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 유적유물

의상대사 유적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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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사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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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사 전경 (12)
고산사 전경 (13)
고산사 전경 (14)
고산사 전경 (15)
고산사 전경 (16)
고산사 전경 (17)
고산사 전경 (18)

출처: 문화원형백과

지역 : 일본 교토 /고산사

일본 교토 고산사에는 일찍 의상대사와 선묘아가씨, 그리고 원효대사의 상을 그려 명신(明神)으로 모셨다.
명신이란 훌릉한 사람을 부처님처럼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한다.
고산사는 가마쿠라시대(1286) 명혜(明惠)스님이 증흥시킨 화엄종사찰이다.
지금도 고산사가 었는 도가노산 전체를 일본사적으로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하고 있다.
사찰 안에는 국보 7건 일반문화재 50개가 지정되어 있는 건물 이외에도 많은 문화재가 교토박물관과 도쿄박물관에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

국보로 지정된 (화엄연기회권(華嚴緣起滄卷)) 6권은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그 중 4권은 의상과 선묘 설화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고, 2권은 원효 의상의 행적을 담은 것이다.
이 그림은 어찌하여 그렸는지 그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1762년 고산사 승정이었던 일지오 스님이 쓴 보수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번 양대 경진의 진영을 유심(有深) 등의 지원에 의하여 받들어 보수했다.
후대를 위하여 기록한다."

일본 화엄종의 태두인 명혜가 무및 때문에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의 영정을 그려 모시고 또 선묘아가씨까지 섬기게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명혜스님은 명문귀족 출신이다.
8세에 그의 어머니가 병들어죽고 아버지는 당시일본의 최강자 요리모토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9세에 고산사 밑에 있는 신호사(新護寺)에 들어가 불도 수업을 받고 나라에 있는 일본 최대의 사찰 동대사에 들어가 공부, 학두(學頭)로써 화엄학을 강의하였다.

고아였던 명혜스님은 석가모니부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관세음보살을 어머니로 생각하며 오직 불도에만 전념했지만 당시 학승들은 출세와 명예를 위해 공부할 뿐 불교적 실천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직업적인 승려직을 탈출하기 위해 청정히 계율을 지키면서 수행에만 열심하였다.
그런데 고도바 상청께서 이 소식을 듣고 석수원을 명혜스님의 학문소로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로부터 명혜는 고산사를 중흥시켜 일본화엄의 종주가 되게 하였다.
청순무사(淸純無私)했던 일본 최고의 수행자 명혜스님은 진정한 불제자로 추앙 받았으며, 그 또한 석존에 대한 지극한 신앙이 오른쪽 귀를 조금씩 잘라 부처님께 육신공양을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나무 위에 앉아 좌선하면서 차를 마시며 공부하였기 때문에 일본 다도의 창시자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일본종교는 타락할대로 타락해 있었다.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출가해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이 2,3명의 여인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사찰은 음주가무의 연회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생각하면 한번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으면 끝이 나기 때문에 죽기 전에 한번 즐겨보자는 막가는 인생이 불러일으킨 사회풍조였다.
13세기 초 일본 교토의 조정과 가마쿠라 막부가 충돌하면서 보통 10만에서 20만 이상의 병졸들이 동원되었는데 1회 싸움에 만명 이만명이 희생되는 것은 예사적인 일이었다.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죽었다고 하지만 남아 있는 유족들이 살 수 없으므로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즐비하고 전쟁 미망인들은 밤거리의 여인들이 되어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하여 이때 명혜성인은 여인의 애끊는 사랑을 뿌리치고 구도일념으로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국을 전화의 불덩이에서 건져내고자 그의 사랑의 완성을 위해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의 몸을 받아 끝까지 불도를 완성하게 한 선묘아가씨를 구도전법의 모델로 삼아 화엄회권을 만들지 않았는가 추측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이같은 고백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도 여자와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나 몇번이나 일어나는 사랑의 불꽃을 삼매의 불로 꺼 흥분을 가라앉히고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육체적으로는 계를 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이미 파계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1219년 승구(承久)의 난 이후에 고산사 아래쪽에선 선묘니사(善妙尼寺)를 창건하여 전쟁 미망인들을 대거 교화 구제하였다고 한다.
현재 그 자리는 고웅(高雄)소학교가 들어서 철거되었으나 역사상에는 그 자취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동대사는 신라화엄이 수입된 최초의 화엄대학이었기 때문에 명혜상인을 의상대사의 교학을 의지하여 교수하였다고 한다."

1천년 일본 수도 가운데 700년 수도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명혜성인은 타락한 일본 스님들보다는 청정한 신라 스님들을 모델로 하여 일본 불교를 중흥코자 혼신했던 것이다.
신라의 심상(審祥)스님은 이곳에 와서 법화경에서 신라화엄을 강의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일본 화엄과 신라 화엄이 얼마나 친밀한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일본 교토 · 고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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