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류와 해양교류

해류와 해양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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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 해역

서남해역이란 남해서부의 해남을 포함한 화원반도 및 서해남부의 나주군도·목포·무안 일대를 비롯하여, 그 위로 군산 서부지역이 해당된다. 해남에서 목포에 이르는 해역은 리아스식 해안과 크고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물길이 매우 복잡하다. 또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역으로 조류의 흐름이 불규칙하다. 해류 역시 북동진하던 쿠로시오의 한 갈래가 다도해의 섬들에 걸려서 물길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다. 따라서 서남해역은 해양토착세력이 형성되고, 장기간 웅거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이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주목되는 해안은 만경강 하구, 영산강 하구, 섬진강 하구 유역이다. 영산강 하구는 한반도 남부에 있는 세력들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 열도를 오고가는 경우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해양교통의 길목이었다.

또 한반도 북부를 통해서 내려오는 길과 중국 강남에서 들어오는 길, 그리고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길, 한반도의 남부동안에서 오는 길,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오는 길, 이러한 모든 물길이 상호교차하면서 반드시 경유하는 거점이었다. 또 만경강 하구는 충남과 전북을 잇는 최대의 만(灣)으로, 내륙에서 비교적 빠른 시간에 바다로 연결될 수 있다. 즉 김제는 만 내부의 돌기처럼 솟은 작은 반도이며, 그 양쪽으로 수로가 형성되어 있다. 이런 입지적 조건은 대외교섭에 있어서 해양중계지 혹은 경유항로로 적합하였다. 따라서 만경강 하구는 고대 남북을 연결하는 항로의 중계지 역할은 물론 황해를 건너온 중국 남방문화가 유입하는 입구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서남해 지역은 중국지역의 산동성의 남부와 절강성, 그리고 일본열도가 만나는 일종의 삼각점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연결시키는 해양교통의 중요한 교차점이다. 이런 까닭에 선사시대이래로 해양과 관련한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고, 주변 국가와 교류한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한반도 서남해로를 통해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 백제시대에 동진의 마라난타가 해상을 통해 불교를 전래하였다는 곳이 영광 불갑사로 전해온다. 백제의 왕인박사는 영암 성기동에서 태어나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해주었으며, 통일신라기에 영암 출신인 도선국사는 중국으로 가서 수학한 이후 우리나라에 풍수지리를 처음 전래해온 고승으로 널리 알려졌다. 통일신라시대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난 최치원과 관련된 설화가 옥구지역에서 전해오고 있다. 또 이 시기 중국과 교역활동을 주도한 장보고가 완도 청해진을 무대로 해양을 통한 중국과 문물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중국과 사단항로의 개설로 다양한 해상교류가 이루어졌다.

바다를 통한 종교문화의 전래는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개화기에 금강하류를 통해 천주교가 수용되었고, 그 뒤를 이어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물론 전라도가 천주교의 초전지가 아닐지라도 해류를 통하여 포교되었다는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금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와 망성 포구 나바위에 천주교 성지를 조성하였으며, 군산 포구의 거북바위(구암)에 구암교회를 세우고 목포항 유달산 아래에 양동제일교회를 건립하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서남해안에 정착한 기독교는 근대학교와 현대식 병원을 세워 근대화를 가져오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시기 신종교는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또 원불교가 전남 영광 백수면에서 태동하여 법성포와 변산반도, 익산으로 전래되어 크게 융성하였다. 이렇듯 종교문화자원은 한국의 해양문화의 성격과 역사를 밝히는 요인이자, 서남해역의 문화적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문화자원이다.

남해 및 제주 해역

일본열도와의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남해안은 바다 속 여기 저기에 징검다리 같은 섬들이 바둑판에 놓인 바둑돌처럼 흩어져 있다. 일부에서는 다도해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고려 · 몽골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에 이키[壹岐] · 쓰시마[對馬島]는 그 첫 대상이 되었었다. 조선시대의 쓰시마는 한 · 일간의 징검다리 구실을 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교섭을 주선했었다. 남해는 조·일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로서 부산과 하카다[博多] 사이는 111해리,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 사이는 122해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 해류, 또는 계절풍을 이용하여 서로의 교통이 빈번했던 것이다. 그러한 증거로는 최근 기타규우슈[北九州] 지방에서 한국계의 석기가 발견된 것이나 한국계의 전설이나 풍속·언어 등이 발견되는 데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일본은 물론, 외국과의 교섭이 남해를 거쳐 이루어지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쓰시마해류를 따라 남해 방면과의 교섭도 유사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효종 때에 네덜란드의 하멜 일행이 탄 배가 난파되어 제주도에 상륙한 것도 이러한 예이다. 이리하여 제주도 및 본토 해안 지방에서는 일본 및 남양의 문화적 색채가 농후한 곳도 발견할 수 있다.

제주해안항로는 선박의 발달, 교통수단의 발달과 관계를 가지면서 변화해 왔다. 즉 제주와 주로 연결되던 한반도의 항구로는 목포와 여수에서 인천과 부산 등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한반도의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제주도와 가까운 항구로의 이동이 활발하게 되었다.

제주와 한반도와의 해역항로는 고려시대이전에는 하나의 국가로서 교역이 중심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진상, 유배, 군사이동 등이 내용이 있었다. 구한말 시대에 이르러 국제간 항로가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생활교통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최근에는 해역항로를 생활교통, 물류교통, 유배항로 등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로 생활교통 중심의 노선이 일반화되어 있다.

탐라국의 존재는 우리나라가 동아시아 해역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탐라국은 중국의 한(漢)·당(唐), 나아가 일본 등과 교역을 하면서도, 고구려·백제·신라·고려와의 강한 유대 속에 유지되어 왔다. 고구려·백제·신라, 나아가 고려는 탐라국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동아시아 해역을 그들 중심으로 경영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과 일본의 직접적인 교역을 중간에서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은 탐라국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 동아시아에서 탐라국이 지니는 위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그 어느 시기보다도 신라 하대에 동아시아 국제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장보고에게 있어서 제주도는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제주법화사가 장보고와 일정한 관련 속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해상무역로를 감안할 때 무리가 아니라 생각한다.

제주인의 무속(巫俗) 신앙은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주인 특유의 종교심성을 전승해 왔다. 그것은 탐라국 이래로 복합적인 종교적 관행 가운데서도 그 원형을 상실하지 않은 ‘뿌리의 신앙’이며, ‘고유한 체계를 가진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속 신앙은 한반도나 중국으로부터 표류 이동해 온 북방·남방 문화의 전파로(傳播路)를 따라 흘러 들어온 불교를 흡수하게 되었다.

동남 해역

북적도류에 기원을 둔 이 동남해역의 해류는 필리핀 르존도 부근에서 출발하여 대만과 오끼나와 열도 서단 이시가키섬 사이를 통해 동중국해에 들어와 대륙붕 사면을 따라 북동쪽으로 흘러 가고시마현 야쿠시마 서쪽 약 185km 부근에서 동 내지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도가라 해협을 통해 동해 연안으로 흘러가는 고온 고염한 대해류이다.

동남해안의 연안항로로 부산과 통영이 그 중심에 있다. 부산에서는 제주도, 거제도(고현, 옥포, 장승포) 및 중앙동과 태종대, 중앙동과 해운대를 잇는 6개의 항로가 있다. 부산 시내 를 오가는 항로가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또한 대외항로는 부산-대마도, 부산-후쿠오카, 부산-시모노세키 등을 연결하는 항로와 울산-고쿠라 항로가 있다. 한편 다도해에 위치한 통영은 주변의 여러 섬으로 연결하는 많은 항로를 가지고 있다.

국제항로로는 부산항에서 일본의 시모노세키, 후쿠오카, 하카다, 코베, 쓰시마(이즈하라), 히타카츠, 고쿠라 및 중국의 연태, 상해로 정기 운행되고 있다.
울산에서는 일본의 고쿠라로 연결되는 항로가 있다. 그러나 현재 운용되고 있는 항로뿐만 아니라, 훨씬 이른 시기부터 환동해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는 교역권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서 활발한 문자교역이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과의 항로는 일찍부터 동남해안에 존재하였음을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 연오랑세오녀조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영일 지역이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포구의 하나였음을 말해준다.
(三國遺事 紀異 第一) 또한 신라의 석탈해에 관한 전승에서도 탈해는 왜국(倭國)의 동북 1000리 되는 용성국(다파나국)에서 왔다고 하여 김해 및 경상도 해안지역이 일본열도와 해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三國遺事, 탈해왕조)

물류교류항로는 이른바 환동해문화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해를 중심으로 한 문화권이 이미 구석기 단계부터 성립되어 있었다. 신석기시대에 들면 일본의 흑요석 제품이 동삼동이나 연해주 등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이미 이른 시기의 물류항로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인적인 교류와 병행되었을 이러한 물자의 교류는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야요이시대라고 불리는 일본의 농경 및 청동기문화시대의 개막은 사실은 한반도 남부의 주민들이 농경 및 청동기 제조기술을 가지고 집단적으로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현재 남아있는 청동기의 성분분석을 해보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많은 청동제품이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원의 일본 침공 때 마산이 역시 정벌군을 출정시키는 전진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2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이 마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몽고정 등의 유적을 남긴 것도, 이 지역이 일본열도로 항해하는 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합포 등이 일본에 대한 개항장이었다. 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 동남해안에 많은 왜성이 축조되었고, 또 왜성이 축성된 곳이 전통적으로 일본열도와의 교역에 이용되었던 곳이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 크다. 즉 왜성은 일본군이 전쟁 물자를 열도로부터 조달하기 위한 하역포구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약탈한 물품과 사람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창구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전통시대에는 이처럼 동남해안의 포구는 해안방어거점, 어로 및 물류의 거점 등의 여러 측면이 통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 또한 해안을 통해 이동을 하였다.

창원 성주사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비 허씨가 일곱아들을 입산시켜 승려가 되게하였다는 전설이 서린 불모산 서북쪽 기슭에 있다. 이 절은 1천 1백여년 전 신라 흥덕왕때 무렴국사가 도력으로 왜구를 물리치자 왕이 국사로 삼고 논과 노비를 하사하고 성인이 상주한다는 뜻으로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한다. 그 역시 바다를 통한 이민족과의 접촉을 보여주는 역사다. 특이한 해양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로서 감은사는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다. 부근 동해바다에 문무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이 있어 이채롭다.

중국의 불교 4대성지의 하나인 보타산은 상해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곳에 있고 불긍거관음원은 보타산의 중심사원이다. 현지설명문은 그 유래를 일본승 혜악선사와 관련지어 설명하나 연구에 의하면 이는 신라문화재다. 산동반도와 주산열도는 한국과 일본으로 내왕하는 중국측 출발지로 산동 법화원과 보타산 관음전은 항해자들의 어려운 항해를 기원하는 항해사찰이었다.

서해 해역

서해 해류는 겨울철에 강한 북풍 또는 서풍 계열의 바람에 의해 연안에 남향류가 형성되고, 서해 중앙부에는 역풍류가 형성되어 대마난류의 일부가 북서쪽으로 침투하는 황해난류를 볼 수 있다. 여름철에는 바람이 미약하고 불규칙하여 지속적인 해류를 형성하지 못하여 연안수의 남하와 난류의 유입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석의 개황은 반일주조형이고, 일조부등은 적으나 조차가 크므로 약간 큰 조고의 부등을 볼 수 있다. 경기도 해역은 수심은 대체로 낮으나 풍도 주변이 가장 깊어 30~45m가 되는 비교적 넓은 해저층이 있다.

다음으로 충청도해역을 살펴본다. 충청해역도 출입이 심한 리아스식해안(rias coast)이며, 장항에서 아산만 사이에 이르는 여러 섬들과 크고 작은 만으로 이루어져 침수해안의 특색을 나타낸다.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강을 중심으로 군산 이남의 전라북도 해안은 새만금간척지 및 곰소만을 제외하면 북북동 방향의 직선해안을 나타내고 있으며, 급경사의 암반이 노출된 해안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충청해역은 해안선이 길고 불규칙한 해안으로 천수만과 가로림만이 발달해 있다. 특히, 경기도와 경계인 아산만은 한반도에서 내륙으로 가장 깊숙이 발달하고 있다.

대표적인 만으로는 아산만, 가로림만, 천수만, 비인만, 모산만, 장구만 등이다. 이들 만들은 후빙기의 해수면상승에 의한 해진(海進)에 의해 침수되어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태안반도 일대의 여러 만은 천수만에서와 같이 해진 이전에 구조선방향을 따라 차별침식에 의해 형성된 곡들이 침수되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태안반도에는 남북방향의 소반도와 만들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충청해역의 조석간만의 차는 서해안에서 큰 편으로 아산만에서는 평균 대조차가 8.5m에 달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조차의 변동에 따라서 해안선은 주기적으로 이동한다.

충청해역에서의 겨울철(2월) 표층 수온은 3~7℃로 연중 최저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해저부근인 수심 50 m에서의 수온은 5~9℃로 표층보다 2℃ 낮았다. 표층과 해저부근 모두 외해역쪽으로 갈수록 고온이었으나, 온도차이는 2~3℃로 적었다. 봄철(4월)에는 표층수온이 겨울철보다 약 2℃ 상승하여 5~9℃였으나, 수심 50m에서는 겨울과 거의 같은 4~7℃의 분포를 나타내었다. 여름철(8월) 표층수온은 22~27℃로 연중 최고치를 나타냈으며, 외해역쪽이 수온이 높았다. 가을철(10월)에 표층수온은 약 19℃로 황해 전체가 균일한 분포를 나타내고 있었다.

경기지역 대외교류의 자연적 조건과 선사시대의 대외교류를 다루었다. 한반도 서안의 연안항로를 이용하고자 할 때 경기만은 교역 등 해양교통의 길목이었다. 한반도 북부를 통해서 내려오는 길과 중국 강남(江南)에서 들어오는 길, 그리고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길, 한반도의 남부동안(南部東岸)에서 오는 길,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오는 길, 이러한 모든 물길이 상호교차하면서 반드시 거쳐야할 곳이 바로 경기만이었다. 특히 강화만은 경기만 가운데서 최대의 만이고 핵심지역으로 해양지리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경기만을 통한 해양활동은 선사시대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경기만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적 특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