자 이에 김통정이 삼별초의 우두머리 장수가 되어 남은 병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갔다. 김통정은 최후의 항몽 거점이 되었던 항파두리 토성 등을 쌓고 재기를 꾀하여 한때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였다. 남해현에 있던 삼별초의 유존혁(劉存奕)이 군선 80여 척을 이끌고 제주에 상륙하여 김통정 부대와 합류하였다. 원나라와 고려는 김통정에게 조카 김찬(金贊)과 이소(李邵) 등을 보내 회유하였지만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카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이는 등 항몽을 포기하지 않았다. 1273년(원종 14) 4월, 160척의 배와 육군·해군 병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온 여몽연합군에 의해 항파두리 토성은 함락되었다. 그러나 김통정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70여 명을 이끌고 한라산으로 들어가 목매어 죽었다. 제주에는 항파두리와 함께 김통정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왔다. 제주에는 삼별초 군과 김통정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김통정을 다룬 전설이 곧 삼별초의 대몽 항쟁과 관계된 전설이기도 하다.

4. 삼별초 항쟁의 의의와 한계

삼별초가 고려·몽고 연합군의 우세한 병력의 공격에도 3년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삼별초가 매우 우수한 전투병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배후에 남도 각처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정부와 몽고군에 대해 투쟁하려는 굳은 결의가 민중 사회의 내부에 고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경상도 밀성군(密城郡)·청도군(淸道郡)의 농민들은 진도의 삼별초에 호응해 관헌을 습격하고 폭동을 일으켰다가 1271년 1월에 진압되기도 하였다. 또 같은 시기에 개경의 관노(官奴)들이 삼별초에 동조해 몽고의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정부 관료를 죽이고 진도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가 탄로되어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들은 당시 반정부·반몽적인 민중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들의 저항정신이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서로 동조하게 된 것은 삼별초 반란의 역사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고의 정책과, 조국의 예속화와 종속적 위치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의 행동에 반발, 항거한 병사들의 폭동이었다. 이것이 민중들의 동조와 지지를 얻어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연합군을 상대로 3년간 버틸 수 있었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