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명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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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교통의 요충지

제주도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7~8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편 제주도는 고대로부터 해상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중국과 일본, 동남아 지역을 왕래하던 선박들의 중도 기항지가 되었던 것이다.

제주도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와의 사이에 있는 남해권역에 있으므로 바다 속 여기 저기에 징검다리 같은 섬들이 바둑판에 놓인 바둑돌처럼 흩어져 있어 일부에서는 다도해를 이루고 있다. 고려·몽골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에 이키[壹岐]·쓰시마[對馬島]는 그 첫 대상이 되었었다. 조선시대의 쓰시마는 한·일간의 징검다리 구실을 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교섭을 주선했었다. 남해는 조·일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로서 부산과 하카다[博多] 사이는 111해리,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 사이는 122해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 해류, 또는 계절풍을 이용하여 서로의 교통이 빈번했던 것이다. 그 증거로는 최근 기타규우슈[北九州] 지방에서 한국계의 석기가 발견된 것이나 한국계의 전설이나 풍속·언어 등이 발견되는 데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주변 해역의 해류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즉, 제주도 주변해역에 출현하는 주요 해류나 수괴로는 쿠로시오해류로부터 분파된 난류계수(대마난류수)와 냉수계수(황해저층냉수) 그리고 연안계수(중국대륙연안수, 한국남해연안수)를 들 수 있다. 이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마난류로서 이 해류는 쿠로시오해류로부터 분파되어 큐슈 서쪽을 따라 북상하면서 일본 고오또(五島)와 제주도 사이를 통하여 대한해협 동·서수도를 지나 한국의 동해로 유입되는 중간적 성질을 갖는 해류이다.

한반도의 역사시대인 삼국시대에는 백제·고구려·신라와 각각 교역한 것으로 “삼국사기” 등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660)한 직후에는 바다 건너 일본과 중국 당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의 기록인 “당회요” 탐라국조에는 “탐라는 신라의 무주 해상에 있다. 섬 위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에 접하였는데, 북쪽으로 백제와는 (배를 타고) 5일을 갈만한 거리이다. 그 나라 왕의 성은 유리(儒李)이고 이름은 도라(都羅)인데, 성황(城隍)은 없고 다섯 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들의 집은 둥글게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었으며 호구는 8천 가량 된다. 활과 칼 및 방패와 창이 있으나 문기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 항상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고 용삭 원년 8월에는 조공 사신이 (당 나라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 당시 일본과는 오랫동안 양국간에 사신 왕래가 있었고, 백제의 부흥운동 때에는 일본과 함께 백강(白江, 현 錦江)전투에도 참가했다. 일본과의 교역도 이루어져서, 이 무렵 일본에 수출한 물품으로는 탐라방포(耽羅方脯, 耽羅脯)와 탐라복(耽羅鰒)이 있다.

탐라국의 존재는 우리나라가 동아시아 해역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탐라국은 중국의 한(漢)·당(唐), 나아가 일본 등과 교역을 하면서도, 고구려·백제·신라·고려와의 강한 유대 속에 유지되어 왔다. 고구려·백제·신라, 나아가 고려는 탐라국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동아시아 해역을 그들 중심으로 경영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과 일본의 직접적인 교역을 중간에서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은 탐라국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 동아시아에서 탐라국이 지니는 위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그 어느 시기보다도 신라 하대에 동아시아 국제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장보고에게 있어서 제주도는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제주 법화사가 장보고와 일정한 관련 속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해상무역로를 감안할 때 무리가 아니라 생각한다.

고인돌 문화의 전파와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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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역의 특성으로 인하여 고인돌 문화의 전파와 정착은 제주도가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지니는 여러 지역의 고인돌 문화와 교류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조사된 고인돌의 숫자는 200여 기를 넘지 못하지만 원래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고인돌의 재료가 되었던 현무암이 깨지기 쉬웠고, 고인돌이 위치한 곳은 대부분 마을이 들어선 곳과 중복되어 상당한 숫자가 훼손되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고인돌은 형식상 비탈면을 이용하여 매장시설의 일부가 지하에 존재하는 반지상형(半地上型)이 많은 편이다. 한반도 본토의 고인돌과는 형태상 다른 양식을 보이며, 덮개돌의 하부에 평평한 돌을 빙 둘러놓은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아 고고학계에서는 ‘위석식 고인돌’이라 하고 제주도 양식을 구분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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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한 민간신앙

고대의 항로를 따라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제주의 무속(巫俗) 신앙은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주인 특유의 종교심성을 전승해 왔다. 그것은 탐라국 이래로 복합적인 종교적 관행 가운데서도 그 원형을 상실하지 않은 ‘뿌리의 신앙’이며, ‘고유한 체계를 가진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속 신앙은 한반도나 중국으로부터 표류 이동해 온 북방·남방 문화의 전파로(傳播路)를 따라 흘러 들어온 불교를 흡수하게 되었다. 탐라가 고려에 예속되었을 때,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하고 있었지만, 무속 신앙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하였고, 탐라국 호국신사 광양당을 국사당으로 지정하여 오히려 무속을 국가 지배에 활용하였다. 때문에 국교로서의 불교와 민중 신앙으로서의 무교(巫敎)가 별 다른 마찰 없이 흡수되어 무속과 불교는 ‘당(堂) 오백, 절[寺] 오백’의 찬란한 무불합일의 신앙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오늘날 제주의 민중은 ‘당에도 가고 절에도 간다’는 종교 심리를 지니게 되었다. ‘당에도 가고 절에도 간다’는 말은 불교와 무속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며, 무속을 당에도 가고 절에도 갈 수 있는 ‘무교(巫敎)’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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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기

제주도 주변의 해류는 사람들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각국으로 표류되었던 기록이나 제주도로의 표류는 일상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제주도와 관련되는 대표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고영상 표류기(대안남표류) : 정동유(鄭東兪)의 주영편(書永編)에 제주백성 고영상이 표류이야기에 대한 내용이 기록이 나와 있다. 고영상 등 제주인 24명은 숙종 13년(1687)에 무역을 위해 제주를 출범하였다가 추자도 근해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를 하게 된다. 한 달 여를 표류하다가 安南國 回雁郡 明德府에 표착한다. 하지만 예전에 안남국 태자가 조선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이 있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錦衣佩玉부인의 배려로 죽음을 면하고 한 섬에서 거주하도록 허락을 받게 되고 그곳에서 살다가 국왕에게 송환요청을 하여 중국 상인 朱漢源과 船主 陳乾의 도움을 받아 숙종 14년(1688) 8월 7일 안남을 떠나 중국 영파부·普陀山 등을 거쳐 12월 15일 대정현에 귀환한다.

이 고영상의 표류기는 英祖 3년(1727) 丁未년에 역괸 李齊聃이 제주에서 고영상을 만나 안남에 표류한 전말을 듣고 다시 그것을 정동유가 옮겨 기록한 것이다. 이 고영상의 표퓨기는 肅宗實錄 肅宗 15년 2월 辛亥조에도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2. 제주인 유구 표류(대유구표류)

가. 김비의 등은 1477년(성종 8년) 2월 진상 귤을 수송하기 위하여 8명이 출발하였는데, 큰 바람을 만나 14일 동안 표류하다가, 겨우 유구국 윤이도에 표도하였다. 그들 중 5명은 도중에서 죽고, 3명만이 살아남아 일본의 상선편으로 일본을 경유하여 1479년(성종 10년) 6월에 귀환하였다. 그들은 왕명에 의하여 유구 풍토기를 지었다.

成宗實錄에는 成宗 10년 5월 16일조에, 宣慰使 李則이 馳啓하여 유구국 사신 上官人 新時羅, 副官人 三未三甫羅, 押物 要時羅·也而羅, 선주 皮古仇羅, 伴從人, 格人 등 219인과 제주 표류인 김비의·강무·이정 등의 세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염포에 도착한 내용과 표류자들의 표류 사실을 요약하여 기술하고 있다. 또한 成宗 한 달여 뒤인, 10년 6월 10일조에는 앞서의 기록보다 더 자세한 표류의 전말을 기록하고 있다. 이 표류기는 표류자들의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었다.
표류인 김비의·강무·이정 등은 진상품 운반의 책무를 띈 뱃사공들이었기에 漂海錄을 적을 만한 능력이 없었다. 이에 成宗이 弘文館에 명하여 표류의 전말을 써서 아뢰도록 기록하고 이것이 성종실록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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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장한철은 1770년(영조 46)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가다가 유구에 표류하였고, 반년 만에 귀환하면서 표해록을 지었다. 그는 1774년(영조 50) 문과에 급제하여 대정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張漢哲은 1770년(영조46) 12월 25일에 과거를 보기 위하여 배를 탔다가 표류하여 유구열도인 호산도에 표착하였다. 이듬해 1월 2일 안남 상선에 의하여 구조되었으나 안남세자가 제주에서 죽은 일 때문에 작은 배로 옮겨 타서 청산도를 지나 강진의 南塘浦를 지나 2월 3일 한양에 도착하여 과거에 낙방하고, 5월 8일 고향에 귀환한다. 반년만에 고향에 귀환한 후 장한철은 표해록을 지었다. 이 후 그는 1774년(영조 50)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정현감 등을 역임한다.
이 기록은 절반가량이 기억을 더듬어 새롭게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247~248, 김봉옥, 『증보 제주통사』, 2000. p137)

3. 유구인 제주 표류(대유구표류)

1809년(순조 9년) 유구국의 순견관 옹세황 등이 우도에 표도하였다. 그는 유구국의 섬들을 순시하다가 바람을 만나 표도하였다고 하므로, 배를 수리하여 주고 식량과 의복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 외에도 1801년(순조 원년) 대정현에 다른 나라 사람 5명이 표도하였다. 말이 통하지 않아 중국으로 이송하였지만, 그 곳에서도 모른다고 하여 되돌려왔다. 1809년(순조 9년)에 표도한 유구인에 의하여 비로소 필리핀 사람임을 알았으나, 송환할 길이 없었으므로, 이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4. 제주표인문답기

“濟州漂人問答記”는 순조 30년(1832)년에서 순조31년(1833) 사이에 동지사겸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 서경보(徐耕輔)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온 김경선(金景善)의 사행기록인 연원직지(燕轅直指) 권3의 “유환록(留館錄)” 상의 12월 25일조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순조 31년(1831) 11월 23일 제주사람 33인이 장사를 하러 본토에 가다가 유구국에 표류하여 26명만 생존한다. 이듬에 8월4일 중구의 조공을 위한 사행인·교역인들과 함께 8월 24일 방패포(邦覇浦)를 출발하여 9월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도착하고 12월 23일 황성에 도착한다는 내용이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252~253)

5. 백강전투(대일본교류)

백제의 부흥운동 때에는 탐라국에서도 군사를 파견하여 일본과 함께 백강(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싸웠다. 당시 부여풍은 사신을 고구려와 왜에 파견하여 구원군을 청해 당나라 군사를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왜의 구원병이 금강 어귀에서 신라, 당나라 군사에게 격파되자 부여풍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패전한 부여충승과 충지 형제는 할 수 없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탐라국 사신과 함께 항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때 탐라국의 사신도 함께 항복했다는 것은 당시 탐라국도 왜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부흥 운동에 참여했음을 뜻한다. 그 결과 유인궤는 신라와 백제, 탐라, 왜인의 네 나라 사신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본국으로 돌아가 태산에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었던 것이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33)

6. 사신왕래(대일본교류)

탐라국과 일본 사이에는 오랫동안 사신 왕래가 있었으며, 백제의 부흥운동 때에는 일본과 함께 백강(현 금강)전투에도 참가했다. 이 당시 일본과 교역도 이루어져서 탐라방포(耽羅方脯, 일명 耽羅脯)와 탐라복(耽羅鰒, 전복) 등의 물품을 일본에 수출하였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6)

7. 제주인 일본 표류(대일본표류)

가. 고려말 제주인이 일본에 표류했거나 일본인이 제주에 표착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고려사”에 의하면, 현종 20년(1029) 7월 28일에 탐라인 정일 등 일행 21명이 일본에서 돌아 왔다. 또한 덕종 원년(1031)에도 탐라인 8명이 표착했으므로 일본은 그 처치에 대해서 협의한 일이 있으며, 문종 32년(1078)
9월 1일에도 일본에서 탐라 표류민 고려 등 18명을 돌려보내었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28)

나. 정회이는 내섬시의 노비인데, 1499년(연산군 5년) 정월에 출륙하였다가, 큰 바람을 만나 일본의 여도 표류하였다. 그 곳의 도주(島主) 평순치(平脣治) 밑에서 1년 반을 묵다가 돌아와서, 그 동안에 보고 들은 바를 일본의 풍토기로 적었다.

『燕山君日記』에는 燕山君 5년(1499) 정월 에 정회이 일행이 일본 해변에 표착하여 烏叱島 島主인 平順治의 도움을 받아 연산군 6년 7월에 行狀을 받고 30일 薺浦에 도착하여 귀환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정회이 표류기는 김비 일행의 표류기와 마찬가지로 정회이가 표류에 대한 전말을 구술한 것을 예조에서 정리하여 왕에게 보고하는 내용의 기록이었다.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243~244)

다. 1815년(순조 15년) 12월 전 정의현감 이종덕이 교체되어 제주를 출발하였는데, 큰 바람을 만나 일본의 비전도에 표류하였다. 도주(島主)는 일행 36명을 잘 대우하고 이듬해 5월에 귀환시켰다.

8. 제주의 옛 명칭(대중국교류)

후한서에는 ‘섭라(涉羅)’, 북사나 수서의 ‘백제전(百濟傳)’엔 ‘탐(담)모라국(耽(聃)牟羅國)’, 신당서엔 ‘담라(담羅)’, 다른 국내외 사서에는 ‘탐부라(耽浮羅)’, ‘모라(毛羅)’, ‘탁라(托羅)’, ‘탁라(託羅)’, ‘둔라(屯羅)’ 등의 명칭으로 나타나 있다.

“당회요” 탐라국조에는 “탐라는 신라의 무주 해상에 있다. 섬 위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에 접하였는데, 북쪽으로 백제와는 배를 타고 5일을 갈만한 거리이다. 그 나라 왕의 성은 유리(儒李)이고 이름은 도라(都羅)인데, 성황(城隍)은 없고 다섯 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들의 집은 둥글게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었으며 호구는 8천 가량 된다. 활과 칼 및 방패와 창이 있으나 문기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 항상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고 용삭 원년(문무왕 1, 661) 8월에는 조공 사신이 당 나라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9. 제주인 중국 표류(대중국표류)

가. 송나라의 대학자이며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인 증공의 <원풍류고>에는 고려국 경계의 탁라 사람 최거 등이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천주(泉州) 지경에 이르렀는데, 마침 고기잡이 배를 만나 모두 구조되었다. 이후 그들은 고기잡이배를 따라 바다에 나가 해산물을 채취하여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그런데 뒤에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여, 명주에 가서 선편을 기다렸다가 귀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천주에서는 연로의 여비를 지급하고 사람을 딸려 보내어 그들을 명주로 호송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외에도 중국 송나라에 표류했던 경우를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탐라인이 중국에 표착하는 일일 종종 있었던 것은 제주도가 대만해협으로부터 구로시오가 북상하는 지점에 위치하였고, 또 쓰시마 해협에서 서쪽으로 꺾여 역전된 순환해류가 황해로 흐르므로 탐라인들이 탄 배가 북풍을 만났을 때, 이 회류를 타고 중국 쪽으로 흘러가거나 혹은 일단 남방으로 흘렀던 것이 다시 북상함에 따라 일본 등지에도 표착했던 것이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134~135)

나. 이섬 일행 표류기 :『成宗實錄』에는 成宗 14년 9월 丙申조에 참찬관 김종직이 李暹의 행록을 편찬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보다 앞선14년 8월 壬午조에 弘文館 直提學 김종직이 이섬의 행록을 따라 다시 그의 말을 뽑아서 글로 아뢰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표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濟州의 旌義縣監 이섬과 金孝반 등 47명은 성종 14년(1483) 봄에 표류하여 해상에서 밤낮 열흘을 떠나다니다가 中原 楊洲 지방에 이르렀고, 살아남은 이섬과 김효반 등 33명은 북경하고, 이를 千秋使 朴楗이 데리고 돌아온다.

이섬의 표해록은 『금남표해록』에도 여러 곳에 언급된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24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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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최부 금남표해록 : 최부(崔溥)는 1487년(성종 18년) 9월 경차관의 명을 받고 제주에 왔었다. 이듬해 윤 정월 3일에 부친의 부고(訃告)를 받고 경황없이 출발하였는데, 초란도에 이르러 강한 북풍을 만나 영파부에 표류하였다. 1488년(성종 19년) 6월에 북경을 경유하여 귀국하였고, 왕명을 받들어 그간의 표류과정을 표류기로 작성하였다.(출처 : 김봉옥, 『증보 제주통사』, 2000. p135~136)

라. 김기손 일행 표류기 : 『中宗實錄』에는, 中宗 29년(1534) 2월 20일 김기손·만주 등 12명이 진상물을 싣고 제주를 떠나 나주를 향하여 출륙하다가, 추자도 인근에서 표류하게 되었는데 10여일이 지난 윤2월 1일 중국 남경 땅 회안부 萬戶道에 표착하고 6월 14일 浙江을 지나 7월 26일 通州江에 도착하여 使臣 吳準을 만나 북경에 이른 뒤 귀국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김기손 일행의 표류기는 일행 중 萬珠라는 노복이 남경에서 겪은 일을 承政院에서 기록하여 임금께 올린 내용이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244~245)

마. 송경천은 1794년(정조 18년) 아들 의명·인명과 함께 진상물을 수송하다가 태풍을 만나 소주부에 표류하였다. 그들은 육로로 되돌아오다가, 송경천이 봉황성에서 죽었다. 아들 형제는 부친의 시체를 메고 혹은 업어서 제주에 귀환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들을 효자로 표창하였다.

바.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 : 연암 박지원이 正祖 21년(1797) 沔川郡守로 임명되어 謝恩次 입시했을 때 정조는 李邦翼의 표류사실을 설명하고 이를 문체의 변개적 의미에서 찬진하도록 명하고 있다. 연암은 이에 「書李邦翼事」를 지어 바치었다. 다음은 이방익 일행의 표류 내용이다.

正祖 20년(1796) 9월 21일 이방익 일행은 표류하기 시작하여 중국의 澎湖지방에 표착하고 臺灣府·福建·浙江·江南·山東·北京·遼陽을 거쳐 이듬해 윤6월에 귀국한다는 내용이다. 이방익은 후에 무과에 급제하여 守門將·宣傳官·全羅道中軍의 벼슬에 오른다.

이방익의 아버지인 李光彬도 이전에 일본 장기도에 표류했었던 적이 있기에 이와 같은 부자의 특이한 표류사실은 정조가 연암에게 표해록 저술의 한 소재로 제공하게 된 것이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249~250)

사. 승사록 : 최두찬의 승사록은 그가 寧波府 城市館에 있을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가 겪은 표해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최두찬 일행 50인은 순조 18년(1818) 4월 10일 제주 별도포를 출범하여 羅州에 있는 從姉縣에 표착한다. 그리고 그곳 영파부 성시관에 머물며 표류상황을 글로 적어 승사록이라고 하고 10월 2일 柵門에 도착하여 귀환하는 내용이다. (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250~251)

아. 탐라표해록(耽羅漂海錄) : 김광현(金光顯) 일행의 耽羅漂海錄은 朴思浩가 지은 心田槁에 수록되어 있다. 표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純祖 28년(1828) 9월 7일 제주사람 김광현 등 7인이 고기를 잡으러 추자도로 향했다가 10일에 큰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9일 만에 중국 南海 普陀山에 표착한다. 그 후 定海縣을 지나 육로와 수로를 거쳐 40여 곳을 지나 皇城에 도착하여 귀환한다는 내용이다.

이 김광현 일행의 표류사실은 박사호 뿐만 아니라 최두찬의 乘사錄에도 언급되는데, 당시 중국에 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고 한다.(출처 : 해양수산부, 『한국의 해양문화 5 : 제주해역』, 2002. p251~252)

자. 차귀도 김대건 신부 표류

김대건 신부는 1845년 4월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 제물포에서 상해로 떠났다가, 그로부터 5개월 후인 9월, 13명의 천주교도와 입국을 시도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 차귀도 해변에 표착했다고 한다. 그때 타고 온 라파엘호가 현재 김대건 표착기념관 복원되어 기념관 오른편에 서 있다. 이 젊은 신부는 그 다음해 동료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통로를 알아보다 체포되었고, 신앙의 뜻을 널리 펼쳐보기도 전에 25세란 젊은 나이로 참수되었다.

차. 교자 김기량 표류와 입교

함덕리 출신 어부였던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은 1855년 폭풍으로 표류하다 중국 광동 해역에서 구조되었다. 1857년 홍콩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조선 신학생에게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하게 되었다. 1858년 제주도에 돌아온 김기량은 전교 활동을 하였고 가족, 친척, 친구 등 20여 명을 입교시켰다. 그는 신앙생활 집단을 이끌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모진 박해를 받다가 순교하였다.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98년 김기량의 순교비가 세워졌다.(출처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http://jeju.grandculture.net)

10. 중국인 제주표류

가. 1652년(효종 3년)에 묘진실과 1667년(현종 8년) 임인관은 명나라의 유민으로서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우리 조정에서는 청나라가 트집 잡을 것을 염려하여 청으로 돌려보냈다.

나. 1692년(숙종 18년) 설자천은 3년 전 안남에 표류되었던 김대황을 데려온 자로서, 지난번 조정에서 베푼 은혜에 사은하기 위하여 왔노라고 하였지만, 조정에서는 사사로운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음을 알려 그대로 돌려보냈다.

11. 서양인의 제주표류

가. 벨테브레 표류 : 벨테브레(박연)은 조선 중기 제주에 표착하여 귀화한 네덜란드인으로 네덜란드 리프 지방에서 태어났다. 한국명은 박연, 중국식 이름은 호탄만(胡呑萬), 원명은 벨테브레(J.J.Weltevree)이다.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1626년(인조 4) 홀란디아(Hollandia)호 선원으로 출항하여 이듬해 우베르케르크호(Ouwerkerk)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으로 제주에 표착하였다. 1628년(인조 6) 9월에 동료 선원 히아베르츠(D.Gitsbertz), 피에테르츠(J.Pieterz)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히아베르츠와 피에테르츠와 함께 훈련도감에서 총포의 제작 및 조종에 종사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훈련도감 군사를 따라 출전하였는데, 이때 히아베르츠와 피에테르츠는 전사하였다. 1653년(효종 4) 8월 제주에 표착한 네덜란드의 하멜 일행의 통역을 하기 위해 제주에 파견되었다. 박연은 25년 동안이나 네덜란드어를 사용하지 않아 통역이 불가능하였으나 1개월 뒤에는 겨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하멜 일행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전라도 병영으로 이송되기까지 3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조선의 말과 풍속을 가르쳤다.

또한 자신이 견문한 동양 여러 나라의 풍물과 천기(天氣) 관측에 대하여 즐겨 이야기하고, 자주 선악과 화복의 이치를 말하여 도인과 같은 면모를 보였다.
개신교의 나라 네덜란드 출생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출처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http://jeju.grandculture.net)

나. 하멜표류기 : 하멜표류기(HAMEL漂流記)는 네덜란드인(和蘭人)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이 서양에 조선의 삶과 문화를 체험하고 진솔하게 기록한 최초의 문헌이다. 이 하멜은 1653년(효종 4년) 8월 15일 제주도에 표착하여 1666년(현종 7년) 9월 4일 전남 여수에서 탈출할 때까지 13년 28일간 조선에 억류 되었다. 이 하멜 표루기는 하멜이 조선을 탈출 후 임금을 지급 받기 위하여 「하멜일지」로 알려진 보고서를 작성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두 곳의 출판사에서 흥미위주의 『하멜표류기』를 작성하였다.(출처 : 국립제주박물관, 『濟州의 歷史와 文化』, 2001.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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