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관방체제와 민속

해양 관방체제와 민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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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봉수체제

우리나라의 동남해 연안과 도서 각 곳 즉, 경상도 해안의 관방(關防)은 대부분이 일본을 상대로 하고 있다. 신라가 이 지역을 통합하기 전에 허황후(許皇后)처럼 예외적인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구세력이 도래하기 시작하는 조선 말기까지 이 해안과 해상을 무대로 발생한 사건들은 거의 모두 일본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해역의 해방관련 문화자산들은 대부분 일본과 무관하지 않다. 동남해역의 연안과 도서비장에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성터는 모두 104곳인데, 남해안(하동 · 부산)에 72곳이 있어 약 70%가 남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동해안에 비해 남해안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또한 많은 섬도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것은 그만큼 왜구가 숨을 곳이 남해안에 많으며, 육지와 격리되어 있느 ㄴ섬에서는 왜구침입사실의 전파가 쉽지 않았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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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항해하는 선박들이 자연스럽게 도착하는 곳이 부산과 거제도 사이의 지역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많은 왜성(矮城)이 상당수 이 지역에 있다. 왜성이란 임진·정유재란(1592~1598)때 한반도를 침략한 히데요시의 군대가 한반도에 일본식 축성 기술로 쌓은 성곽군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부산과 평양간에 보급·연락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쌓은 10여 곳의 연계성(繫ぎの城 또는 傳いの城)과 각부대의 주둔지에 왜성이 20여 곳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임시적인 방편으로 급조한 것으로 그 유구는 현재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어 그 소재와 규모 등을 확인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관방상의 연유로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조선 전체의 수영 중에서 경상좌수영과 경상우수영 휘하에 가장 큰 병력을 배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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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이 해역의 연안과 도서에 설치된 봉수는 제2거(第二炬 : 東萊-漢陽)에 해당하였다. 이 봉로(烽路)는 총 5개 봉로 중에서 제1거(慶興-漢陽) 다음으로 많은 봉수대로 구성되었다. 직봉(直烽) 44개와 간봉(間烽) 110개로서 모두 154개의 봉수대가 이 지역에 있었다. 이 중에서 섬이나 해안지역의 봉수대는 대부분 초기봉수대(初起烽燧臺)이거나 내지봉수대(內地烽燧臺)에 연결하는 연안봉수(沿岸烽燧)에 해당한다. 현재 해방(海防)과 관련된 봉수대의 터 63곳이 동남해역에 남아있다. 이 봉수대의 터들은 이 해역의 동해안과 남해안에 거의 반씩 분포되어 있다(해양수산부 편, 『한국의 해양문화, -동남해안 上』, 해양수산부, 2002, p313)

경상좌수영과 좌수영어방놀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은 감만이포(戡蠻夷浦, 남구 감만동)에 있었으나, 조선 태종 때 울산 개운포(開雲浦)로 옮겨 갔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동래 남촌(수영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인조 13년(1636) 사천(絲川, 수영천)의 홍수로 선창의 수로가 매몰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자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다. 그러나 감만이포는 왜관과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 하여 1652년(효종 3)에 또다시 옛 터인 수영으로 옮겨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에 따른 군제개혁으로 수영이 혁파되기까지 243년간 현재의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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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수영에는 무관인 정3품의 경상좌도수군절도사(약칭 경상좌수사)가 주재하고 그 관하에는 1개의 첨사영(僉使營)이 있었으며, 낙동강의 동쪽에서 경주까지의 바다를 방어하는 총 책임을 맡고 있었다. 좌수영성을 최초로 쌓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으로 옮겼을 때는 벌써 성이 있었고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음을 고려한다면 1652년 경상좌수영을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후 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에는 동문(영일문, 迎日門), 서문(호소문, 虎嘯門), 남문(주작문, 朱雀門), 북문(공진문, 拱辰門)의 사대문이 있었으며, 이들 성문에는 각기 문루가 있었다.
성문은 일정한 시각에 폐문루(閉門樓)와 관해루(觀海樓)에 달아둔 북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열고 닫았다.

좌수영성 축성공사에 동원된 인력 현황은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있는 성돌에 언양, 양산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부산 인근 각지의 백성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아랫부분의 큰 성곽돌을 보면 견고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고된 노역이었음도 짐작된다. 성문중 남문의 규모가 매우 크고, 동문, 서문, 북문이 각각 2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성내에는 4곳에 수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남문의 홍예석이 수영사적공원 내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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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수영의 주둔 수병들은 수영야류(중요무형문화재로 제43호)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수영야류는 수영지역의 서민들이 양반계층을 희롱하던 탈놀음이다.
현지에서는 야유를 야류로 부르며, ‘넓은 들판에서 노는 놀음’ 즉 들놀음은 ‘안놀음’ ‘자리판 놀음’에 대응되는 말이다. 구전에 따르면 수영야류는 약 200년 전에 좌수영 수사가 합천 초계의 대광대 무리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초청하여 공연하게 한 것을 군졸들이 따라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뒤 매년 음력 대보름에 산신제와 함께 거행되어 그 해의 만사형통을 빌었다.

수영은 수군의 본영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어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어방축제는 수군의 역사와 문화 재현 이외에 어업과 어촌 문화의 전통을 재현한다. 어민들은 고기를 많이 잡아야 하고 바다에 나아가서는 해난을 만나 생명을 잃는 일이 없어야 했다. 그래서 어촌에서는 어민들이 바다의 신에게 빌고 풍어를 기원하며 축하하는 놀이가 있었다. 어민들은 새해를 맞이하여 굿으로 풍어를 빌고 출어하기 전에 굿을 하고 놀이를 벌여 그 해의 해상안전과 풍요를 기원했다. 여기에 흥겨운 축제로서 어방놀이가 건전한 어촌의 축제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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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방축제 중 〈좌수영어방놀이〉 는 어부들이 그물로 고기를 잡으며 노래를 부르는 내용으로, 어로작업을 하면서 작업과정에 따른 앞소리, 뒷소리, 맞는 소리를 맞추어 가며 부른다. 어부들이 흥겹고 즐거울 때는 쾌지나칭칭나네와 같은 칭칭소리를 한다. 출어에 앞서 그물을 꼴 때는 내왕소리를 하고, 바다에서 친 후리그물을 끌어당길 때는 사리소리를 하며, 잡은 고기를 그물에서 풀어 내릴 때는 가래소리를 한다. 이러한 어업 노동요는 노동의 효율을 높이고 집단 노동시 행동통일을 위한 구령의 역할을 하며 노래를 부름으로써 즐겁게 노동할 수 있다. 또한 노래를 통하여 어로의 내용이나 어민들의 생각과 정서를 표현한다.

좌수영어방놀이에는 좌수영어방기, 풍어기, 봉황기 등을 사용하며 괭가리·징·장구·북의 민요가락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 부른다. 좌수영어방놀이는 어업 노동요와 풍어를 기뻐하는 어부, 여인들의 집단놀이가 종합된 축제이다. 좌수영어방놀이는 어민들의 대동단결과 새해의 풍어를 기원하면서 흥겹게 진행된다.(참고문헌 : 부산사이버박물관)

동해안 별신굿

동해안별신굿은 어민들의 풍어제적 성격을 띠고 있으나, 동제와 같이 마을의 안녕과 풍어 및 선원의 안전을 기원하는 마을 축제이다. 유교(儒敎)식 동제(洞祭)나 무격(巫覡)의 별신굿은 혈연을 초월하여 참여하는 제의적 사회적 통합기능을 가지는 것은 동일하지만, 별신굿은 무격들의 예능적 기능이 가미되어 동민(洞民)과 인근주민들을 동참케 하는 개방적인 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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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 별신굿도 경상남도 거제도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해안을 따라 이루어지던 마을의 공동제의이다. 부족국가시대의 다양한 제천의식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공동체적 신앙으로서 축제적 기능, 통합적 기능, 정치적 기능, 예술적 기능 등 우리 고유의 공동체적 신앙의 모습을 지켜오고 있으며 특히 예인들이 많던 지역적 특성에 의하여 다듬어지고 전승되었다.(해양수산부 편, 『한국의 해양문화, -동남해안 上』, 해양수산부, 2002, p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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