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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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의 개요

1. 등대의 정의와 기능

등대란 해안에서 수심이 얕은 곳이나 육지 쪽으로 망루를 세우고 불을 밝혀 항해에 도움이 되도록 만든 건조물이다. 선박이 안전한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항상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박의 위치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연안을 항해할 때나 출·입항을 할 때에는 육상의 뚜렷한 목표 예를 들면 섬, 곶, 산봉우리 등을 이용하지만 뚜렷한 목표가 없는 곳이나 야간에 항행할 때에는 이들 자연목표만으로는 만족스러운 선박의 위치 확인이 곤란하다. 특히 대양에서 연안으로 접근하거나 항만에 이르는 좁은 접근수로 및 항내에서는 침로를 변침하거나 위험한 암초, 천소 등 자연적 위험물과 침선 및 각종 해상공작물 등의 인위적인 장해물이 있는 장소나 야간, 무중 또는 강설, 폭우 중 항해시 정확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항로표지란 선박의 위치를 결정하고 변침 등의 조건을 보조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시설로써 등화, 형상, 도색, 음향, 전파 등의 수단에 의하여 특색 있는 기능을 부여 설치. 관리하는 것이다.

해상 물동량 증가에 따라 오늘날 세계 각 국은 경쟁적으로 선박을 확충하고 있으며 선형을 대형화, 고속화, 자동화하는 등 해상 교통질서와 관련하여 항로표지의 주변 여건이 급격히 변화되고 있으므로 항해하는 선박에게 항로표지의 중요성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선박이 항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여 안전하고 경제적인 항로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운항을 도모하는 것이다. 등대는 항로표지의 일종으로 유인, 무인 등대가 있으며 야간에 등화로서 선박에게 목표물을 제공하고 항로 또는 위험위치를 표시하기 위하여 강력한 등광을 설비한 탑 모양의 구조물이다.
기능에 따라 연안표지(沿岸標識), 항양표지(航洋標識), 육지초인표지 등이 있다.

2. 등대의 기원 : 파로스 등대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던 1㎞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세계의 모든 등대의 원조격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

예로부터 지중해 사람들은 선원들을 인도할 수 있는 거대한 기념물을 항구에 세웠다. 주로 엄청난 규모의 거상이나 먼 곳에서도 보이는 신전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그러한 건물이나 거상이 항해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배들이 낮에만 도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밤에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선박들의 선원이 항구를 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2백80년경에 파로스 섬에 고대 역사상 가장 높은 등대를 건설하게 된 요인이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 된 등대의 높이가 120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다. 오늘날의 등대처럼 가늘고 둥근 모습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빌딩처럼 지어졌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져서 맨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다. 그 둥근 모형 안에 거대한 화로가 장치되어 밤에는 내내 불을 피웠다. 땔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램프 뒤에는 거대한 반사용 거울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한다. 파로스 등대는 단순한 항해의 표시였던 것은 아니었고, 등대 내부에는 300개 이상의 방이 있어서 많은 수의 군인들이 묵었고 따라서 성곽의 역할까지 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있다. 등대는 높이가 상당했는데도 꼭대기까지 연결하는 계단이 없었으며 나선형으로 비스듬하게 길을 만들어 말들이 다닐 정도였고 등대 꼭대기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이시스 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아랍인들이 7세기에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이 등대는 빛이 너무 밝아 반사경의 불빛이 55킬로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었으며, 맑게 개인 날에는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의 거리 모습이 거울에 비칠 정도였다. 이집트가 아랍인에 의해 점령을 당하고도 상당 기간 동안 이 등대는 잘 보존이 되었다. 그러나 850년 경 신성로마 제국과 이슬람교도간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파로스 등대는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파로스 등대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아주 유리했으나 로마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즉 로마군의 상황이 이 등대의 거울에 의해 낱낱이 관찰당한 것이었다. 로마 황제는 싸움이 이처럼 불리하자 알렉산드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칼리프(회교도의 왕)에게 첩자를 보내, 등대 밑에 엄청난 금은보화가 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칼리프는 즉시 등대 밑을 팠다. 그러나 적의 계략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반사경이 깨진 상태였고 다시 원상태로 회복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파로스 등대는 이때부터 등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신 파로스 등대는 이슬람교의 사원으로 전락을 해버렸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는 카이로가 번창함에 따라 점점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등대는 폐허가 되어 버렸다. 1375년 삼각주를 휩쓴 엄청난 대지진으로 파로스 등대는 그나마 모습마저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지진은 후유증이 커서 지진 지역을 정리하는 데만 약 100년이 걸렸다고 한다. 등대의 흔적이 없어지자 자연히 사람들의 입에서도 파로스 등대 이야기는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묻혀 지내던 파로스 등대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고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겨우 등대가 있던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3. 등대에 사용되는 건축자재

등대는 20세기 들어 콘크리트와 강철이 사용되기 전까지 벽돌로 지어졌다.
라디오 방송탑과 비슷한 형태인 최근의 등대는 이전부터 사용해온 견고한 기둥 대신 강철 골조를 이용해서 건조되었다.

4. 등대의 유형

공해에 세워진 등대는 설치방법에 따라 크게 3가지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속이 빈 강철기둥 케이슨을 해저에 박고 그 속에 콘크리트를 채운 뒤, 그 위에 등대를 세우는 방식이다. 둘째, 콘크리트 기초물을 해저에 가라앉힌 다음 그곳에 등대의 망루를 고정시키는 방식이다. 셋째, 바다의 유정(油井)과 비슷한 형태로 해저에 몇 개의 강철 말뚝을 박아 넣어 커다란 갑판을 받치게 하고, 그 갑판 위에 망루를 세우는 방식이다(브리태니커 사전 참고).

또 다르게 나누어보았을 때 등대는 크게 항해용 일반 등대와 항공기용 항공 등대가 있다. 야간에 강렬한 등불 빛을 발하여 선박 또는 항공기에 육지의 소재, 원근(遠近), 위험한 곳 등을 명시해 준다. 항해용 등대는 섬 ·곶 ·암초 ·여울, 항만의 출입구 등에 설치되며, 주간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탑 모양으로 건조되고 흰색 ·주황색 ·검은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등대관리인의 유무에 따라 유인등대와 무인등대, 또 암초와 같은 곳에 설치되는 소규모의 것을 등표(燈標), 기둥 모양의 것을 등주(燈柱)라 하여 구별한다.

안개가 많은 곳에 있는 등대에는 안개가 발생하였을 때 소리를 내는 안개신호소가 부설된다. 항공등대는 항공로에 가까운 산꼭대기 ·공항 부근에 설치되는데 항해용 등대보다 광력(光力)이 강하며, 항해용으로도 이용된다.

렌즈의 초점거리와 등대의 해면으로부터의 높이에 따라 1~6등 및 무등의 7등급으로 구분한다. 외양(外洋)에서 접근하는 주요 지점이나 안개가 많은 장소에는 1~2등, 연안이나 내해의 주요지점에는 3~5등, 항만에는 6등이나 무등이 설치된다.

등대 광원

1. 시기별 등대 광원의 종류

16세기부터 등대의 불을 밝히는 데 석탄을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이집트 파로스 섬의 등대가 세워지면서부터 19세기까지는 계속해서 나무·양초·기름 등으로 불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 연료는 연소과정에서 연기가 발생해 바람이나 물로부터 불을 보호하기 위해 끼워 놓은 유리창에 금방 그을음을 만들었다. 따라서 18세기 후반 물고기·식물·광물 등에서 추출한 기름으로 연기가 나지 않는 기름등을 발명한 것은 혁명적인 발전이었다. 무연 기름등은 빛이 보다 선명하고 뚜렷했을 뿐만 아니라, 렌즈와 금속 반사경으로 빛의 밝기와 범위를 늘릴 수도 있었다. 19세기 무렵에는 프리즘 렌즈와 반사경을 이용해서 기름등의 약한 불빛을 한 점으로 모아, 오늘날 자동차 전조등에 못지않은 강한 빛을 내게 했다. 한편, 이처럼 빛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이용하게 되면서 램프를 회전시켜야 할 필요가 발생해, 지금은 널리 보편화되어 있는 회전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등유와 아세틸렌가스를 사용하는 등이 개발되었는데, 특히 아세틸렌 가스등은 조작이 쉽고 내구력이 강해 지금까지도 일부 등대에서 사용되고 있다. 회전등이 개발된 초기에는 등을 회전시키는 발동기에 커다란 괘종시계 모양의 구동 스프링이 달려 있었으나, 나중에는 연료로 쓰이던 아세틸렌가스를 이용해 발동기를 돌렸다.

1920년대에는 전기등 개발이 완성되어 곧 널리 일반화되었다. 당시의 전기등은 다른 어떤 등보다도 훨씬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아크등으로서, 1개가 무려 5억 촉광의 빛을 낼 수 있다. 또한, 렌즈와 반사경을 더욱 정제한 결과 비교적 작은 250W 전구로도 수십만 배의 촉광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사진기의 재생 플래시처럼 순간적으로 터지면서 아주 멀리서도 보일 만큼 강렬한 빛을 내는 크세논 플래시 진공관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날씨가 나빠 등대와 그 불빛이 잘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대신 소리를 이용해서 경고 신호를 전달했다. 소리 신호로는 수세기 동안 대포나 종이 이용되었고, 보다 최근에는 사이렌이나 경적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소리가 미칠 수 있는 범위는 기상 상태에 따라 크게 다르므로, 대다수의 등대에는 라디오 비컨과 함께 레이더 비컨을 설치해 배의 레이더를 증폭하거나 항행자가 식별할 수 있는 고유한 신호를 발사한다.

2. 우리나라 등대의 광원

우리나라에 들어온 양식등대에는, 등기의 형식은 다르더라도 유지를 연소시킨 화염을 광원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에는 가스 등기가 도입되어 가스 화염을 사용하였고, 새로이 아크 램프(arc lamp), 그 이후, 백열전구등의 전등이 채용되고, 동시에 등대의 성능도 점차 개선되어 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세틸렌가스는 전원을 얻을 수 없는 다수의 등부표 및 소형등대, 등표 등에 오랜 세월 동안, 광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왔다. 그러나 가스의 위험성, 취급 및 쇠통(bombe)교환 작업의 곤란성, 새로운 전원 시스템의 개발, 광도 증강의 필요성 등으로부터 급속히 전기화가 진행되어, 현재는 국내의 광파표지는 상용전력, 자체전력 등 전원의 종별은 달라도 전등이 사용되고 있다.

등대의 불빛에는 흰색·주황색·녹색이 사용되며, 배나 육지의 등화와 혼돈되지 않도록 고려되어 있다. 빛의 변화가 없는 부동등(不動燈)·명암등(明暗燈)은 수가 많지 않고, 섬광등(閃光燈)·군섬광등(群閃光燈)·호광등(互光燈)·섬호광등(閃互光燈)·군섬호광등(群閃互光燈)·명암호광등(明暗互光燈)·연성부동섬광등(聯成不動閃光燈) 등과 같이 빛이 반짝이는 것이 많다. 등대표·해도(海圖)에 기재된 등대의 광달거리(光達距離)란 등대에 접근하는 배에서 등대빛을 감지하기 시작하는 거리를 뜻하며, 시계(視界)가 보통일 경우 해면상 4.6m의 높이에서부터의 것이다. 광달거리가 80km나 되는 등대도 있다.

전등은, 도입된 초기의 것은 아크 램프였지만, 그 후는 오로지 자연전구가 쓰이게 되었다. 현재에도 자연전구가 주체인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동종의 할로겐 전구 등과 같은 실험식을 비롯하여, 형광 램프, 메탈핼라이드 램프, 크세논 램프, 수은 램프 등 여러 종이 등기에 활용되고 있다. 또한, 최근 외국에서는 발광 다이오드까지 이용되고 있으며, 지금도 아세틸렌, 프로판, 부탄 등의 가스를 연료로 하는 가스등을 사용하는 나라도 많다.

가. 백열전구

광파표지에 쓰는 백열전구는 일반 조명용과는 달리, 그 전구를 사용하는 광학기구와 짝지워졌을 때, 광학기구가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백열전구는 많은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필라멘트의 백열화-암화의 과정에 다소의 시간을 요하기 때문에, 전원의 단속에 의해 단시간에 대단히 많은 섬광을 발하는 리듬은 만들기 어렵다.

또, 광파표지는 그 광도를 일정 범위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필라멘트가 끊어지지 않더라도 규정된 시간을 사용한 후에는 새로운 것으로 교환된다.

나. 방전 램프 기타의 어원

대형등대로부터 등부표에 이르기까지 광원의 대부분은 자연전구가 차지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각종 수명이 길고, 고성능방전 램프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광파표지의 광원에도 점차 이들 램프 도입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현재 형광 램프, 크세논 램프, 고압, 저압 나트륨 램프, 고압수은 램프, 메탈핼라이드팬프 등이 있지만, 최근 외국에서는 발광 다이오드(LED)도 소형등대 등에 사용하고 있다.

1) 형광 램프

이 램프는 관벽에 형광 물질을 도포하여, 자외선을 가시광선으로 변환시켜 발광효율을 높인 것으로, 수명이 긴 것외에, 저휘도, 발광면적이 크고, 소비전력이 적은 특성을 갖고 있다. 발광색에 적색, 녹색이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도등의 광원에 이용되고 있다.

도등에는 그 이용구간의 장단에 따라 녹색 또는 적색의 20W, 혹은 40W 램프를 통상, 2개 또는 4개를 짝지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항해사가 등화에 접근하더라도 글레어(Glare)가 생기는 일이 없고, 발광면도 커서 시인, 식별이 용이하고 이용하기 쉽다.

2) 크세논 램프

크세논 가스중의 방전을 이용한 램프로, 대단히 높은 휘도의 빛을 발하는 외에, 단시간의 사이클로 점, 소등할 수가 있는 등 뛰어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발광의 스펙트럽 분포가 태양광에 근사하기 때문에, 야간, 등광이 대단히 희게 보인다. 현재 외국에서는 크세논 등기를 비롯하여 조사등, 고광도지향등 등의 등기의 광원에 쓰이고 있다.

3) 나트륨 램프

나트룸 증기중의 방전을 이용한 램프로 고압, 저압의 종류가 있다. 도로조명의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지만, 저압의 램프는 황색의 단색광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황색은 국제적으로 특수표지의 색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후 광파표지로서 이 램프의 사용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한편, 증기압을 높인 고압의 것은 저압과는 다른 분광분포를 가지고 있어 수은 램프와 함께 도로, 옥외조명 등에 쓰이고 있고, 제한적으로 광파표지용으로 검토될 수도 있다.

4) 발광 다이오드(LED)

발광에너지를 직접적으로 빛으로 변화하는 반도체소자로, 동작전압이 낮고, 발광의 응답속도가 빠르고, 소형, 수명이 길어 신뢰성이 높다는 등의 뛰어난 특성을 가져서 숫자표시소자, 파일럿 램프(pilot lamp)등으로 외국에서(등대광원용) 채용되었다. 그러나, 다른 광원과 같은 높은 광도는 얻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상용전력의 입수가 곤란하고, 또한, 근거리에서 이용하는 등대, 등표 등에 쓰이고 있다. 이 LED 소형전지, 음극흡수형축전지를 조합한 것은 장기간 무보수로 점등을 계속할 수 있다.

다. 광달거리

한국에서 가장 광달거리가 큰 등대는 오륙도등대 ·죽도등대 ·울기등대이며, 광학적 광달거리는 약 74km이다. 평균해면에서 203m의 높이인 해남곶(갑) 등대가 가장 높은 등대이다. 최근에는 각종 전파항로표지를 병설한 것이 많아 선박의 위치 측정에 공헌하고 있다. 예를 들면, 로란국(loran station) ·데카국(decca station) ·마이크로파비컨국(micro wave beacon station) ·중파비컨국(medium wave beacon station) ·하버레이더국(harbor radar station) 등이 병설되어 있다.

등대의 역사

1. 오늘날의 등대

지금도 등대는 항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레이더·로랜 등 다양한 항해설비들이 개발됨에 따라 그 역할이 크게 줄어들었다. 한편,
남아있는 등대들은 대부분이 완전히 자동화되어 등대지기나 등대 기술자의 인건비로 지출되는 비용이 크게 절감되었다. 컴퓨터화된 오늘날의 등대는 자체에서 날씨를 분석하여 필요에 따라 안개경보 경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장치를 가동시키며, 육지로 가상 정보를 보내기도 한다.

2. 서양 등대의 역사

기원 후 처음 몇 세기 동안 페니키아인과 로마인들은 흑해에서 영국에 이르는 지중해와 대서양의 해안을 따라 여러 곳에 등대를 세웠다.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로는 해상무역이나 여행이 거의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12세기에 이르러 무역이 부활할 때까지 유럽에서는 등대가 세워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등대를 다시 세우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들이었으며, 한자동맹 이후 스칸디나비아 해안과 독일 해안을 따라 많은 등대가 세워졌다. 16세기 말엽까지 유럽 해안 주변에는 30여 개의 등대가 세워졌다.

근대적인 등대의 역사는 18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에는 등대의 망루를 나무로 만들었으나, 목재 망루는 거센 폭풍에 무너져 휩쓸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마침내 1759년 영국에서 지반이 불안정한 에디스톤록스 모래사장에 최초로 벽돌 등대가 세워졌다. 토목기사 존 스미턴이 설계한 이 등대는 고전적인 쌍곡선 설계를 이용한 최초의 등대로 기록되어 있다. 스미턴의 혁신적인 설계가 성공을 거두자 잇달아 각지의 공해(公海)에 수많은 등대가 세워져 1820년경에는 전 세계적으로 주요등대가 약 250개에 달했다. 이것을 에디스톤 등대라고 한다.

3. 한국 등대의 역사

1876년에 이루어진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를 쇄국주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한 사건이었다. 이후 개항장을 드나드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은 이권을 먼저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용기를 얻은 일본은 개항장을 통하여 한일 양 국 간의 선박 왕래가 날이 갈수록 빈번해졌는데 한국 연해의 요소에 등대나 초표가 설치되지 않아 불편한 점이 많다며 등대건립을 촉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온다. 또한 등대건설위치선정을 위한 측량선의 인천 도착 날짜를 통보하니 협조원을 보내라는 독촉도 하였으며 각 항구에 출입하는 상선으로부터 징수하는 관세를 등대건설에 충용하라는 제의도 하였다. 또한 러시아 영국으로부터도 비슷한 요구가 있었다.

등대의 효용성을 알고 있었지만 극심한 재정난으로 난감해 오던 우리 정부는 결국 열강의 강권에 못 이겨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海關燈臺局)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北長子) 등대와 백암(白岩) 등표(燈標) 건설에 착수해 1903년 6월에 이를 각각 완공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등대의 효시이다. 결국 우리나라를 넘보던 열강들의 이양선(異樣船)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기 위한 바다의 이정표(里程標)로 등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 팔미도 등대가 세워졌다.

한국에서는 현대적인 등대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필요에 따라 해안가의 산이나 섬 등에 봉화를 피워 등대로 이용했다. 일본은 조선을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아, 1893년 6월 항로표지를 도입하였으며, 1895년 우리나라 전 해역에 걸쳐 등대 건설 지점을 조사하고, 그 건설에 주력하였다. 1902년 해안등대국이 설치되었고, 소월미도·팔미도·백암·북장자서 등에 등대건설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점등했다. 해방 직전까지의 우리나라 등대시설은 등대 32기, 등표 110기, 등부표 22기, 안개신호 18기, 무선전신 9기, 기상관측 23기였으나 태평양전쟁과 1950년 6·25전쟁 등으로 거의 파괴되어 1960년대 초까지는 그 복구사업에 진력하였다. 1962년 9월 국제등대협회(IALA)에 가입하였고, 국제 해상교통 체계에 의한 계획적인 등대건설을 시작하여, 현재 우리나라의 등대시설은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국제 수준의 시설을 확보하게 되었다. 1903년 점등을 시작한 장기갑등대(경상북도기념물 제39호)에는 1985년에 등대박물관을 건립하고 국내외의 등대관련자료 800여점을 전시하여 등대의 발전과정과 해양 개척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등대 14선(1-7)

1. 소청도 등대

소청도는 인천항에서 서북방 210km거리에 위치한 옹진군 대청면에 속해 있는 섬으로 멀리서 바라볼 때 울창한 산림이 검푸르고 이 검푸른 색깔이 마치 눈썹 색깔과 같다하여 이를 푸른섬(검푸른섬) 청도(靑島)라 불렀다 한다.

소청도의 서쪽 끝 83m 고지에 우뚝 서 있는 소청도등대는 서북해 일대와 중국 산둥반도, 만주 대련지방으로 항해하는 선박들의 바다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우리 민족의 암흑기였던 일제 강점기를 거쳐 8.15광복 후 오늘날까지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해상휴전선에 등불을 밝히며 남북한 어민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일익을 담당해 왔다.

소청도는 바다 건너 북한 옹진반도가 훤히 보이는 곳으로서 주민 대부분이 이북에서 피난 나와 거주하는 섬이다. 소청도 주변해안에는 자연산 전복, 해삼, 가리비, 성게, 홍합 등 수산물이 풍부한 곳이며 부근해역에서는 우럭, 광어, 놀래미, 갯장어 등 어족 자원이 풍부하고 섬에 민박시설 및 낚싯배가 있어 인천 또는 수도권의 유명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소청도등대는 서해 최북단에 위치하여 소청도 주민들이 자주 찾아오는 유일한 해양문화공간이며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나 낚시꾼에게는 소청도 제1의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인천지방해양항만청 사이트, ).

등대 본문 이미지 1

2. 팔미도 등대

팔미도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이다. 1901년 일본이 우리 정부와 체결한 ‘통상장정(通商章程)’에 “한국 정부는 통상 이후 각 항을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礁標)를 설치한다”고 한 조항을 들어 등대 건설을 강권함으로써 1903년 6월1일 팔미도 꼭대기(해발 71m)에 최초의 등대로 세워졌다. 소월미도 등대도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등대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팔미도 등대는 6·25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불을 밝힌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극심한 간만의 차 등 여러 악조건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영흥도를 중심으로 각종 첩보 활동을 펼쳤던 캘로 부대원들은 1950년 9월 10일 밤 발동선을 타고 들어가 팔미도 등대를 조사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북한군은 이 등대를 전혀 쓰지 않았는데, 조사해 보니 반사경의 전선이 끊어졌을 뿐 멀쩡하였다. 그들은 동경(東京) 유엔군 총사령부에 “필요하다면 등대를 켜 놓겠다”고 연락을 취했다. 동경에서는 “9월14일 밤 12시 정각에 등대를 밝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9월14일 밤, 그들은 팔미도에 잠입해 등대에 불을 밝혔다. 이로써 수백 척의 함정들이 등대를 길잡이 삼아 팔미도 해역에 집결했고, 다음날 새벽에는 곧바로 장관을 이루며 상륙 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서해바다를 100년간 지켜온 팔미도 등대는 문화재로 보존되어 2003년에 새로운 등대가 세워졌다. 해양수산부는 2002년 8월 등탑과 사무실이 같이 있는 연면적 187.5평 규모의 새 등대를 착공해 2003년 6월에 등대 100주년을 앞두고 완공할 계획하였다. 높이는 현재의 7.9m에서 23.6m로 높아졌고 광학적인 빛의 세기도 크게 강화돼 더 멀리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3. 옹도 등대

태안반도 안흥신항(신진도)에서 약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옹도는 그 모양이 마치 독(옹기)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섬 한가운데 정상에 등대가 있어 등대섬 이라고 불린다.

옹도는 그 면적이 0.17㎢이며 높이가 80m 정도인 무인도로써 봄이면 동백꽃이 장관을 이루고, 2백 년 쯤은 족히 되어 보이는 동백나무 군락이 산등성 오솔길을 따라 밀집되어 있으며 섬 정상부에 형성되어 있는 동백나무 숲이 밀림을 방불케 한다.

선박을 접안할 수 있는 동북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어 주변경관이 수려하고 산등성이에는 천남성이, 찔레꽃, 산벗나무 등의 자생식물들이 분포되어 있다.

옹도등대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로서 행정구역상 충청남도에 속하는 유인등대이며, 구한말인 1907년 1월에 세워졌다. 등탑은 높이가 14m이며 8각형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들어져 있으며, 등대의 불빛은 35~40km 거리에서도 육안 식별이 가능하며 주로 대산, 평택, 인천항을 입출항 하는 선박들이 서해안 항로를 따라 이곳을 거쳐 지나간다.

현재 옹도는 태안해안국립공원 내에 있어 해양문화자원으로의 잠재적 부가가치가 매우 높아 관할관청인 대산지방해양수산청에서 친 해양수산시설 문화공간을 조성, 일반 시민과 학생들의 삶의 휴식 공간 및 체험 학습 공간 제공을 위한 선착장 등 부대시설을 정비하고 있는 중이다(대산지방해양항만청 사이트, ).

4. 어청도 등대

전북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리에 위치한 어청도등대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3월에 대륙진출의 야망을 가진 일본의 정략적인 목적에 의해 건설된 등대로 군산항 및 우리나라 서해안의 남북항로를 통항하는 모든 선박이 이용하는 유인등대이다.

등대설치 초기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운영하여 오다가 해방 이후 미군정청해사부와 인천해무청에 소속되었으며, 1946년 11월 초대 등대장으로 이창호씨가 임명되어 등대를 관리하게 되었고 이후 1955년 2월 군산지방해무청으로 이관되어 현재까지 업무를 수행하여 오고 있다.

어청도등대의 등탑은 백원형콘크리트조로서 등대의 단조로움을 없애고 멋있는 등대 설계를 위하여 등탑상부를 전통 한옥의 서까래 형상을 재구성하여 조형미를 살리고 등탑 내부 가운데에는 수직으로 중추식 등명기를 회전시키기 위한 중추통로인 목재 트렁크가 설치되어 있고 주물로 만들어진 사다리는 2단 나선형으로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또한 설치 초기 철재로 제작된 등롱은 오랜 세월 바다를 지키는 동안에 해풍에 부식되어 2001년 12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이제는 새로운 등롱이 잉태하여 원래의 모습을 지닌 채 항해하는 선박에게 희망의 등불을 밝히고 있다. 등명기는 프리즘을 조합하여 만든 후레넬렌즈로 등대 건설 당시 렌즈를 제조하는 기술이 일본에는 없어 렌즈를 수은위에 띄워 중추를 이용 회전시키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잔스식 등명기를 설치하고 석유백열등을 사용하여 오다가, 1944년 4월 전등으로 변경 사용하여 왔다.

이후 1977년 8월 한양전자에서 제작한 610m/m등명기로 교체 사용하여 오다가 등명기 성능이 좋지 않아 1983년 12월 철거 보관하고 있던 중추식 등명기를 보수(부족부속품 격렬비도등명기철거품 사용) 설치하여 현재까지 사용하여 오고 있다.
(군산지방해양항만청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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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홍도 등대

홍도등대는 목포에서 약 116km, 대 흑산도에서 20km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목포항과 서해안의 남북항로를 이용하는 선박들의 뱃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홍도 등대의 건립과정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2월 대륙진출을 꿈꾸는 일본이 침략전쟁에 참여하는 자국함대의 안전항해를 위해서 설치하였다.

홍도등대의 불빛은 20초에 3번 반짝이며, 약 45km의 먼 곳에 있는 선박에까지 불빛을 전달한다. 등탑의 높이는 10m로 높지는 않으나 보통 원형으로 만들어진 다른 등대와 달리 사각형 콘크리트구조로 내부에는 상부로 올라가는 주물재 계단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홍도에는 향기가 10리까지 풍긴다는 대엽풍란 등 274종의 희귀식물과 230여종의 동물류가 서식하고 있어 1965년부터 섬 전역이 ‘천연기념물 제 1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기암괴석 틈새에 자생하고 있는 500여년 된 분재 소나무, 석화, 굴, 탑섭, 독립문 바위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쪽빛 바다에 어족자원도 풍부하며 흑산도 홍어가 많이 잡히는 곳이기도 하며, 해마다 많은(연 16만평) 관광객들이 아름다운 해상경관과 환상적인 낙조를 보기 위해 신비의 섬 홍도를 찾고 있다(인천지방해양항만청 사이트, ).

6. 마라도 등대

마라도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의 해도에 보면 제주도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마라도의 등대는 표기가 되어 있다고 한다. 1915년 3월에 아세리친 가스를 이용한 무인 등대로 처음 빛을 발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바다 사나이들의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아쉽게도 현재의 등탑은 예전 그대로가 아니다. 1987년 3월에 새로 개축하였으며 하얀색의 8각형 콘크리트 구조로 높이는 16미터이다. 기존 등탑은 낮고 좁았다.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는 말이다. 다만 돌담만큼은 예전 그대로이다. 마라도 등대의 등질은 10초에 한번 씩 깜빡이며 약 48킬로미터 거리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등대는 일본군에 의해 축조 되었으며 그동안 태풍피해를 입어 1987,3 새로 건설했다. 해방 이후 군인 집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1948년 4월 3일 서북청년단들에 의해 파괴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마라도·주민 라봉필이 그들을 설득시켜 화를 면했다고 한다.

마라도 등대 앞 공간에는 각 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등대를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아, 학생들의 교육·사진 촬영 등으로 기념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바로 앞으로 선인장 자생지가 있고, 무엇보다 절벽이 있어서 앞의 바다를 바라보는 풍광이 더욱 아름답다. 그리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멀리 산방산과 한라산이 보여서 최남단에서 바라보는 남다른 느낌을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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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우도 등대

제주 성산포항에서 북동쪽으로 약 3.8km 지점에 위치한 우도는 제주도 연안에 산재하는 부속 도서 중 가장 큰 섬이다. 섬의 형태가 소가 드러누워 머리를 내민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여 우도(牛島)라 불린다.

우도 등대는 2003년 12월 높이 16m 원형콘크리트조의 새로운 등탑 신축과 더불어 IT기술을 접목하여 국내기술로 개발한 대형 회전식 등명기를 설치 50km 밖에서도 확인할 수 있도록 광력을 증강시켰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등대를 테마로 한 등대공원을 조성하여 해양관광상품을 개발,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있으며, 홍보·전시실 및 항로표지 3D체험관과 세계7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파로스 등대등 우리나라 및 세계의 유명한 등대 모형 14점을 전시하여 관광객의 손과 마음을 바쁘고 즐겁게 한다.

우도는 산호가 부서져 형성된 하얀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산호해수욕장 등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우도8경’ 과 청정해역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또한 최근에 영화 ‘시월애’와 ‘인어공주’ ‘연리지’등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일본인 관광객 등 세인들의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인천지방해양항만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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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오륙도 등대

부산항 앞 바다에 가지런히 배열된 다섯 개의 바위섬! 부산항을 지키는 수호신인 오륙도이다. 오륙도는 부산만 북안 승두말로부터 남동방향으로 뻗어있는 기암절벽의 바위섬들을 말한다. 1972년 6월 26일 부산시 기념물 제 22호로 지정된 이곳은 부산의 대표적인 명물이기도 하다. 오륙도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5개 또는 6개 섬으로 보여 오륙도라는 이름이 유래됐다.

오륙도 바위섬에 등대가 개설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37년 11월이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고 나서 부산의 관문인 오륙도 앞으로 배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자 항구를 오가는 선박들의 길잡이가 필요해 등대가 세워졌다.

이 등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국제 항구인 부산항을 드나드는 각종 선박이 반드시 자나야 하기 때문에 오륙도와 더불어 부산항의 상징으로 통한다.
오륙도 등대는 당초 6.2m높이로 건립됐다. 그러나 등대가 너무 낡아 보수가 필요해 현상설계 공모를 통해 1998년 12월 웅장한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났으며, 등탑 높이를 27.5m로 높이고 등대 내부에는 우리나라 주요 등대를 살펴 볼 수 있는 사진 전시실을 갖췄으며 부산항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여기에 올라서면 활기찬 부산항의 모습과 아름다운 야경이 눈앞에 펼쳐진다(인천지방해양항만청, ).

9. 소매물도 등대

남해바다의 풍경과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통영은 경남 거제에서 전남 여수에 이르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다. 비취색을 띄는 청정해역에는 충절이 서린 호국의 성지인 한산도와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매물도가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한려수도 삼백리 물길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경남 통영은 비취빛 바다와 그 위에 떠있는 15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 그리고 배와 요트등이 연출하는 빼어난 풍광으로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기도 한다. 더욱이 맑은 자연과 함께 온화한 기후, 한산대첩의 역사적 문화유산에다 극작가 동랑 유치진과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미술가
김용주, 전혁림, 이한우, 김형근 등 걸출한 문화·예술인들이 태어난 문화 예술의 고장으로 곳곳에서 역사와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소매물도 등대는 일제 강점기때 일본의 필요에 의해서 1917년 무인등대로 건립되었으나, 1940년 유인등대로 전환되었다. 소매물도등대의 등탑은 콘크리트 구조이며 높이는 16m이다. 하얀색의 원형 등탑은 고풍스러울 뿐만 아니라 프리즘 렌즈를 사용한 대형 회전식 등명기를 이용해 약 48km거리까지 불빛을 비추며 남해안을 지나는 선박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배에서 내려서 등대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등대섬과 소매물도 본섬을 이어주는 작은 바닷길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공간이 나오는데 , 여기에서 소매물도쪽을 잘 보면 마치 공룡이 바다로 들어가는 형상을 불 수 있으며, 배편으로 등대섬 뒤를 돌아 소매물도로 나갈때에 등대와 기암괴석을 함께 배경으로 하면 꽤 훌륭하면서도 기이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소매물도는 또한 일출과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한여름이면 물놀이를 즐길 수 있고, 조금 깊은곳에서 스쿠버다이빙도 가능하다. 배를 타고 섬 전체를 돌아보는 것은 소매물도 여행의 백미이다. 불쑥 솟아오른 갯바위 사이로 부서지는 파도, 바다 안개가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소매물도를 찾는 관광객들중에선 이미 이곳의 정취를 느껴본 사람들이 많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때의 진한 감동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소매물도는 또한 어디랄 것도 없는 천혜의 갯바위 낚시터다. 봄여름에는 참돔, 농어, 볼락, 돌돔, 가을·겨울에는 삼치, 감성돔의 손맛을 불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소매물도는 통영항에서 정기 여객선으로 약 1시간정도 걸리며 하루 2회 주말 3회, 거제시 남부면 저구리 명사마을에서 하루 4회 왕복 운항하고 있다. 소매물도에서 내려서 등대섬까지 갔다 오는데 3시간이면 충분하다. 섬에서 혹시 1박을 할 경우라면 민박을 이용할 수 있고, 물을 비롯하여 먹을 거리를 준비해 가야 한다.
(인천지방해양항만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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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영도 등대

부산시 영도구 태종대에 위치한 영도 등대는 1906년 12월에 설치되어 지난 100여년 동안 부산항의 길목에서 영롱한 불빛을 밝혀왔으나 시설 노후로 2004년에 새로운 등대 시설물로 교체되어 부산지역의 해양관광 명소로 거듭났다.

새로 건립된 영도등대는 등대시설, 예술작품 전시실 그리고 자연사 박물과 등 3개동(연면적 720㎢)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대시설은 기존등대와 같이 백색의 원형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높이가 35m이며 불빛은 40km까지 나아간다. 전시실(see & sea)은 시민들과 방문객을 위해 미술작품을 소개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으며 자연사 박물관은 등대 바로 옆 신선바위 등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과 백악기 공룡서식지로 추측되는 이곳을 기념하는 공룡화석 등을 전시하고 있다.

영도등대에 오시면 등대와 바다, 천혜의 절경 그리고 덤으로 해양갤러리에서 미술작품도 감상할 수 있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친숙한 해양문화공간으로써 역할을 할 것이며 영도등대는 새천년의 빛을 밝히며 해양부국실현을 향한 힘찬 도약의 선봉장이 될 것이다
(인천지방해양항만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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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간절곶 등대

동북아 대륙에서 새천년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 해안을 따라 느린 경사의 언덕이 있고, 그 언덕에 그림 같은 등대가 서 있다. 그 앞에 남태평양으로 향하는 뱃길이 환하게 열려 있고, 무거운 집을 실은 거대한 화물선들은 울산항에 정박해 있다. 1920년 3월 처음 불을 밝힌 이래 80년을 하루같이 울산항을 드나드는 배들의 항로를 비추었던 간절곶등대는 국립 천문대와 새천년준비위원회가 “2000년 1월 1일 오전 7시 31분 26초” 새천년의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소를 공포함에 따라 유명해진 등대이다.

조용한 어촌마을이 해맞이 명소로 각광을 받으면서 등대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자, 이들을 위하여 탁 트인 동해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와 등대에 사용하였던 장비, 아름다운 등대사진, 등대의 역할을 설명하는 전시물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등대 홍보관을 마련해 놓고 있다. 주변에는 장승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등대와 키재기를 하고 있으며, ‘모녀상’, ‘어부상, ’거북이상‘ 등 석재 조각품과 ’도충‘, ’기둥‘, ’둘과 하나의 논리‘ 등 철재 조각품들이 곳곳에 세워져 색다른 해양문화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인천지방해양항만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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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울기 등대

태백산맥이 마지막 뻗어내려 그 끝머리가 깊숙이 방어진 반도에 꼬리를 감춘 곳,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해안의 절경을 이루고 있어 “제2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울산의 끝‘울기(蔚埼)’에 등대가 건립된 것은 1906년 3월 높이 6m의 백색8각형 등탑이 세워지면서 부터이다.

조선시대 말을 기르던 목장이었던 이곳에 러·일전쟁 이후 해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인공적으로 1만5천 그루의 해송림이 조성되었다. 그 후 등대 주변의 해송들이 자라 하늘을 감싸 안아 등대불이 보이지 않게 되자, 1987년 12월 기존 위치에서 50m를 옮겨 촛대 모양의 아름다운 등대를 새로 건립하여, 동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선박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대왕암공원 내에 등대가 위치하여, 등대로 가는 600m의 길섶에는 타래붓꽃, 수선화, 해당화, 해국 등 각종 야생화가 찾는 이를 반기며, 매년 4월이면 왕벚나무 터널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등대를 지나 계단을 내려서면 문무대왕의 호국영령이 서려 불그스름한 기운을 띤 대왕암이 청자빛 하늘과 코발트빛 바다를 그은 수평선 위로 살짝 돋아나면서 절경을 자아낸다.
(인천지방해양항만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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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호미곶 등대

한반도 최동단에 위치해 일출로 전국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호미곶(虎尾串)’이다. 16세기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는 한반도의 모양새가 호랑이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이라며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면서 이곳을 천하의 명당으로 꼽았다.

1901년(광무 5)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륙진출의 기반을 다질 즈음인 1901년 9월9일 일본수산실업전문대학 실습선이 대보 앞바다를 항해하다가 암초에 좌초되어 승선자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등대시설 공사를 하게 됐으며 1908년 12월 호미곶 등대가 건립되었다. 이 등대가 8각 연와조로 철근없이 벽돌로만 지어졌으며 내부는 6층이며 등탑 높이는 26.4m이다. 등탑 내 각층 천정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양인 ‘오얏꽃’이 새겨져 있고 출입문과 창문은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의 박공양식으로 장식돼 있다. 또 상부는 돔형 지붕 형태에 8각형 평면이 받치고 있으며 하부로 갈수록 점차 넓어진다. 등대의 불빛은 35km까지 전달된다. 1982년 경상북도 지방기념물(제39호)로 지정되었다.
(인천지방해양항만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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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독도 등대

바다 한복판에 두 기둥이 우뚝 서서 위풍당당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웅장한 모습의 독도! 거기에 우리의 바다를 비추는 독도등대가 서 있다. 독도는 망망대해 위에 깍아지른 바위 봉우리로 규모는 작지만 거제의 해금강이나 여수 백도 못지않게 독도의 풍광은 웅장하여 관광지로도 손색이 없으며, 코끼리를 닮은 독립문바위와 주변에 크고 작은 암봉, 가제바위와 탕건봉 등은 바다 한가운데 펼쳐진 기암 전시장처럼 보인다. 동도와 서도 두 섬 사이 수면 아래로는 자갈과 모래가 화하게 들어올 정도로 너무 맑다. 바다와 하늘과 조화를 이룬 독도의 자연 경관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을 방불케 한다.

이 섬은 해저 약 2000m에서 솟은 용암이 굳어져 형성된 화산섬으로, 약 460만 년 전부터 250만 년 전 사이에 형성되었다. 울릉도가 약 250만 년 전부터 생성된 것에 비해 약 200만년 앞선다. 독도등대는 독도 주변해역 조업어선의 안전을 위하야 1954년 8월에 무인등대로 최초 설치되었으며, 1998년 12월 광력을 증강하고 관리인이 상주하는 유인등대화 하였다. 현재의 독도등대는 백색원형콘크리트 구조로(높이 15m) 백색 불빛이 10초에 한번 깜박이며, 46km의 먼 곳까지 불빛을 전한다.
(인천지방해양항만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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