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과 왕건의 해전

견훤과 왕건의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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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과 견훤의 쟁패전 왕건의 전격적인 나주 점령은 견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큰 타격을 받은 세력은 능창을 중심으로 한 ‘도서 해양세력’이었다. 왕건에게는 이들의 도전을 꺾는 일이야말로 피해갈 수 없는 어려운 과업으로 다가왔다. 왕건과 견훤의 첫 격돌은 909년에 이루어졌다. 왕건이 해군을 이끌고 남하하던 중 염해현(鹽海縣=오늘날의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에 상륙하여 견훤이 중국 오월(吳越)에 파견한 후백제의 사신선을 나포한 것이 그것이다. 불의의 일격을 가함으로써 후백제의 기선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던 것이다. 왕건이 다음 공략의 타깃으로 삼은 것은 ‘도서 해양세력’이었다. 먼저 서남해지역의 중심 도서 중의 하나인 진도군을 함락시키고, 영산강하구의 압해도 인근에 있는 작은 섬인 고이도를 위복시켰다. 이로써 왕건의 서남해지역에 대한 장악력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그럴수록 견훤과 능창의 저항은 더욱 거세어 갔다. 912년경에 왕건이 다시 서남해 공략에 나섰을 때, 견훤은 후백제의 해군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견훤은 직접 진두지휘하여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는 영산강 하구에 배치함으로써 견훤이 나주세력과 연결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난관에 봉착한 왕건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책을 써서 견훤의 전함을 거의 전소시키고 후백제군 500여급을 목베는 완승을 거두었다. 견훤은 작은 배에 갈아타고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고 하니, 제갈공명의 저 유명한 적벽대전을 연상케 하는 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 전투야말로 ‘덕진포대전’이라 불려 마땅할 듯하다. ?고려사?에서는 이 해전의 의의에 대하여 ˝이로써 삼한 땅의 태반을 궁예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덕진포대전의 대승으로 나주세력과 합류한 왕건의 해군은 다시 돌아가는 도중에 능창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능창을 생포함으로써 예상과는 달리 싱겁게 마무리되고 만다. 파군천(破軍川)의 전설 『고려사』의 기사에 의거하여 기술한 왕건과 견훤의 쟁패전 이야기는 왕건의 일방적이고도 싱거운 승리로 일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영산강 하구의 무안군 몽탄면에 전해오는 파군교의 전설은 이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포함한다. 그 전설의 내용은 대개 이러하다. ‘왕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산강변에 진을 쳤는데, 견훤군이 사방을 에워싸고 공격을 가해왔다. 왕건은 포위망을 뚫으려 했지만 마침 바다의 밀물이 밀려들어 강물이 범람하는지라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마침 밤이 되어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왕건이 잠시 조는 사이에 백발노인이 꿈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지금 강물이 빠졌으니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몽탄의 청룡리에 진을 치고 매복해 있으라. 그러면 견훤군이 뒤쫓아 올 것이니 그를 치면 장군이 크게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잠에서 깬 왕건은 그 노인의 말대로 하여 과연 대승리를 거두었다. ‘꿈의 여울’이란 의미의 몽탄(夢灘)이란 지명과 ‘군대를 격파한 천’이라는 의미의 파군천(破軍川)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연원한다.‘ 이 전설은 아마도 ‘덕진포대전’의 사실(史實)에 부회되어 지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때 왕건이 견훤군에 포위되어 몰살의 위기에 쳐하기도 했다는 숨은 이야기와 함께 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이 전설을 지은이는 아마도 서남해지역의 민중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전에 자신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왕건의 통일 대업도 불가능하였으리라는 점을 자부하는 한편, 왕건을 향해 그것을 잊지 말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이 전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꿈속의 백발노인이란 그들의 염원을 담보하는 ‘서남해 그리고 영산강의 신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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