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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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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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불교1

서기전 4세기 말 희랍 알렉산더대왕이 서인도를 교란함으로써 공작왕조의 초조인전타라굴다왕이 일어나서 희랍의 세력을 물리치고 동시에 중인도 마갈다국의 왕위를 빼앗고, 다시 4방을 두루 정복한 결과 중·북·서의 3인도를 통일하여 일대제국을 건설했다.

그 후 그의 아들인 빈두사라왕이 그 부왕의 대업을 계승하여 국내를 통치하고 희랍 애급 등의 각국과 서로 교재를 맺고 동서 문명을 합유하여 문화적으로 많은 발달을 보았다.

아쇼카왕은 공작왕조의 제 3대로서 전타라굴다왕의 손자요, 빈두사라왕의 아들이다.

아쇼카왕은 즉위한지 9년에 전인도를 확실히 통일하기 위하여 남방의 강국인 칼링카(kalinga)국을 정벌하게 되었는데 그때 자그만치 10만이나 되는 전사자와 15만의포로 그리고 수많은 기아 병사자를 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왕은 전쟁에 그 전화의 참혹함을 크게 뉘우쳐 슬퍼함과 동시에 따뜻한 부처님의 자비문으로 귀의하여 다시는 전쟁을 행하지 않겠다고 결의하였다.

또 왕은 즉위직전에 왕의 형인 화수마를 대신들과 협력하여 죽였다고 하니, 만약 그렇다면 일가족간의 골육상쟁의 역사까지 있은 듯하다.
왕은 이러한 것이 모두 참회의 종자가 되어 신불하게 된 것이다

왕의 신앙은 그 뒤로부터 더욱 깊게 되어 즉위 11년에는 수계신남(受戒信男)이 되어서 바른 지혜를 얻고 즉위 12년경부터는 자주 자주 칙령을 내려 불교의 자비와 인애를 정치상에 실현하여 사형죄수를 석방하고 살생을 금하여 스스로 수령을 폐지하고 국민의 진상을 감하게 했다.

그리고 왕자 마힌다(Mahinda)와 왕녀 승가밀다를 출가시켜서 불법을 수확하여 널리 전도케 하고, 또 친히 여러 대덕고승을 초청하여 법을 듣고 많은 스님들에게 대 공양을 베풀었다.

또 즉위 13년에는 정법대관을 각지에 보내고, 18년에는 화씨성에서 제 3회 보전결집을 행하고, 그 이듬해에는 각국에 전도사를 파견하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왕이 스스로 불적을 순례하여 성지마다 기념비를 세우고 수많은 절과 탑을 건립하는 등 호법적 사업과 자선사업을 많이 행하여 일의전심으로 정법선포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정치를 황족과 대신들에게 맡기고 스스로 왕궁안에 은거하여 수도적 생활을 하면서 70세까지의 여생을 보냈다. 특히 왕의 보호하에 행한 불전결집에 대하여 말하면, 남전에는 불멸 후 2백년대에 이르러 제3회 결집이 아쇼카왕시에 행하여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북전에는 이것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양전에 전하는 내용 중에는 다같이 상호 관련된 사실이있으므로 제 3회 결집이 있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제 3결집은 제 1 제 2결집의 경우와 같이 불교도 전반의 대표가 모여서 결집한 것이 아니고 북전에 이 사실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단 몇파의 부파불교 사이에서만 행한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그런데 제 3결집의 특색은 제 1 제 2의 결집과 같은 불타의 인격중심인 계율주의에서 한걸음 나아가 교의중(敎意中)에서 불타를 구하려는 불신과 수도관의 적극적견해가 부연되어 부파분열의 감상을 지어준 것 같다. 어쨌든 이러한 아쇼카왕의 불교보호사업과 그의 전도사업은 여러가지 면에서 그 공적이 현저하므로 사가들은 왕을 기독교의 콘스탄틴 대제에 비하는데 왕은 실로 저 대제보다도 우월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제 화씨성에서 제 3회의 불전결집이 있게 된 사유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쇼카왕은 불교를 독신하여 많은 절과 탑(8만 4천의 사탑)을 건립하고, 매일 같이 다수의 스님들에게 공양재를 베풀기 때문에 승니수가 부쩍 늘어 화씨성 계원사와 같은 절에는 6만명의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외도의 무리들은 왕의 공양을 받기위하여 스님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스님들 가운데 섞여 있어서 범성이 잡거하여 진위를 가리기 어려웠고 스님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분쟁이 그치지 않아 포살을 행하지 못함이 7년에 미쳤다.
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화합을 권유했으나 듣지 않기 때문에 스님들을 참살한 일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목건련자제수라고 부르는 왕의 동생이 출가하여 고승대덕으로 있었는데 그도 이 분쟁을 꺼려하여 마유라국 부근의 아호항산에 있었다.

왕은 특사를 보내어 그를 청하고 교조의 좌정과 스님들의 화합을 도모하라고 위촉하였다.
제수는 왕명을 받들어 스님들 가운데서 1천명을 선출한 후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어서 불전결집을 행하였으니 때는 왕의 즉위 18년이었으며, 9개월에 걸쳐서 이 제 3회 결집을 종료하였다.

이와 같이 결집한 내용을 보건대 경·률·논 3장 전반에 걸쳐 결집을 행하고 또 제수는 자신의 불교의 논점을 들어서 이것을 설명하여 논사(論事)를 제작했다고 한다. 단 이 제 3회결집은 남방불교에만 전할뿐이요, 북방불교에는 전한 일이 없으며, 또는 결집내용도 분명치 않기 때문에 혹은 이르되 논부에 속한 것만 편집했을 뿐이고 불설에 대한 결집은 없었다고 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3회결집도 제 2회결집과 같은 불설결집의 설명은 제 1결집에 미루고 다만 그 특질만을 들었다고 보는 것이 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외가 잡거하고 범성이 혼채하여 분쟁을 계속했기 때문에 계법의 문란은 말할 것도 없으며 정리하기위하여 제 3회결집이 있게 된 것인즉 단지편집만 그쳤다고는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쇼카왕의 허다한 치적 가운데 불교를 위하여 공헌한 사업으로 특필할 것은 불전결집과, 또는 포교전도에 대한 정법대관 파견과 전도사 파송이라 하겠다.

전술한 바와 같이 왕은 칼링카를 정벌한 후 무력에 의한 승리가 너무 비참한 데 반하여 진정의 승리는 달마 즉 정법에 의한 승리에 있다는 것을 통감하고 이 정법의 승리를 실현키 위하여 화씨성 불전결집이 있기 전, 즉위 제 13년에 인도 각지에 정법대관을 파견하여 인류의 행복과 주민의 안녕을 보장했던 것 이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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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2

월씨국 귀상왕조의 제 3세대인 카니시카왕은 서력 2세기 초에 즉위했는데 그 후에 중인도로 진군하여 화씨성을 공락하고 안식국(安息國)과 그 다음 후한(後漢) 영토였던 소륵(疏勒)과 사거(莎車) 등지를 정벌했다.
그래서 왕은 왕도를 건타라국의 포루사 포라성에 정하고 또 카니시카성을 특히 가습미라국에 건설했다. 왕은 이렇게 원정을 행함과 동시에 선정을 국내에 폈다.

그러므로 간타라국은 동서 문화의 교차지가 되어서 특유한 간다라 문명을 산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건축 및 조각 등의 불교적 미술은 역사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은 특히 불교를 독실히 신봉했다고 하니,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은 서북인도를 평정하고 다시 동방 마갈타에나아가 중천축의 맹주인 화씨를 격파한 후 마침내 배상금으로 화씨왕에게 9억금을 요구하였던바 화씨왕은 9억금 대신 불교학자인 마명보살과 불발(佛沐)과 자심계(慕心鷄)로써 하나에 3억금씩 충당하겠다고 하므로 카니시카왕은 환희하여 이를 승낙했다고 한다.

카니시카왕의 부조시대에는 본시배화외도였는데 왕이 인도에 들어가면서부터 불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전기에 의하면 마명대사를 얻어가진 후 불교에 대한 신앙열이 더욱 고조되있다고 한다.

그 뒤에는 왕은 다수의 절과 탑을 건립했는데 수도 포루사포라이 건립한 탑은 높이가 40장이나 되어서 그 장엄한 것이 전인도에 제일이었다고 한다. 또는 매일같이 불교의 대덕을 초청하여 청법공양하고 불법을 보호하고 장려했으므로 그 영내에 불교가 크게 유포됨과 동시에 그 여세가 서역지방으로부터 중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또는 왕의 광대한 영토는 각종의 민족을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불교가 이 민족간에 전포되자 그 영향을 각 방면에 끼치게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각 지역에서 불교의 변천발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카니시카 왕은 불교제부파간에 있어서의 경논에 대한 이의를 통일코자 하여 협존자(駱尊者)와 상의한 결과 학식이 학월한 고승 5백인을 선출하여 제 4희 결집사업을 가습미라국 원림사에서 크게 거행했다. 그 결집장에는 세우(世友)를 선두로 하여 협존자, 법구(法球), 각천(覺天)등 유명한 아라한들이 집합하였는데 먼저 경장의 주석인 우파제사찐(Upadesa) 1만송과 율장의 주석인 비나야비파사(Vinava-Vibhasa) 10 만승과 논장의 주석인 아비달마비파사(Abhid-hatma-vidhas3)10만승을 합하여 30만송 6백 60만언의 대주석을 저술하였다.

이렇게 결집을 끝마치고 나서 왕은 이것을 동판에 새겨서 돌함에 넣어 보탑중에 봉안하고, 거기게 호위병을 두어서 탑밖에 유출되는 것과 이학도들의 출입을 절대 엄금했다. 그런데 이중 경율 2장의 주석은 일찍이 산실되었는지 오늘까지 전한 것이 없고 다만 논장의 주석인 아비달마대비파소론(Abhidharmamah3 Vibhass-ssstra) 2백권이 현존할 뿐인데, 그 내용은 대족론을 방의로 하고 가다연리자의 발지론을 세석하여 제부의 이의를 비판회통함과 동시에 유부의 교의를 대성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결집은 오직 북장소전에만 있고 남방소전에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로부터 뒤에 가습미라는 오래도록 소승유부의근거지가 되어서 북방제국에 그 교를 전했으니 소승교는 대개가 이 가습미라를 기원지로 했다고 본다.

저 중국소전의 소승교가 유독 가습미라의 유부종에만 한한 소이는 전혀 여기에 의한 것이니 이것은 크게 주목되는 점이다.

대체로 카니시카왕은 재위한지 30여년경에 무너졌었는데 그의 사후에도 그의 왕조는 오히려 수대를 계속하여 불교를 신봉하고 사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서기 2세기말에 바-수데바(Vasudeva)왕의 말년 또는 그의 사후에 이르러서는 결국 걸이다종(乞利多種) 때문에 왕위를 빼앗기게 되었으니 걸이다종은 맹렬히 배불운동을 행하여 절과 탑을 파괴하고 스님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그때에 도화라국(Juhnara) 설산상왕(Himmalaa)은 석가족 출신으로서 본시 신불자였기 때문에 걸이다종의 왕을 살해하고 불교를 재흥시켰다고 한다. 이와 같이 소승불교가 변천하여 내려오다가 서기 제 3세기 즉 불멸 제 8세기에 들어와서는 용수와 제바 등의 제논사가 배출하여 대승불교를 흥융시켰으므로 불교가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대승불교란 것이 돌연히 현출한 것이 아니라 소승으로부터 대승에로 옮기는 과도기에 있어서 대소승 겸학의 새 논사가 많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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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3

종래의 인도의 많은 임금들은, 자기가 불교와 바라문교의 어떠한 종교를 신봉하든지간에 이 양 종교를 평등히 보호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굽다왕조의 여러 왕들도 또한 바라문교를 신봉함과 동시에 불교도잘 보호했었다.

그러므로 전타라굽다 2세, 즉 월호2세는 카-카나다보타(Kakanadabota)사에 장원을 기부하고 익호왕은 그의 각문(刻戈)위에 불타의 좌형을 새겨 넣었다. 특히 세친전에 의하면 이 두 왕은 세친을 돈독히 존경 공양했고 동호왕은 모후왕비와 같이 열심으로 불교를 신봉했다.

또 굽다왕국의 기원 1백 65년(480년)에 재위한 그 불타굽다도 아마 불교 독신자이었던 것 같다. 그 밖에 불교의 절과 탑을 건립하고 승려에게 금품을 보시한 왕도 적지 않았다. 서역기에 의하면 후에 불교 교학의 근본도량이 되고 인도불교의 총 집중처가 된 나란타사도 실은 굽다왕조의 여러 왕들이 건립한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이 굽다 왕조는 바라문교와 같이 불교를 잘 보호했으므로 바라문교가 부흥 왕성함에도 불구하고, 불교도 더더욱 융성하였다.

종래의 인도의 많은 임금들은, 자기가 불교와 바라문교의 어떠한 종교를 신봉하든지간에 이 양 종교를 평등히 보호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굽다왕조의 여러 왕들도 또한 바라문교를 신봉함과 동시에 불교도잘 보호했었다.

그러므로 전타라굽다 2세, 즉 월호2세는 카-카나다보타(Kakanadabota)사에 장원을 기부하고 익호왕은 그의 각문(刻戈)위에 불타의 좌형을 새겨 넣었다. 특히 세친전에 의하면 이 두 왕은 세친을 돈독히 존경 공양했고 동호왕은 모후, 왕비와 같이 열심으로 불교를 신봉했다.

또 굽다왕국의 기원 1백 65년(480년)에 재위한 그 불타굽다도 아마 불교 독신자이었던 것 같다. 그 밖에 불교의 절과 탑을 건립하고 승려에게 금품을 보시한 왕도 적지 않았다. 서역기에 의하면 후에 불교 교학의 근본도량이 되고 인도불교의 총 집중처가 된 나란타사도 실은 굽다왕조의 여러 왕들이 건립한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이 굽다 왕조는 바라문교와 같이 불교를 잘 보호했으므로 바라문교가 부흥 왕성함에도 불구하고, 불교도 더더욱 융성하였다. 이제 법현전에 의하여 당시의 불교상황을 보면, 국왕과 부호들이 절과 탑을 건립하고 전원과 사택의 기부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승려들은 의식주에 결집함이 없이 항상 송경과 수선을 실행근수하고 상호 왕래하여 영송위문하며 위의범가 온 나라에 대소승의 절들에 있어서 많은 승려들이 거주하게 하되 수백인, 내지수천인이 있게 하였다

중인도에 있어서는 마가다국, 카시국, 마유라국과 및 승가시(Samkasiya)등의 지방에는 불교가 더욱 융성하여 대소양승이 다같이 행하고, 북인도에 있어서는 오좌(Udyana)와 나위(Rohistan)와 발나(Vanna)와 비다(Bhida)등의 지방에 가장 융성하여 대소승이 한가지로 행하고, 동인도에 있어서는 다마이체지방에 가장 융성하였다. 또 서인도와 남인도는 법습의 여행 중에 들지 않기 때문에 확실치 못하나 법현이 동인도로부터 그후 2세기에 널리 인도를 여행한 현장기사를 참고해 보면 서남인도에서도 대소승이성행한 것 같다.

또 기타 지역에 대해서는 법현전에 의하면 선선, 오위, 자합, 갈차등 지방에 융성하여 대소 양승과 대소 겸학이 행하였으며, 특히 우진국 같은데서는 수만의 승려가 있었는데 그의 대부분은 대승에 속해 있었으며, 국내의 대승사인 구마체선(Gomati)과 같은 절에는 위의 정숙한 3천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위와 같이 굽다왕조에 있어서 여러 왕의 원정으로부터 동서의 교통이 열리고, 또 그들이 보호하는 불교는 원근각지역에 널리 흥포되어 크게 불교의 융성기를 형성하였다. 특히 불교적인 사회사업의 하나로서는 국내각처에 시료원(福德醫藥舍)을 설치하여 빈궁고독등 기타 일체병자를 구제하고, 또는 그 다른 각종의 물품을 급여했다고 하며 불교가 이와 같이 융성하는 한편 문화방면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한 예를 들면 월호 2세의 조정에는 유명한 9인의 학자가 있어서 9보라고 칭하였으니 당시 인도 대사전가인 아마라 싱하(Amarasmha)와 대문법가인 바라루치(Vararuci)와 대희곡가인 카-리다-(Karidasa)와 대천문가인 바라하미히라(Varahamihila)등이 그중에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여 문화의 색채가 찬연히 빛나서 인도문명의 최고조에 달하였었다고 한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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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4

굽다왕조는 전타라굽다 2세(월호2세)가 왕도를 아유타에 옮긴 후 서력 41년에 그가 죽고 그의 아들인 구마라굽다(童護)가 즉위한다. 그러나 그의 말년, 즉 서력 5세기 중경에 이르러서는 북인도내에 있어서 흉노의침략적 세력이 심히 강성하였었다.
이로 말미암아 번영이 극하던 굽다왕조도 점차로 최운의 길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제 6세기 반경에 이르러서는 중인도의 카라궁도국(Kanyakudja)세력이 점차 강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나라 광증왕은 흉노의 강성한 세력을 물리치고 부근에 있는 여러 나라들을 병합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그의 아들인 광증왕이 7세기 초에 일어나서 동인도의금이국왕인 설상가(Sanka)때문에 모살되었다.

그러므로 그 다음 그의 동생인 희증왕이 즉위하였으니 이 희증왕이 곧 계일왕인데 즉위한 매는 서력 606년이었다. 왕은 북인도 서인도의 양인도를 차례로 다 정복하고 또 동인도의 금이국을 정벌하여 형의 원수를 갚고, 다시 남인도를 정벌하려다가 남인도의 폐왕인 마사자타국왕인 보라계사(Pulikesin)때문에 저지되었다. 그러므로 나-르마다(Narmada)강 이남에는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로부터 왕은 이 광대한 국내에 교육사업과 자선사업과 불교보호사업 등의 모든 사업을 널리 펴고 그 뿐만 아니라 밀러 외국과도 서로 교통의 길을 열어 국제적인 교제를 잘 취하였으니, 그 예의 하나로서는 당나라 현장이 인도에 갔을 때 호기로 생각하여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더니 당 태종도 역시 왕현석을 사신으로 하여 계일왕조에 보낸 것과 같은 일이다. 계일왕은 또 문학을 좋아하여 문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으니 저 불교희곡인「용의환희」라든지 또는 인도교의 희곡인「보주의열」이란 창작도 이 때의 작품이다.

왕은 또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철저하여 처음에 믿어오던 소승교를 버리고 대승교를 독신하였으며, 또 교육사업을 성행시키고 자선사업을 진흥시켜서 아쇼카의 유업을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혹은 시료원을 설치하고 또 국내에 살생을 금하여 혹은 조세를 경멸하여 민력을 휴양시키며 또 사문 바라문에게 성의를 다하여 보시공양하며 다수의 절과 탑을 건립하였다.

일찍이 도성에서 무차 대회를 행하고 인도 각종교의 승려 5,000인을 초대하였다. 그 가운데 3,000인은 나란타사의 승려였는데 현장도 역시 이때에 같이 참여했다고 서역기에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서력 648년에 계일왕이 서거하자 그의 권신아라나순(Alanashun)이 자립하여 왕위를 빼앗고 사신 왕현석을 거절하므로 현석은 이에 토번, 니파라의 병을 거느리고 공격하여 그를 생포해서 귀국했다고 한다.

현장의 서역기에 의하여 그 당시 대소양승 유행의 상태를 보면 먼저 중인도는 마가다국과 칼라국사의 두나라에 대승교가 성히 유행해졌고, 북인도는 오지나국(Udyana)의 대승교가 가장 융성했고, 서인도는 마랍파와 신도(Sindhu)의 두 나라를 비롯하여 도처에 소승 정량부가 유행하고, 남인도 교살라국(Kosala)에 대승교가 유행했으며 달라비다국(Dravida)에는 소승상좌부가 유행하고 공건나국(Konkana)에는 대소승이 한가지 성히 유행하여 대소승 병행지가 되었다. 그리고 동인도는 오다국(Odra)에 대승교가 제 1위를 점유하고 소승의 상좌부와 청량부가 그 다음에 있었다고 한다.

기타 남인도에서는 인도교가 유행하는 마사전타국이 있었고 서북인도에서는 외도가 일부 성행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6세기반에는 마뇌바국에 계일왕이 있어서 (이 계일왕은 앞에서 말한 계일왕과 동명이인이다)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승려를 존경하고 사원을 건립하며 또 매년 무차대회를 베풀기를 50여년간 계속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기타 당시의 유명한 대승논사들은 거의가 서인도인이었던 것도 주의를 끄는 바이다. 그러므로 먼저 말한 바와 같은 불교의 박해는 잠시 동안 부분적 또는 지방에 있었던 것을 더 부연하여 부정적으로 전하여 말한 것 같다.

당시의 불교계에 있어서 특이한 변태는 밀교의 유행이라고 하겠다. 현장의 서역기에 의하면 남인도의 타나갈책가국에는 6세기 전반에 집금강신 등을 숭배하고 금강다라니를 독송했다고 한다. 또 7세기경에는 용지(龍智)가 석륜에서 출생하였는데 남인도에 건너와서 밀교를 흥융시켰고 8세기초에는 남인도의 마라야국인 금강지가 용수로부터 밀교를 수학한 다음 중국으로 건너가서 110부 143권이라는 많은 밀교경전을 번역하여 중국밀교를 대성시켰다.

이상에서 말한 제국에만 한해서도 사원수는 수백 내지 수천에 달하고 승려수도 1만내지 2만에 달할 정도였으니 전 인도를 통 털어 말하면 수십만의 사원과 백여만의 승려가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이와 같이 극도로 불교가 융성했지만 또 타면으로 보면 불교에 대한 다소의 핍박과 타격도 없지 않았으니, 예를 들면 동인도에서는 일찍이 설상가왕의 폭학한 배불행동이 있어서 사합을 파괴하며, 혹은 중인도의 구시나갈라에 이르러 불교를 방해하고, 또는 마가타국에 와서 불탑을 파괴하는 등 악행을 행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이러한 지방에서는 다른 지방보다 불교의 세력이 감소되고 그 대신에 외도중 긱나교의 세력이 융성했다고 한다.

밀교는 남인도에서만 흉융하였을 뿐 아니라 서인도에서도 밀교적 교의가 유행했고 중인도의 나란타사에서도 유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8세기 초경에 중국에 밀교를 전한 선무외삼장도 이 나란타사에서 달마국가로부터 밀교를 전수하였다고 한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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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불교

아시아 대륙 동쪽, 동해와 태평양 사이에 위치한 일본은 훗까이도오(北海島)·흔도오(本島) ·혼슈우(本州)·시코쿠(四國)·슈우뉴우(九州)의 5개 섬과 그 부속도시로 이루어진 섬나라다. 총 면적은 37딴 7천 582㎢ 인구는 1억 2천만이다.

이 가운데 불교신도는 9천만명이 훨씬 넘는다. 사찰 수도 전국적으로 10만여개에 달한다. 객관적인 자료가 말해주듯 불교는 일본 최대의 종교이며 그만큼 사회적 영향력도 크다.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 어느 곳에서나 존경을 받는다. 일본에 있어서 불교의 발전은 전통적으로 왕조에 대해 진호국가라는 입장으로 국가권력과의 밀월관계를 계속해온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같은 관계는 불교가 처음 전래된 6세기 초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계속된 일본불교의 역사적 성격이다. 일본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흠명천황13년(552)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기록일 뿐이고, 불교신앙은 그 이전에 이미 백제로부터 도래한 사람들에 의해 널리 신봉되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흠명천왕 시절은 바로 백제의 성왕(523-553)때이고, 고대 일본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스승이 한국이었듯이 불교역시 한국에 의해 전해졌던 것이다.

일본에 불교가 정착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은 성덕해자(574-622)다. 그는 그의 스승이였던 고구려 스님 혜자의 가르침에 따라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국가통치이념으로 채택했다. 그가 제정한 17조 헌법은 불교의 이념을 근간으로 한 것으로써 삼보에 귀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는 또 혜자외에도 백제의 혜총에게서 불경을 배우고 주석서를 저술하여 불교신앙의 기초를 닦았다. 일본은 이후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유학승을 파견, 대륙불교를 받아들이는 한편 국가적인 힘을 기울여 대사원을 건립했다.

불교가 정부의 보호관리 아래 토착화되었던 시대를 나라불교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는 교학의 수입경로에 따라 삼론·성실·법상·화엄·율등 6종의 학파가 나왔다.나라시대 (奈良 : 710~784)는 국가의 보호아래 번영을 누렸지만, 동시에 승려들은 안일에 빠져 승풍이 타락하고 퇴페하는 폐단이 생겼다.

승려가 정치에 깊게 개입하는가하면 출가 계가와의 구별도 뚜렷하지 않아 계율이 문란해졌다. 조정이 혜이안시대(平安 . 784~ 11駱)로 바뀌면서 불교의 보호는 계속되지만, 그것은 국가에 유용한 인재를 배출키 위한 것으로 한정됐다. 헤이안시대에 들어와서 일본에는 새로운 불교가 도입됐다. 최징과 공해가 중국으로부터 천태와 밀교를 수입한 것이다.

최징(766-822)은 당에 유학하여 천태교학를 배워 귀국한 뒤, 비예산에 연역사를 세우고 천태교학의 바탕 위에 염불교·밀교를 도입. 일본 천태종의 개창자가 되고 공해는 장안에 머물면서 불공삼장의 제자 혜과로부터 진언밀교를 전수받아 고야산에 새로운 도량을 세웠다. 천태와 진언은 교단조직을 확립하고, 서로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 점에서 일본 종파불교의 원형이 됐다.
혜이안시대 중기가 되자, 일본은 전통적인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귀족의 장원이 출현했으며, 지방호족과 무사계급의 쟁토가 일어났다.

이러한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접연(l132~1212)은 왕생을 위해 다른 난행(염불 이외의 선 禪이나 독경 등)을 버리고 오로지 염불만 할 것을 제창했다. 그는 천태종으로부터 독립를 선언하고, 정토종을 세웠다. 또 그의 제자 친란(l173~1263)은 아미타불의 자비에 의해서만 왕생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타력보은 염불을 강조했다.
그는 정토종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종파를 세웠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 최대의 종파가 된 정토진종이다.
정토종과 정토진종의 개종은 종래의 귀족불교가 민중불교로 전환한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가마꾸라시대(鎌倉 l185~1333)에 더욱 확대되어 불교는 완전히 일본민중에게 뿌리를 내렸다.
또 이 시대는 송과의 무역이 성행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선이 수입돼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영서(l141~1203)는 임제종의 창시자가 됐다.
가마꾸라사대 새로운 불교운동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일연(1222-1282)에 의한 법화종(日蓮宗)의 개교다.
일련도는 다른 종파의 조사처럼 처음에는 비예산에서 공부를 했으나, 법화경 하나만을 의지하는 것을 종지로 세우고 독립을 선언했다.

일련은 독특한 교의의 주장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에 의해 막부의 박해를 받아 한때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가마꾸라시대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교의의 중심은 염불과 선 또는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과거의 불교가 국가주의 또는 귀족주의였던 것과 달리 개인의 종교로 출발하여 민중 사이에서 교단의 기초를 확립한 것이 공통적인 특색이다.

가마꾸라시대 다음의 일본역사는 무로마찌시대(室町 : 1392~1477)로 접어든다.
이 시대에 이르면 불교교단도 정치와 경제가 변혁됨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는다.
무엇보다 상원제도가 붕괴하자, 그것에 경제적 기반을 두었던 나라(奈良)나 교오또(京都)의 사찰들은 경제적으로 곤궁해졌다.이런 궁핍상을 타개하기 위해 불교계는 밀교화 되었다. 경제적 기반구축을 위해 어느 교단이든 가지기도가 일반화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원은 경제적 궁핍을 이기지 못해 황폐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이 시대는 농업기술의 진보와 농민의 자각에 의해 농민결속이 지방마다 일어났으며, 이것이 조직화되자 저항운동으로 바뀌었다. 불교는 이들 농민과 연합하여 자주 무사계급에 저항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한때 이들은 사찰에 사병을 두는 등 강력한 힘을 가졌으나, 결국은 패배하고 말았다.

불교교단으로 이 시대에 크게 번창하는 것은 정토진종 뿐이었다. 진종은 연여(1415-1499)에 의해서 교리뿐만 아니라 세력 면에서도 크게 발전하여 본원사는 사실상 봉건영주적 세력이였다. 이 진종은 개인의 구제를 목적으로 했고, 호국기도는 관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상숭배와 습합하고 농민의 종교가 되기 위해 선도와는 결합했다.

또 누구나 행하기 쉬운 칭명염불을 제창하여 당시 민중의 고통을 종교로써 치유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리하여 진종은 비승비속의 세속종단으로서 혈연엔 의해 상속되는 가장 일본적인 형태의 불교로 정착케 됐다. 이 시대는 진종뿐만 아니라 조동종·임제종·일련종·정토종도 일본적으로 변질되면서 일본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일본의 조사불교(종파불교)는 이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정착됐다. 그러나 다음 시대인 에도시대(江戶 :1598~1867)에 이르면 가마꾸라시대에 서민화됐던 불교는 다시 국가불교 체제로 전환케 된다.

에도시대에는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또미히데요시가 죽고 정치의 실권이 도꾸가와 이에야스로 넘어간 때로부터 시작된다.
이때에 불교교단은 새로운 봉건체제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다. 이 시대의 주역 도꾸가와막부(德川幕府)는 사찰이 강대한 힘을 가지고 농민들과 결속해 체제에 대항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사찰을 무장 해제시키고 불교교단을 국가가 직접 관리했다.

에도시대의 봉건제도 아래서 불교의 국가관리는 오늘의 일본불교를 지탱하는 단가제도를 확립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도꾸가와 막부시대는 불교의 자유로운 포교활동의 금지, 사원건립 제한, 출가자의제한 등 탄압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국가권력에 의한 본말사(本末寺)의 행정체제 확립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채택했다.

이것은 막부의 명령을 본산을 통해 곧바로 말시까지 하달하는 체계로서 각 종파는 행정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는 결과가 됐다. 이 무렵 본말사가 불확실한 사원은 모두 폐쇄되었다. 막부는 불교종파의 행정체계 정비와 더불어 주지의 임면권까지 장악했다. 승려들은 주지가 되기 위해서는 막부가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했고, 그것은 불교 교학과각종파의 종학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동시에 각 종파는 경쟁적으로 학교를 경영하여 커다란 곳에서는 1천명 이상의 학승이 모여 강의와 연구를 했다. 또 불교교단은 일반인들을 위한 강습소까지 개설해 불교를 일반민중에게 가르쳤다. 한편으로 막부는 그리스도교(切支舟) 금제를 위해 불교를 이용하였고, 불교는 정치의 일단을 청부맡아 기독교 금제를 강화했다.

기독교는 1549년에 일본에 전해졌으나. 신사를 참배하지 않고 봉건무사의 풍습인 절복(切販)을 부정하는 사람을 반드시 개종시켜 불교사원에 신자등록을 시키고 그 증거로 사찰에서 증명서를 발급받도록 했다. 이런 일은 점차 기독교인에게만 한정하지않고, 일반민중에게도 보급시켜 혼인·여행·이사 등에서도 반드시 사찰이 발급한 중명서가 막부에 제출되어야만 하게 했다.이것은 일종의 호적제도로, 막부가 불교를 억압하면서 동시에 불교를 고무시키기 위한하나의 방편이였다.

막부의 이 같은 불교관리는 오늘날 일본불교의 특색인 단가제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모든 주민이 어떤 형태로든 불교사원과의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고, 그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민중은 불교를 신앙케 되었던 것이다.일본 불교는 이 단가제도로 인해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불교를 체제순응으로 만들었고 승려는 관료화되고, 안일과 타락이 생겨 에도시대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극심한 부패상을 노출케 되었다.

막부말기에는 이에 대해 불교계 내부에서 자기비판도 일어나고 계율 진작에 의한 승풍쇄신 운동도 있었지만, 명치유신을 맞이하자 배불론자들에 의해 패불단석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명치초기 일본의 국학자와 신도 및 그들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1870년 신도에 의한 교육추진을 선포하여 신불을 분리하는 정책을 취했다. 원래 불교는 도입이래 신도와 습합하여 불사와 신사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을 분리하는 정책을 폄과 동시에 일어난 배불운동은 전통의 명찰을 폐허화시켰고 불상과 경전까지 소각당하는 비운을 당시의 불교는 겪어야 했다.

이와 함께 전통적으로 사찰이 발행했던 사령 (사찰이 발행하는 각종 증명서)이 폐지되고 토지도 몰수됐다. 정치권력으로부터 하루아침에 줄 끊어진 연의 신세가 된 불교는 자위책으로 과거보다 더욱 신불일치를 강조하는 한편 천황과 군국주의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근대 일본불교는 일본군국주의가 저지른 이른바 대동아전쟁 (2차대전)조차도 팔굉일우(온 세상이 찬집이라는 뜻)의 성전이라고 찬양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불교는 천황에게 신권을 부여하고, 불교적 성왕인 전륜성왕과 동일시하여 이웃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마치 정법에 의한 정당한 행위라고 궤변을 일삼기 까지 했다. 그러나 일부 양심적인 불교도는 이러한 그릇된 작태를 반성하고, 신앙쇄신운동을 일으켜 불교정신 회복에 앞장서기도 했다.1932 일연종의 (埋尾義郎) (1883~ 1961) 이 주도했던 (신홍불교 청년동맹)이 그 대표적인예 다신흥불교 청년동맹은

첫째, 타락한 기성교단을 배격하여 불교의 참모습을 발양시키며
둘째, 분열된 불교계를 통일하여 추악한 종파분쟁을 불식시키며
셋째, 불타정신에 위배되는 군국주의를 배격하며
넷째, 자비와 평등의 불국토를 지상에 건설하겠다는 슬로건으로 한때 20개 지회와 수천의 회원이 참여했으나, 파시즘으로 흐른 국가체제에 의해 탄압되고 말았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티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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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불교

티베트는 남쪽의 히말라야, 북쪽에 곤륜산맥, 서쪽에 파미르, 동쪽에 중국의 사천성을 둘러싼 해발평균 3천m의 고원지대다. 기후는 전형적인 내륙성으로 자연환경이 험하다. 주민은 수도 라사를 중심으로 창포강 유역에 가장 많고 그 밖에 캄(東티베트), 암도(청해지방), 친산고원 등지에서 농경과 유목생활을 하고 있다. 티베트란 말은 중국에서 이 지방을 토번(吐蕃)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 지방을 토번 외에도 서쪽의 보물창고 라는 뜻으로 서장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에서 오래전부터 여러 부족이 탕창강(春昌業)·등지(鄧至)·백 란(白藺)·당항(黨項)·강(業)·백람(白狼)·다미(多彌)·아란(阿蘭)·여국(女國)등의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있다가, 7세기 초 송첸캄포왕 시대에 통일국가 토번이 형성됐다. 송첸캄포는 중국의 사천에까지 진격하여 문성공주를 항가시켰으며, 또 네팔에도 세력을 얻어 네팔왕앙슈바르만의 왕녀와도 결혼하였고, 톤미사포타를 인도에 파견하여 불교와 인도문화를 배워서 티베트문자와 문법책을 짓게 하였다.

8세기 후반 치데송첸왕 시대에 티베트에서는 인도계 불교인 점오설(漸悟說)과 중국계 선종의 돈오설(鑛悟說)의 대립이 점차 심하여져 토론이 수차 행하여졌다.

760년경 치더송첸의 초청으로 인도에서 온 나란타의 유명한 학승 산타라크시타(寂護), 파드마삼바바(蓮華生)에 의하여 인도불교가 성행하게 되고. 이어서 온 카말라시라에 의하여 중국계 불교는 탄압되었다. 이후 티베트불교는 완전히 인도불교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또 치데송젠은 마가다(인도)의 오단타푸리사(寺)를 모방하여, 수도인 라사 동남쪽 삼예에 불교사원을 건립하였고, 이 시기에 최초로 티베트인의 출가가 이루어졌다. 티베트에는 원래 산령을 숭배하는 샤먼적본교가 있어서 불교가 들어가기 전까지 압도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드마삼바바가 밀교를 들여와 본교와 투쟁하는 동안 이들은 서로 혼융하여 라마교라고하는 독특한 불교가 만들어졌다. 원시불교로부터 분파된 밀교는 주문이나 진언은 냉철한 이론보다도 자연숭배의 신앙을 가진 티베트인들에게는 매우 합당한 것이었다. 교를 닝마파(舊派)라 한다.

9세기 전반, 치데송첸과 그의 아들 르파찬은 티베트불교를 가장 보호하던 왕이다. 이 시대에 티베트어로 번역된 불전의 용어를 통일하고, 사전도 편찬됐으며, 많은 경전을 번역하여 불교교의를 순화시켰다. 티베트어 불전은 산스크리트어 원전의 자구에 원뜻을 충실하는 逐字諜의 특징인데, 이것은 이 시대에 확립된 전통이다. 그러나 르파찬은 841년에 암살되고 본교도인 그의 동생 란다르마가 즉위하여 불교를 크게 탄압하였다. 이 때문에 불교는 큰 타격을 입었고, 란다르마 자신도 격분한 불교도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티베트왕가는 분열되고 군웅할거시대로 들어갔다. 11세기가 되어 불교개혁을 바라는 서티베트왕 예세혜의 초청을 받아 1042년 비크라마시라사의 학두 아티샤가 티베트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교학은 밀교의 금강승(金剛乘)이었기 때문에 과연 닝마파의 입장이 어느 정도 개혁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이 아티샤 계통을 카담파라고 부른다. 또한 1037에 코촉게포가 사카사(寺)를 건립하고 사카파를 성립시켰다.
11세기 중엽에는 마르파가 인도의 비크라 말시라사에 들어가 나로파에게 금강승을 배우고 귀국하여 새로 카규파를 열였다.
이로써 티베트불교는 토번시대의 팅마파와 함께 4개의 종파가 분립케 됐다. 13세기 중엽, 사카파는 중국 원조(元朝)와 깊은 관계를 가지며 티베트의 정치·종교 양권을 장악하였다. 원조의 광적인 티베트의 불교 숭배는 타락한 티베트 불교를 더욱 타락시켰다.

이에 14세기 후반에 종카파(宗喀巴)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여 타락한 티베트불교를 개혁시켰다. 그는 라마승의 독신생활과 계율주의를 주장하면서, 불교개혁을 지도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황색 모자를 쓰고 흑색 모자를 쓰는 본교와 구별했다.
이들은 황모파라 하며 쫑카파의 법률을 잇는 종정을 달라이라마라고 한다. 제 5대 달라이라마는 티베트를 재통일하는데 성공하여 정교양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7대 때인 1750년에는 청조(淸朝)의 보호에 들어갔다가 최근에 이르기까지 달라이 법왕국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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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불교

몽고는 내륙아시아의 동부를 차지하고 동쪽은 흥안령(興安嶺)에서 서쪽은 신강성(新强省)까지 뻗치고, 북쪽은 시베리아, 남쪽은 중국에 인접하는 485만㎢의 광대한 고원의 지역이다. 보통 고비사막을 중심해서 안팎으로 구분되는데, 이남을 내몽고, 이북을 외몽고라고 부른다. 정치적 의미로서는 내몽고는 중공에 편입되어 내몽고 자치구라고 하며, 외몽고는 몽고인민공화국이라는소련의 위성독립국가로 되어 있다.

몽고족에 관한 기록은 이미 당시대의 중국측 자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민족이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3세기 초엽 칭기칸에 의해 몽고제국이 형성된 뒤부터다. 몽고 고원에는 당시 몽고계와 터키계의 여러 부족과 씨족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몽고족 출신의 칭기즈칸이 제족을 통일하여 내몽고에 세력을 확립하였다. 그는 1206년 대오(大汚)시해까지 계속되어 유럽에까지 몽고군의 용명(勇名)을 날렸다.

세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남송을 멸망시키고, 전 중국을 지배했다. 원제국은 칭기즈칸이 즉위하고부터 멸망(1367년)할 때까지 162년. 국호를 원으로 바꾼 세조의 즉위부터는 대 109년간 계속되었다. 몽고는 태조때부터 불교를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그의 막료중에서 야율금촌(耶律楚村)과 같은 불승이 있었다.

그러나 몽고정권과 불교의 관계는 태종 때부터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태종은 금을 정벌할 당시 해운인간(海雲印簡 : 1202-1257)을 만나 그를 존경케 되었으며, 인간은 원조를 위해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조의 숭불은 티베트에서 일어나 라마교의 도입으로 더욱 열렬해졌다. 원조의 라마승으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파스파(八思巴 : 1239~1280)이다.

그는 티베트 라마교사키 야파의 승려로서, 세조 (쿠빌라이칸)의 신임을 받아 국사가 되고, 티베트 및 구서하령의 일반 행정권과 원 제국내의 전 불교계를 통섭했다. 그는 또 티베트문자를 기초로 하여 몽고의 새 문자(파스파문자)를 만들고 1270년 그 공으로 제사(帝師)가 되었다. 제사란 황제의 스승이란 뜻으로 역대의 황제에게 계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제사에 직속한 기관으로는 선정원(처음에는 統制院)이라는 관부가 설치되어, 원과 티베트불교에 관한 모든 사항을 처리했다. 파스파는 나중에 티베트로 돌아가 1280년 죽었는데, 세조는 그에게「皇天之下一人之土宣文輔治大聖臺德普覺眞智佑國如意 大寶法王西天佛子大元帝師」라는 어마어마한 호를 하사했다. 원이 이처럼 라마승을 존경를 받드는 것으로써 몽고정권의 독자성을 보이고, 아울러 티베트 통치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종교 그 자체에도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몽고민족의 고유 신앙은 샤머니즘 이었는데, 라마교는 화려한 의식과 신비로운 기도를 가지고 있어서 이러한 분위기는 단순 소박한 그들에게 큰 매력이었던 것이다. 파스파가 죽자, 수년 후부터 원 제국 각지에는 제사사(帝師寺)가 건립되고, 파스파의상이 모셔졌다. 제사의 지위는 더욱 존엄해졌고, 제사의 명령은 詔勅과 동등한 권위를 가졌다.

심지어는「라마승을 때리는 자는 그의 손을 자르고 또 그들을 욕하는 자는 혀를 자른다.」고 하는 명령까지 내렸다.

원이 이처럼 도에 지나친 태도는 라마승을 차츰 횡포하고 타락케 하여 그들로 하여금 더 할 수 없이 나쁜 짓을 하게 만들었다. 이는 마침내 한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원제국의 멸망을 초래케 하는 원인이 됐다. 유럽에까지 영토를 확대했던 원제국은 부족내의 다툼이 원인이 돼, 1968년 멸망했다. 중원은 명이 들어서 몽고족을 축출했으며, 그들은 다시 몽고고원으로 도망쳐야 했다.

원대에 극성하던 몽고의 라마교는 그후 쇠퇴의 길을 보였다. 그러나 몽고 고원으로 도망가 독립을 유지하던 북원의 알탄칸의 청해를 원정하자 이곳에서 라마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1573년부터 청해에서 사원건립이 시작되었다.

1578년에는 티베트의 법왕 제 3대달라이라마인 소남 감초가 추천돼 성대한 법회를 배풀었다. 잇달아 칸(汚)의 거족인 귀화성에 홍자사(弘慕寺)가 세워져, 라마교는 내외몽고뿐만 아니라 오이라트족 사이에도 급속하게 퍼져 차하르의 투멘칸을 비롯하여 외몽고의 여러 칸들까지도 달라이라마에게 參設하게 됐다. 알탄의 증손 후드크투가 제 4대 달라이라마가 된 것도 라마교 흥륭의 한 현상이다.

달라이라마의 (달라이)란 명칭은 티베트어로 대해를 뜻하는 링초(rgyamtsho)를 몽고어로 바꾸어 말하는 것이다. 1632년 명태종은 계속 중원을 넘보는 내몽고를 복속시켰으나, 외몽고는 여전히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 후 호이라트의 후 예중가르부가 강대해져, 외몽고·청해·티베트·동터키스탄 등지를 점유하여 다시 강대해진 이들은 청을 침공하다가 도리어 패배하여 청의 지배를 받게 됐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외몽고는 러시아의 힘을 빌어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과 자치를 선언하고, 다음 해에 러시아와 로몽조약을 체결했으나 중국측의 반대로 폐기되고, 1915년 로·몽·중 3국간에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중국은 외몽고에 대한 명목상의 종주권은 회복되었지만, 외몽고는 사실상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21년 몽고인민혁명당의 수흐바토르·초이발산 등이 혁명을 일으켜 몽고불교의活佛 보크드 게겐을 원수로 하는 입헌군주국을 세웠다. 보크드는 라마교의 법왕으로 티베트에서와 같이 정교양권을 장악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나이가 많아 1924년 죽고 말았다.명목상 원수이던 보크드가 죽자, 소련의 무력을 배경으로 한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몽고인민공화국의 면적은 전체몽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56만 5천 ㎢, 인구는 155만 5천 명이다. 전체인구의 80%이상이 라마교도이다. 한 집안에 남자 아이가 많을 때는 그중 한 두명을 출가시키는 것이 풍습이다. 전국 곳곳에는 라마청이 있어서 주민들의 신앙을 지도한다. 라마청은 몽고족들의 전통적인 가옥인 이동하기 편리한 소규모의 파오(包)와는 달리 대규모 종교정책으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혁명초기 공산주의자들은 숱한 불교사원을 파괴했으며, 승려를 투옥 살해했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스리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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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인도대륙의 남단 인도양 위에 떠 있는 스리랑카는 예로부터「동양의 진주」,「보석의 섬」으로 불리었다. 일반적으로 싱할라, 세일론으로 더 널러 알려진 이 나라는 기원전 3세기경에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인 이래 오늘날까지 가장 확실하게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부처님은 생존했을 당시 스리랑카를 세 차례 방문했으며, 첼레니아에서 설법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사원이 세워져 있으며, 부처님이 앉았다는 황금의자는 大塔에 봉안되어져 지금까지 참배객들에 의해 예배되고 있다.

그러나, 사가들에 의해 기록된 스리랑카불교사는 불멸 265년(기원전 265년) 아쇼카왕이 그의 아들 마힌다장로를 파견한 것으로 시작된다. 마힌다스님은 4명의 비구와 사미인 수마나를 데리고 스리랑카로 건너와 수도인 아누라다푸라에서 동쪽 12km떨어진 마시카산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사냥나온 국왕 데바냥피야 티사를 만나 설법 교화했다. 마힌다에게 교화된 티사는 불교포교를 위한 편의를 제공해 주었으며, 대정사 티사 아라마를 봉정했다.

이것은 후에<마하 비하라>라 불리우는 상좌부의 근거지가 된다. 마힌다가 동행해 온 사미 수마나는 신통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마힌다는 수마나를 시켜 인도에서 불사리와 발우를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봉납한 아마라탑을 건립했다. 또 마힌다의 여동생 승가밀타가 얼마 후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그들은 부처님 성도지인 붓다가야에서 보리수가지를 잘라다 아누라다푸라의 마하보디사원에 옮겨 심었다. 이 나무는 지금도 살아남아 있어서 부처님의 상징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스리랑카불교의 핵심대상이 되고 있는 보리수와 불탑(다가바)이다. 32세에 스리랑카로 건너와 불법을 전한 마힌다장로는 80세에 열반했다.

그러나 많은 국왕과 귀족의 귀의를 받아 불교의 뿌리는 스리랑카에서 튼튼하게 심어져 오늘까지 이어지고있다.티사왕에 의해 불교를 도입한 스리랑카는 100년쯤 뒤에 세계불교에서 유례없는 성전을 경험한다. 힌두교를 신봉하는 남인도의타밀인이 침입해, 불교를 믿는 싱할라인은 지배하려 하자 두타가마니왕(재위 : 기원전161-137년)이 출현하여 양세력간의 분쟁을 평정했다.

그는「나의 싸움은 왕국의 지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불타의 교법을 수립하기 위해서다」라고 단언했다. 국왕이 불교도가 되어 불교를 보호한 예가 많으나, 불타의 가르침을 수호하기 위해전쟁까지 한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두타가마니 아바야왕은 싱할라 세력을 결집하여 왕위에 올라 혼란을 평정했다. 아바야왕은 불교를 보호하여 자기의 친근한 마하티샤장로를 위하여 마바야기리(無畏山)에 사원을 세워 주었다.

그러나 활동적인 마하티샤장로는 지계를 엄격히 고수하던 비구들로부터「재가인들과 교제한 죄」로 문책당하여 교단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그의 제자 500명은 이 조치에 승복치 않고 사원을 떠나 무외산사로 옮겼다.

이로써 교단은 둘로 분파됐다.때마침 남인도에서 독자부에 속하는 담마루치 장로가 제자들과 함께 스리랑카에 와서 무외산사에 초빙됐다. 왕은 이들에게 호의적이있지만, 보수적인 대사파는 이들을 이단시 했다. 이리하여 스리랑카 교단은 대사파와 무외산사파로 분립되어 12세기까지 끊임없이 대립을 계속했다. 이러한 분파는 정법을 전지하고자 하는 대사파 비구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첫째로 성전을 베껴서 보다 확실한 정법의 근거로 삼으려 했다. 둘째는 불교의 근본이 학인가, 행인가 하는 문제가 교단 내부에서 제기됐다. 격렬한 논쟁끝에 수구파 비구들은 수행 쪽을 택했고, 법설파비구들은 학문 쪽을 택해 2개의 생활양식으로 갈라졌다. 현재 스리랑카에 남아있는「숲속의 비구」는 전자의 흐름을 따르는 수행자들이다.

3세기가 되면서 스리랑카에도 대승불교가 전파된다. 스리랑카에서는 이를 방광부라고 부르는데, 空사상을 강조하고 무외산사를 근거지로 했다. 무외산사는 새로운 사상체계의 도입으로 힘을 얻어 대사파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대립이 격화되자 당시 왕인 보하리카티샤는 방광부를 이단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고타 아바야왕(재위 : 253~266) 시대가 되자 다시 대승을 불설로 주장하는 비구가 생겼다. 왕은 무외산사파방광부, 계통 비구들을 인도로 추방하고 대승서적을 모두 찢어 버렸다.마하세나왕(재위 : 276~303)의 치세가 되자, 이번에는 대사파에 압력을 가해 9년간 절이 비게 되고, 방광부는 다시 부활했다.

그러나 왕비와 대신의 설득으로 대사파는 다시 보호를 받게 되고 방광부는 또다시 압박받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마하세나왕의 뒤를 이은 시리 메가반나왕(재위:303~331)은 아버지와는 달리 무외산사파와 대사파를 똑같이 정중하게 대했다.

메가반나왕 시대에는 스리랑카 불교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 생겼다.

부처님의 치아(佛齒)를 인도에서 모셔온 것이다. 불치는 왕의 즉위 9년째가 되던 해 칼링카국의 왕녀인 혜마말라가 그의 남편 단타 쿠말라에 의해 가져오게 한 것인데. 왕은 이것을 달마차바당에 안치하고 매년 무외산사에서 성대한 불치제를 열었다.

현재 불치는 캔디의 불치사에 봉안돼 있으며 역대의 왕과 귀족들이 기증한 보석들로 장식돼 있다. 한편 이 시대에는 대법석가로 유명한 부다고사가 스리랑카에 와 있었다. 부다고사는 종래의 주석서가 싱할리어로 전승되던 것을 누구나 알기 쉽게 팔리어로 번역했다.그는 청정도론이라는 불교교리의 백과사전적 저서도 남겼다.

5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동안 스리랑카불교는 왕이 바뀜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지만, 대부분은 불교를 보호했기 때문에 순조로운 발전을 거듭했다. 7세기경에는 남인도 출신의 바즈라보디(金剛智)가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스리랑카에 와서 무외산사에 머물면서 밀교를 전했다. 스리랑카 밀교는 8~9세기까지 매우 성행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9세기 중엽 남인도 치요라 왕조는 스리랑카를 침입해 사원을 파괴하고 불교를 박해했다. 이러한 수난시대에 비자야 바후1세(재위 : 1055~1100)가 등장하여 치요라군을 격파하고 불교부흥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스리랑카불교는 계속된 전란으로 괴멸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득도식을 비롯한 교단의 의식을 행하는데 필요한 비구가 모이지 못할 정도였다. 왕은 버마 아노야타 왕에게 사신을 보내 버마승단의 비구가 와서 계를 설해줄 것과 성전을 보배 줄 것을 요청했다.

아노야타왕은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전래받았기 때문에 이를 쾌히 승낙, 장로를 파견하고 많은 성전을 보내주었다. 이렇게 하여 상좌부의 법통은 다시 계승되었고 대사와 무외산사가 부활하여 불교는 재흥됐다. 비자야 바후가 사망하자, 스리랑카는 지방호족들의 발호로 또 다시 혼란에 빠겼다. 이 혼란을 수습한 사람은 역사상 최대의 영군으로 불리는 파락카마 바후1세(11翡~1186)다.

왕의 치적 가운데 불교에 대하여 취한 주목할만한 업적은 교단의 개혁이다. 전왕이 모처럼 애를 써서 버마로부터 상좌부 법통을 역수입했지만, 100년 후 이 시대에는 아설집 이단을 횡행하고, 비구들은 타락해 있었다. 왕은 나라 안의 모든 종파를 대사파를 중심으로 하는 1파로 통합했다. 상좌부 전통을 인정치 않는 비구는 추방했고, 처자가 있는 비구는 환속시켰다.

많은 사원이 수리되고, 새로운 사원이 건설됐다. 1천명의 비구를 모아 불전도 새로 결집했다.특히 이후의 스리랑카 불교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카디카바다(승단규약)도 이때 공포됐다. 이것은 율장과 함께 승가 본연의 자세를 규정한 법률로써 후대에 이르러서도 여기에 기본을 두고 작성한 승단규약은 흐트러지는 승가의 형태를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현대로 이어지는 스리랑카 남방 상좌부는 이 때에 그 기초가 확립된 것이다. 13세기 후반의 비자야 바후 4세는 왕으로서나, 불교도로서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이로 인하여 그는 불교도들로부터 보살이라 불려졌다. 그는 또 자신이 직접 개최한 具足戒 의식 높은 비구들에게는 마하사민(大主), 물라테라(根本長老). 파리비라테라(學院長老) 등과 같은 존호를 수여했다.
다음대인 부바네카 바후1세는 스스로 삼장에 정통하여 비구와 장로들에게 법을 설대하였으며, 그것을 잘 배운 비구에게는 장로로서의 지위와 특전을 베풀기도 했다.데바낭피야터상왕에 의해 불교가 도입된 이래 스리랑카 교단은 왕실주도형으로 발전되었다.

그러한 경향은 파락카마 바후3세(1287~1293)에 이르러 포론나르와 왕정이 종지부를 찍은 후에도 그리고 16세기 이후유럽 세력이 이 섬에 들어오는 근세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스리랑카불교는 확실히 민중속에 파고 들어가 그들에게 삶의 의의와 생활원리. 공덕관념에 근거한 선행등을 가르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것은 측면에서 보면 항상 왕권과 밀접한 관련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남방 상좌부 불교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스리랑카는 11세기에 버마. 13세기에는 태국, 그리고 14세기에는 캄보디아로 각각불교를 전과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포르투랄의 침공을 받아 불교는 배척을 당했다. 그 위를 이어 이 섬은 네덜란드가 지배(1655~1799)하게 되는데, 이매 다시 승단의 법통이 끊어졌다.

17세기초 스리랑카왕 비말라 담마 수리야2세는 버마에서 비구를 초빙해 법률을 이었으며, 17세기 후반에는 태국으로부터 다시 전법을 받았다. 현재 태국에 의해 부활된 씨암파, 버마에 의해 부활된 아라마푸라파와 라마니야파가있으나, 씨암파가 가장 우세한 숭단이다.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고있는 스리랑카는 인구 1천 500만명 가운데 67.4%가 불교도이다. 이에 비해 힌두교는17.6%, 기독교 7.8%, 회교도 7.1%, 기타0.1%이다. 이 가운데 불교도는 대부분이 싱할라인이며, 힌두교는 남인도의 타밀계인종에 한정되어 있다.

헌법에서는「세속국가」임을 강조하는 동저에 「불교에 최우선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섬 전체가불교적 세계관이 지배한다고 보아야 한다. 스리랑카에서 사찰은 완전히 독립되어 있으며, 중앙의 행정부서는 없다.

僧正은 명예직이며 상징적이다. 승정의 임무는 수계식을 주도하고 합동행사나 중요업무에 대한회의를 소집하여 주재하는 것이 전부다. 사찰 재정은 신도회에 의해 관리된다. 사찰의 헌금함은 승려와 신도. 은행측의 3자 입회하에 개봉되는데, 은행에 예금된 돈은 필요할 때 신도회에서 인출하고, 모자라면 신도회에서 모금하여 충당한다.

숭려에게 금전을 보시하는 일은 없다. 공양은 신도회 주관으로 차례표를 만들어 대중공양을 올린다. 대중공양을 올리는 날은 그 집안의 경사날이다. 집안 식구는 물론 친척까지 동원된다. 스님들에 대한 공경이 철저한 만큼 파계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여자가스님의 방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으며, 용무가 있으면 밖에서 (대중이 보이는 곳)대화한다.

스님이 여자와 어울려 웃는 일은없다. 스리랑카 스님들은 보통 12세쯤 되었을 때, 동진 출가한다. 양가의 자제로서 장남이나 외아들이 아닌 건강한 어린이만 선택되며, 이들은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사원교육제도인「피레베나」에서 교리·수행·일반교양·불경 등을 배운다. 이 학교에서는 세속의 신도도 교육을 받는다.스리랑카에서는 불교의식은 대체로 밤에 행해진다.

신도들은 밤에 사찰을 찾아와서 설법을 듣는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은 대개 꽃이며, 낮에 꽃을 채집해 깨끗이 씻어 바구니에 담아와 공양한다.중요한 불교의식으로는 포야데이(滿月祭)와 페라혜라(行列祭), 보리수 공양등이 있다. 포야데이는 매월 음력 보름날 하는 행사로 금욕·참회의 날이다. 모든 신도는 이날 육식을 금하며 흰옷을 입고 독경과 정진·설법을 듣는다.

페라혜라는 유명한 불치를 코끼리의 등에 올려 놓고 벌이는 순행제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민속행사의 하나다. 이 행사는 불치가 처음 들어온 4세기 경부터 있어 왔다고 한다. 또 보리수공양은 성수가 있는 마하보디사에서 행해지는 의식으로 신도들은 나무 주위를 7번 돌며 물을 뿌린다. 스리랑카 스님들의 사회활동은 철저한 자비행의 실천이다.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유아원과 일요학교는 영세민을 위한 것이고, 고아라든가 지체부자유자를 보호하는 곳도 불교단체이다.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사회사업가 아리야라트 내씨도 독실한 불교 신자이다. 스리랑카불교는 완전히 민중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가 있다. 집집마다 사무실과 버스에도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아침 5시반국영 방송국의 예불방송에 맞춰 예불을 시작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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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미얀마인들은 그들의 나라를「황금의 미얀마」라고 부른다. 도금된 사원의 지붕은 추수시의 들판과 잘 조화를 이루어 나라 전체를 황금색으로 만든다. 노란색 법의를 입은 스님들은 온통 황금색으로 물든 거리를 발우를 들고 눈을 지그시 내려감은 채 걷는다. 그 모습은 이 나라가 오랫동안 불교적 전통으로 살아왔음을 실감케 한다. 인구 2천 800만의 버마는. 2차대전시 한때 미얀마 남자의 10% 가량인 80만명이 비구와 사미승이었다. 오늘날 승려와 사미승의 수는 8만에서 12만명 가량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전체인구의 85%가 불교도로 알려 지고 있다.

큰 황금탑을 중심으로 450개의 하얀색 불탑이 세워져 있다. 둘레에는 민돈오아의 후원으로 제5차 결집을 하고, 대리석 판에 파리어로 불경을 새겨 비석처럼 세워 놓았다. 미얀마의 승단은 3개의 종파로 구성돼 있다. 3개 종파는 각각 최고지도자인 장로에 의해 통솔되고 있다.

모든 국민들의 일상생활은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국민들은 스님에게 예배하고, 그들의 수입의 일부를 보시하는 것을 상식으로 안다. 국민들의 교육도 대부분 사원에서 담당하고 있다. 8~9세의 어린이는 지방사찰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다. 미얀마에 불교사가 개교된 것은 11세기 경파간왕조를 세원 아나라타왕(1044-1017)때이다.

인도의 동부 앗삼 지방과 접경한 미얀마는 기원을 전후해서 인도문화의 영향권에 들게되 11세기 이전에 이미 인도의 많은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것은 민간신앙적 차원을 넘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가들은 미얀마에 불교가 공식으로 개교되기 이전에 이미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밀교, 그리고 힌두교가 버마에 들어왔었던 흔적을 발견해 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미얀마에 불교의 뿌리를 굳건히 내리게 한 것은 인도가 아닌 스리랑카였다. 아나라타왕은 남부버마의 몬족을 정복하고 파간에 수도를 정했으며, 스리랑카에서 팔리성전과 상좌부 불교를 전승해온 몬족출신의 비구 싱 아라한에게 불교를 사사받았다. 이후 아나라타왕은 부파계 불교와 대승불교, 밀교, 힌두교 등 갖가지 종교가 혼합돼 있던 버마지역에 상좌부계 불교를 확립하여 오늘날의 버마불교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미얀마에 불교를 전해 준 스리랑카는 9세기 중엽부터 남인도 치요라 왕조의 침입을 받아 精舍와 불탑이 파괴되는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得度式을 비롯한 승단의 의식을 행하는데 필요한 수의 비구가 모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무렵 즉위한 스리랑카의 비자야 바후 1세(1055~1100)는 미얀마에 사신을 파견해 스리랑카불교의 부흥을 요청했다. 아나라타왕은 비자야 바후의 요청에 따라 장로를 파견하는 외에 많은 경전을 함께 보내 주었다. 미얀마불교는 스리랑카가 16세기경 포르투갈의 침공을 받아 불교가 멸망 직전의 위치에 놓였을 때에도 자국의 장로들을 파견해상좌부 불교의 법통을 계승케 해준 일이 있다. 미얀마는 13세기경 스리랑카로부터 다시 상좌부 불교의 법통을 이어온 일이 있다.

파간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상좌부 불교가 함께 쇠퇴하게 되자, 뒤이어 일어난 페구왕조의 담마제디왕(1406~1491)은 1476년 비구와 사미 22명을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콜롬보 교외의 칼라니 (지금의 켈레니아)에서정식으로 수계를 받게 했다. 이때 담마제디왕은 칼라니에 비문을 남겨 당시의 교상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미얀마불교는 개교 이후 인근의 다른 불교국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순탄하게 발전해 왔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왕가의 절대적인 지지와 보호에 힘입은 것이었다.

미얀마불교가 정치권력에 의해 최초로 시련을 겪은 것은 1826년부터 1848년까지 22년간 영국의 식민통치 기간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배자들은 구두를 신은 채 불교도가 신성시하는 만달레이사원 안에 들어가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으며,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심기 위해 온갖 술책을 다 사용했다. 젊은퐁기(Pongi : 버마에서 스님을 지칭하는 말)들은 민족주의자가 되였다.

청년불교도협회가 1908년에 창설되었고, 일만불교도협회가 1911년 조직되어 反英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1년 粗稅 지불거절과 불매동맹을 촉구했던 반영운동의 지도적 승려 우 오타마는 식민통치당국에 체포되어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다른 승려들도 1930-1931년까지 민족주의자 사야산에 의해 지도된 영국지배에 저항하는 폭동에 참가했고. 다시 1938년 무력투쟁에 뛰어들었다. 미얀마의 독립운동에 불교가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단일 민족이 아닌 미얀마의 다양한 인종집단(미얀마족·샨족·몬족·아라칸족)을 한데 통합해 준 것이 불교였으며, 문맹자계층에서 엘리트에 이르는 다양한 집단을 연결시킨 것도 불교였다. 식민지배하에서 그들은 종족과 이해관계는 달라도 불교라는 공통점에 뭉쳐 서구 식민세력에 대항했다. (미얀마인이 되려면 불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미얀마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정부를 세우면서 우누가 수상에 취임했다. 아웅산의 뒤를 이어 미얀마 민족주의의 지도자로 추대된 우누는 열렬한 불교신자였다. 그의 영도하에 1945년과 1951년에 승가의 내부조직 강화를 위한 사찰법을 제정하였으며, 630만 달러를 투입해서 신설도서관을 포함한 불교대학과 랭군교외에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동굴과 세계평화사원을 축조했다. 우누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미얀마불교는 국제 불교활동의 주도권을 갖고, 태국·스리랑카와 함께 W.F.B를 창설하고, 1954년12월 제3차 세계불교도대회(랭군대회)를 지원했다.

특히 1961년에는 그의 노력에 의해 불교가 헌법상 국교로 공식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소수 종교의 반발 미얀마사회가 혼미에 빠지자 1962년 3월 2일 같은 불교도인 네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네 윈은 사회주의자로 버마의 사회주의화를 위해 불법사회주의 (Socialism D-harmigue)라는 독특한 이념을 정립시켰다.

그는 정치와 불교를 분리시키기 위해 1964년4월 반정부적 승려 92명을 체포하기도 했었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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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인구 4천 700만의 타이왕국은 전인구의 93%가 불교도다. 전국에는 2만 4천개의 사원이 있고 승려수는 17만 6천명이나 된다. 불교가 국교인 이 나라에서 국왕은 불교의 수호자이며, 남자는 만20세가 되면 일정기간 삭발하고 사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습관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태국의 단은 마하니카야(大衆派)와 담마유타니카야(正統派) 두 파로 나눠져 있다. 교세는 2만여개의 사원을 가지고 있는 대중파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이에 비해 정통파에 소속된 사원은 2천여개에 불과하다.

이 두개의 승단은 방콕에 각각 승가 최고의 교육기관인 마하추라콩코른(마하탓사원소재)대학과 마하마금(미원니엣사원소재) 대학에서 학사 승려들을 양성하고 있다. 비구들의 최고 교육기관인 두 대학은 상좌부 불교의 內典을 주로 강의하고 있으며 특히 파리어는 중요한 과목이다.

대학교육을 받은 승려들은 기꺼이 마을로 돌아와 교육의 혜택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민중들에게 자기의 학문을 베풀어준다. 대부분의 초등교육기관도 사원에 설치 돼 있어서 일반 청소년들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불교교육을 받고 있다.승려들의 사회적 역할은 미미한 정부시설 (학교·의료시설·경찰·사회 복지시설등) 에서 분쟁을 해결하고 고아들을 돌보는 것이다. 그들은 건축계획을 세우고 사원에서 배운 건축·목공·타일·벽돌쌓기·시멘트제조·심지어 의학적 재료까지 해준다

태국의 불교는 민중의 생활에 깊이 침투하여 사원은 사회생활의 중심역할을 한다. 태국 국민들은 출산·결혼·장례 등 모든 일상 생활을 불교의식으로 하고 있으며, 사원은 주민의 집회장이자 병원, 양로원 구실도 하고 있다.

남방불교의 전통을 지키는 태국에서는 포살과 자자를 엄격히 시행한다. 이때가 되면 신도들은 사찰로 가서 스님들을 공양하고 설법을 듣는다. 안거가 끝나고 실시하는 자자일에는 신도들이 法衣를 지어 스님들께 바친다. 매년 이맘때 태국의 국왕은 방콕시에서 차오프라야강을 건너 태국 제일의 아룬사원을 찾아가 금욕수련이 끝난 스님들에게 법의를 공양한다.

태국의 불교 역사는 불사리가 붕안 돼 있다는 다트 파놈사원의 전설을 고려하면 250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절은 佛滅후 8년에 최초로 착공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국에 상좌부 불교의 전통이 확립된 것은 14세기 아유티야왕조때다.

태국에는 수 천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중국 雲南 쪽에서 이주해온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인 수코타야왕조는1238년에야 메남강 중류지역에서 생겨났다. 타이지방에 수코타야왕조가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코메르족이 지배하고 었었으며, 그들의 대승불교와 힌두교가 혼합한 형태의 불교를 수용했다. 이보다 조금 앞서 11세기에는 버마의 파간왕조가 들어서서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불교를 받아들였는데, 그 영향은 이 지역에서 잡다한 불교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수코타야왕조의 라마캄헹왕(1275~1315)은 독실한 불교신도로 버마로부터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수코타야왕조는 1350년 리타이왕때 메남강 하류 아유타야에서 일어난 아유타야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새 왕조의 출현은 태국에서 불교를 국교로 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라마티파터를 개조로 하는 아유타야왕조는 18세기가 400년간 계속된다.

이 왕조의 시리슈리아밤사 라마왕은 1361년 스리랑카에 사신을 판견해 상좌부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여 국가적 종교로 삼았다. 철학과 문학을 통달한 학자였던 왕은 이 때 스리랑카에서 상가라자(僧王)를 초청하여 팔리어 성전과 계율·의식을 전래하도록했다. 그 후 이 왕조의 제왕들은 불교를 신봉하여 수도 아유타야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사원과 불탑이 건립되어 불교국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과시했다.

또 국위도 크게 떨쳐 동쪽으로 메콩강 지방을 정복하고 남쪽으로는 말레이반도에 불교를 역수출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스리랑카 최대의 승단인 시암미카야다. 400년에 걸쳐 번성하던 아유타야왕조는 1769년 버마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이와 함께 대소의 왕궁과 사원은 많이 파괴되고 말았다. 타이의 새 왕조는 아유타야 시대의 遺將파라야 탁신에 의해 端初가 열렸다. 탁신은 아유타야가 멸망한 뒤 6개월만에 버마인을 몰아내고 톤부리를 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그는 포악한 정치를 하여 신망을 얻지 못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왕궁으로 고승들을 초청해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 너희들 가운데 수행이 나보다 낮은자는 나에게 예배를 하라」고 했다. 이에 대개의 고승들은 그에게 예배를 했으나, 승단의 최고 원로승은 「출가자가 재가자에 예배하는 것은 불법에 없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화가 난 탁신은 그를 따르던 스님들을 체포해 태형에 처하고, 아첨하는 승려가 승정이 되도록 했다. 새로 승정의 자리에 오른 아첨꾼들은 왕을 향해「시암최고의 수행자이며, 부처님과도 비교할 수없는 최고의 왕자」라고 추켜세우며 그의 비위를 맞췄다.

그러나 탁신은 그의 안정에 반대하는 부하 차크리장군의 반정에 의해 살해됐다. 차크리는 왕궁을 톤부리에서 강 건너의 방콕으로 옮긴 뒤 이곳을 새로운 王都로 정하고 1782년 방콕왕조(일명 차크리왕조)를 세웠다. 새 왕은 즉위 즉시 구금되어 있던 승정을 풀어 지위를 회복해 주고, 탁신왕에게 아첨하던 승려들은 불도를 문란하게 한 죄를 물어 모두 환속시켰다. 이어 그는 경·을·논三藏을 교정하는 회의를 열어 교정된 삼장을 특별한 법당에 봉안했다. 1851년 새 왕으로 즉위한 몽구트는 태국불교의 개혁자로 유명한 라마 4세 그는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36년간 승원에서 비구생활을 한 인물이다.

환속하여 왕위에 오른 뒤에는 불교교단을 개혁하여 계율의 엄수를 강조했다. 그 결과 교단은 개혁파인 담마유타니카야와 정통파인 마하니카야로 나누어졌다. 담마유타니카야는 몽구트왕의 아들이 부친의 뜻에 따라 1894년에 독립한 파로서 특히 계율을 엄정하게 지켰다. 이리하여 탁신왕에 의해 어지럽게 된 승단은 완전한 숙청을 이루었다.

몽구트왕은 이 밖에도 노예제도·도박·음주·아편 등을 금지시켰고, 여성의 지위향상, 학술의 장려, 서적 출판등 문화정책도 적극적으로 펼쳐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태국은 그 후 1932년 6월 인민당에 의한 입헌혁명으로 종래의 전제군주에서 입헌군주국으로 정체를 바꾸고, 근대적 독립국가로 면모를 일신했다. 국호를 종래의 시암(Siam)에서 타이(Thai)로 바꾼 것도 이때다.

타이는 (자유)라는 뜻이다. 태국은 동남아시아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서구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다. 이는 태국의 지리적 위치가 백인세력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 탓이기는 하지만, 불교를 중심으로 한 민족적 단결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戰後 태국불교는 1950년 스리랑카와 함께 세계불교도우의회(W.F.B)를 창설하는 유력한 멤버로 참여했으며, 1958년 11월에는 방콕에서, 1966년 11월에는 젬마이에서 5회와 8회의 세계불교도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라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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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라오스는 전국토 면적 23만 6천 800㎢가 해안선이 없는 완전한 내륙국가다. 동쪽으로는 베트남, 서북쪽은 버마, 서쪽은 태국, 남쪽은 캄보디아와 인접하고 있으며, 인구는 346만명, 그 중의 절반이 라오족이다. 이들은 대개 평야지대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메오족·야오족·큼족 등 30여 종족은 고산지대에 살고 있다.

1975년 인도차이나반도가 베트남과 함께 공산화되면서 공산국가가 된 라오스는 현재 수아누웅이 정권을 장악하여 친소노선을 걷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불교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인근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상황에 비추어 대단히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공산화되기 전의 라오스는 동남아시아에서 중요한 불교국가의 하나였다.

1965년 라오스 종교국의 발표에 따르면 전 국민의 95%가 불교도이며, 승려수는 12만 845명(비구 : 5천 487명, 사미 . 5천 358명)이었다. 사원의 수는 베트남계를 포함해서 1천726개. 이를 평균치로 환산하면 각 절당 비구가 3인, 사미가 4.2명 꼴로 나누어진다. 같은 시기의 태국은 각 절당 비구가 평균 6.5인으로 환산돼 태국보다 라오스가사원의 비구가 약간 적었으나, 사미는 다소 높았다. 그러나 비구와 사미를 합하면 태국은 10인, 라오스 7.2민으로 태국이 라오스보다 높았다. 라오스는 불교가 국교로 되어 있었지만, 승려의 정치개입은 허락되지 않았다.

1960년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정치적으로 움직인 승려가 약간은 있었고, 그들의 파데트라오 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당시의 베트남과 같이 반정부 데모를 주동하는 승려는 없었다. 라오스의 불교교단은 태국과 마찬가지로 마하니카야파와 담마유타니카야파로 나누어져 있다.

종파별 비율은 마하니카야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남부지방은 태국쪽과의 관계로 담마유타니카야의 사원이 몇 개 있으나, 수도 브양트얀은 마하니카야의사원이 50개, 담마유타니카야는 2개뿐이다. 교단의 최고책임자인 상가라자(法王)는 대대로 마하니카야에 속한 스님이 맡았다. 自派만이 아닌 전 라오스교단을 관장한다.

상가라자 밑에는 5명의 고승으로 구성된 종교회의가 있으며, 지방에는 주지사에 해당하는 스님이 관할 지역을 관장한다. 일반적으로 양가의 자제는 1개월에서 3개월 정도 견습승(沙彌)으로 출가생활을 경험하는 전통을 가진고 있다. 이러한 생활을 싫어하는 젊은이도 없지는 않으나, 그들의 부모는 자식이 수도생활을 경험하기를 희망하는 펀이다. 승려의 출가는 17세미만의 소년은 부모의 허락만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 이상이 되면 촌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가 군대에 들어가야 하는지의 문제를 판가름하기 위해서이다. 출가자는 한 푼의 돈이 없어도 된다. 때문에 빈곤한 가정의 자제들이 출가하여 교육을 받은 후 환속하는 경우도 많이 있으나, 이를 별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라오스 불교는 사회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라오스의 역사는 1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전에는 인도네시아족의 지배를 받다가 11세기 전부터 라오족이 터를 잡기 시작했다. 라오스는 처음에는 라오족에 의해 왕조가 성립된 것은 14세기 중엽 메콩강 상류지역에 파킨이 세운 란창왕조다. 란창의 파킨은 브양트얀을 종소기키고, 로앙프라방에 왕도를 세웠다. 루앙프라방은 브양트얀과 같이 메콩강을 바라보는 라오스의 중심지로서 라오스의 역사는 이 두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라오스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11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라오족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상좌부 불교의 전통이 확립돼 있었다. 라오스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불교의 영향을 받아 살생을 삼가했으며 인사할 때도 합장을 했다. 불교가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란창왕조의 포테이사고 불교를 보호하여 이후 라오스불교의 기초를 정립했다. 이 같은 영향으로 라오스에서는 국가적 행사나 민간의 관혼상제를 모두 불교식으로 행하여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왕 다음으로 높았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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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1

중국5호 16국 중에서 불교가 가장 융성한 나라는 후조(後懲)·전진(前秦)·후진(徒泰)·북량(北凉) 등 4개국이다. 후조는 친조를 멸망하고 거의 북방의 대부분을 통일한 대국으로서 서륙·석호 기타의 일족은 불교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아마 후조 불교를 대표하는 걸승 불도정(佛圖澄)의 감화에 의한 것으로 본다.

볼도징은 번역도 없고 또는 저술도 없다. 그러나 그 덕망의 감화와 그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불교에 큰 공헌을 남겼다.<고승전>에 의하면, 불도징의 성은 백(索)씨라고 하였으므로 물론 구자국의 사람이다.

서보의 회제 영가4년(310) 낙양에 와서 석륵ㆍ석호에게 우대를 받고, 후조건식 14년(訓8) 117세로 입적할 때까지 약 38년간 불법홍통에 진력하였다. 그가 불교 사상에 남긴 공적중 최대의 것은 폭역한 군주 석륵·석호로 하여금 폭정을 막고, 민중을 도탄의 고통으로부터 면하게 한 것과 종래의 출가는 주로 외래인에 한하고 한인에게는 허가되지 않던 것을 징의 노력에 의하여 한민족의 출가가 공허된 것이다.

<고증전>에 의하면 불도징은 처음에 낙양에 불사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유요가 박양당을 공격하여 우난하였기 매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사탑을 건조하는 것은 봉불의 정성을 보이는 것이라 하여 한인이나 호인이나 도속이 다투어 행하였다. 불도징은 광초 8년(325) 불자와 함께 관사(官寺)로부터 중사(中寺)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관사나 중사나 모두 업(脚)에 있으며 석씨가 세운 절이다.

석호의 상서 장랑·장이 등은 집이 부유하고 불교를 선봉하였으므로 각각 큰 탑을 세웠다. 석호는 임장에 구탕을 수치하였다. 불도징이 지나는 주군마다 불사를 세워 893개소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절은 징의 권화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신자나 거사간에 불사건립은 공덕이 있는 법사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불도징이 황반에 이르러 석호화 결별할 즈음, 그는 다음과 같이 설법하였다.

「생자가 죽는 것은 상도이며, 수의 장단은 정하여져 있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도행은 온전히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제 마음에 걸리는 것은 국가가 마음을 불리(佛理:에 두고 법은 받드러 사묘를 흥기하여 숭현장리하면서도 정치는 맹렬하고 형벌은 혹람했다. 이와 같은 사태는 불교의 본지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사묘흥기에 의한 복우도 마침내 형통할 수 없다. 만일 마음을 바꾸어 하민을 혜육할 것 같으면, 국조연장하고 도속은 그 은경에 목욕하므로 자기의 명을 버리더라도 유한이 없다.」하였다.

이 설법 중에는 당시의 불사조입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이 피상적수복의 목적에서 나온 것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군주에게 선정이 불교를 믿는 참 도리임을 설파하여 선정을 권하였다.
조사·조형이 성해지던 그것과 상반하여 승니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승려의 수가 격중하면 그 중에서 비행자가 속출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리하여 승려의 석호의 치하에 사문에 대한 취체강화의 문제가 야기하였다. 그리하여 중서저작랑(中書著作郎)은 부처님은 천자가 봉사할 것이 아니라며 조인이절에 가서 소향예배하는 것을 들어주지 말고, 사문이 된 자는 환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서역외국의 신이므로 평화의 도와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왕도등의 강경한 견해는 국왕인 석호가 호족임을 생각치못했으므로 도리어 역효과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 불도징의 문하는 1만명이 되나, 그 중에는 도안·법화·축법태·축법아·법두·법상 등 다음 시대의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을 낸 것도 그의 큰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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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2

전진(前秦)은 16국중 가장 강대한 나라였다.

부견이 1백 대군으로써 남방 동진(東晋)을 병탄하고자 하였다가 비수의 일전에서 대패하여 드디어 와해하는 기인이 되기는 하였으나, 불교에 있어서는 대단월이었다. 전진의 불교는 후조의 불도징과 같이 도안이 그 대표자이다. 도안은 속성이 위(衛)써요, 상산의 부유인이다.

12세에 출가하니, 그 전기에, 신지 총민 이형모기루(神智聰敏而形貌其陋)라 함과 같이 형모가 초루하기 때문에 그 스승에게 중히 여기는 바 못되고 3년간 전사(圈舍)에 억역되었으나, 항상 경권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 한번 읽으면 암송하였다고한다. 스님은 그 총명에 놀라 자유유학을 허락하니 업에 와서 중사에서 불도징을 만났다. 징이 보고 찬탄하여 더불어 종일 담론하었으나 대중은 형모가 볼 것이 없다고 하여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징이 이사람의 지식은 그대들이 주필할 바가 아니라 하고 제자를 삼으니, 징이 구하면 안이 매양 복술하였다고 한다. 도안이 불도징에 사사한 것은 징이 업도에 주한 면년 13년중의 어느 기간이 되며, 그가 처음 만난 때는 불도징은 이미 100세가 넘었을 것이다.

도안은 30세 전후의 장년시대, 호학의 의기가 넘쳐 흐를 때이다. 불도징이 입적한 다음해에는 후조의 주 석호가 몰하고, 글 후에는 내란이 일어나 염민의 찬탈등이 있어서 일만 대중과 함께 왕실 여상산에 들어갔다가 도하하여 육혼산에서 목식수학(木食修學)하고 있었으나 다시 모용준(慕容俊)의 군사가 육혼에 핍박하므로, 축법태는 제자 10여인과 더불어 양자강을 따라 남강의 건강에 나아가게 하고, 법화는 강상의 촉에 들어가고, 도안은 만방교화의 목적으로 제자 400여인과 함께 양양 백마사에 이주하였다.

양양에 주하기 15년, 그 도풍은 천하를 풍미하였다. 북방의 패를 잡고 있던 부견은 도안을 장안에 영입하려는 원이 간절하였던 바 그 후 부하에게 명하여 양양을 공략하고 도안을 영입하니, 부견이 좌우에 말하기를,

「내 10만의 병을 발하여 양양을 공취하니, 얻는 바는 단지 1인 반 뿐이다. 1인은 도안이요, 반은 습착치라.」고 하였다.

습착치는 양양의 유자로서 천하 제일인자로 자임하고 있던 바 도안을 만나,「미천의석도안 여기 있다.」라고 하여 호염이 되었다 한다. 도안은 대원 4년 장안에 와서 5중사에 주하고 도제들은 교양하는 한편 부견을 선도하였다.

그는 전진의 건원 21년(385) 2월에 74 세로 병없이 입적하였다.

도안이 불교사상에 끼친 공적 가운데 특기할 것을 몇 가지 들면,

(1) 5호 이후 경전의 번역은 연월을 따라 증가하나 시일의 경과에 따라 역자년대의 불명한 것이 점점 많아지고. 또 당시는 많은 개인의 사업으로 각처에서 역출한 것이므로 산실을 면치 못하였다. 도안은 이것을 우려하여 고심참담해서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緣)을 저작하여 당시는 물론 후대에 많은 편리를 주었다.
(2) 도안은 이와 같이 목록을 작성하는 동시에 경전번역에 많은 힘을 써서 당시 장안에 온 범증의 역역에도 기어 번역사업을 도왔다. 이 시대는 역경이 유치하였기 때문에 경론을 강하는 자도 그 대의를 서술하고 경문을 전독할 뿐이요.

경문의 시종을 해석하고 그 진의를 찬양하는 자가 없었다. 도안은 이러한 부족을 깨달고 경론의 연구를 깊이하여 제경에 서를 지으며, 경전을 강술하는 동시에 기타 경전에 주석을 한 것이 많으니 <역대삼보기>에는 24부에 달한다고 하였고,

종래의 뜻이 통하지 아니한 것을 해명하여 경전 해석상에 다대한 공적을 남겼다.

(3) 다음은 승제작성(憎制作成)이다.
종래출가의 성은 출생국 혹은 스승의 성을 받았다. 예컨대 강맹양은 강거요, 지루가참은 월지이며, 안세고는 안식인 것과 같다.

그런데 도안은 출가가 모두 석존으로부터 시작하였으므로 석으로써 성을 할 것이라 하며, 이 이후는 모두 이것에 따랐다. 또는 승전의 행의방법으로 <승니궤범불법헌장> 3대를 제작하였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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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3

전진의 뒤를 이어 건립한 후진은 불교가 강성하기가 전진시대보다 수승하였다. 특히 진주(秦主) 도장(姚養)·요흥(姚興)의 불교신앙은 도저히 부견이 추급할 수 없을 정도이었다.

부견은 불교에 의한 치세를 목적으로 하였으나 후진주에 있어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불교의 연구에까지 들어갔었다.
후진의 불교 대표자는 나집이다. 후한 이래 진에 이르리까지 서역의 삼장이 계속 와서 각종 경전을 역출하니, 교학이 일성하였으나 모두 개인적 사업이었고 대규모의 역경사업은 되지 못하였다.

국가의 보호하에 불전연구를 비롯하여 중국 역경사업에 일신개혁을 획한 것은 나집이다. 당의 현장과 함께 역경사상의 2대 역성이라고 호칭되며 역경의 완비와 역어의 유창함은 그 전후를 구분함과 동시에 불교교학은 나집에 의하여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는데, 나집에 이르러서 특히 대승교가 전래하고 종파라는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구마라집(344~413)은 구가국사람으로 7세에 출가하여 비담(毘曇)을 독송하여 그 뜻을 통하고, 9세 때에 어머니를 따라 계빈에 들어가 반두달다로부터 잡장(雜蒸)과 중·장(中·長) 2함을 받고 어머니와 함께 쿠자에 돌아왔고, 후에 소륵국에 이르러서 아비담육족제른(阿毘曇六足諸論) 및 <증일아항>을 외우고 다시 구진에 돌아와서 4위타(關韋陀) 5명 (五明) 제론 기타의 외전을 배우고, 불타사사에게서 십송을(十誦律)을배우고 비마라차(卑摩羅叉)에게서 율을 받고, 수리야소마에게서 대승을 자품하여 중·백 2론을 배우고, (방광경)을 위시한 그 밖의 대승경을 읽으니, 그 명성이 서역에도 전보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전진과 부견의 관중에 의거하여 중원을 평정하고 영토를 확장함과 박학의 사(士)를 초치하려고 건원 18년 여광으로 하여금 서방의 쿠자국을 공략하여 나집삼장을 영입하도록 명령하였다. 여광이전승하여 나집삼장과 함께 양주에 이르렀으나 부견은 이미 죽고 중원이 크게 혼란하다는 소식을 듣고, 궁광이 386년 자립 위주하니, 나집도 이곳에 주하기 15년이었다.

그러나 별로 교학의 깊이를 베풀 길이 없어 세월을 허송하였다. 후진의 요흥은 홍시 3년(401) 경주를 공취하여 장안으로 영입하니 58세의 노령으로 도안 몰후 16년이요, 혜원이 여산에서 교세를 크게 펴고 있던 시대이었다. 요흥은 삼장을 모시고 서명각, 소요원을 역장으로하고, 국왕이 친히 백궁을 거느리고 열석하여 필수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삼장은 장안에 있으면서 역경사업에 종사한지 12년, 홍시 15년에 70세에 입적하였다.
그가 역출한 경전은 <大品般若>·<小品般浩>·<金測般若>·<首辯嚴經>·<維摩經>·<十注經> 곧 (十地經>·<法華經>·<無量壽經> 곧 <阿彌陀經>·<焚綢經>·<禪法要解>·<坐諒三昧經>·<中論>·<百論>·<十二門論>·<大督度論>·<十住毘婆沙論>·<成實論> 등 35부 348권에 달하였는데 후세의 교학에 영향을 끼친 바가 자못 크다.
그리고 이들 역출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고, 역장이 그대로 강설의 장소이었다. 그리하여 나집에 운집하는 문하 영준이 항상 수천명에 달하였다.

역출에는 100인, <대품반약경>에는 500인, (유마경)에는 1,200인, <법화경>·<사익경>에는 각각 2,000인이 그 역장에 열석하였다고 하니, 그 성대한 강설의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문하에 3,080인의 달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승조·승예·도생·도융을 관내에 4성이라 하고, 또 여기에 도항·담영(曇點)·혜관·혜엄을 가하여 팔숙상수(八宿上首)라고 한다. 다시 그 중에서 승조·도생이 가장 특출했었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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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4

이상 4국 이외에 다시 북방불교에 대하여 주의할 것은 돈황(감숙성)은 서람이 도읍한 곳으로서 서역과 중국과의 관문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로에 해당하는 자못 중요한 지방이다. 여기에는 불교도 일찍 전하여졌으며 불교 사원도 건립되었다.

돈황보살이라고 지칭된 서진의 축법호를 위시하여서 진으로부터 동진에 이르기까지 많은 명승을 배출한 곳이다. 또한 저 유명한 돈황의 석굴 천불동은 전진이 건원 2년(366) 사문 악전에 의하여 개착되어 법랑선사 및 칙사 건평공·동양왕등에 의하여 계속 개착되었다.

이 곳은 운강·용문과 함께 세계에 제일가는 명굴이다. 이 석굴로부터 많은 사료도 취급되고 있다. 불교 관계의 것도 많이 나와서 돈황불교가 성황했던 것도 알 수 있다.

서진(西晋)이 서북 이민국에게 망하자, 한민족이 북방으로부터 남하하여 동진(東晋)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 문명이 수입되어 강남의 문명이 건설할 기초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동진은 황하의 문화가 남하하여 양자강 이남의 문화를 개척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물론 지금까지 오의 문화가 있기는 하나 북방문화에 대하여 남방문화를 건설한 것은 동진시대부터이다. 동진의 불교에 있어서도 북방의 불교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를 대표하여 후세에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많다. 혜원·불타발타라(각현)·법현을 위시하여 지둔·축잠·시리밀다라 등이 그들이다.

특히 혜원은 여산에 있어서 당시 북방남북 거성이었다. 혜원은 안문인으로 본성은 가씨, 어려서 유학·노장학을 수하고, 20세 시에 도안이 태평의 항산에서 학도를 교육한다는 말을 듣고, 거기가 종사하였으며, 후에 (반야경)의 강연에 참여하여 활연대오하였다. 처음 매씨 혜지와 함께 출가하여 20여년간 도안에게 사사하니, 도안이 그 영재를 인정하여 항상, 사도유동국기 재원호(使道流來國其在遠乎)라고 하였다 하니, 그가 영재임을 알 수 있으며 해행이 원만하여 과연 학도의 영도가 될 만하였다.

도안이 양양에 이주할 때 혜원도 수행하였고, 도안이 장안에 영입됨에 사자상분하여 도안은 북으로 혜원은 남으로 향하여 제자 수10인과 함께 형주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부산에 나아가려던 도중, 심양에 와서 여산의 승경을 요망하고 등산의 정을 금할 수없어 드디어 산에 올랐다. 그런데 이 때 동문인 혜영등이 먼저 와서 있었으므로 구교의 혜원을 만류할 뿐만 아니라, 혜원 또한 여산을 애호하여 영주할 곳으로 정하고 혜영거지의 서림사 동쪽에 절을 짓고 동림사라하였다.

혜원이 여산에 주하게 됨에 도의 뜻이 있는 자가, 도속을 막론하고 그 고풍을 사모하여 사방으로부터 운집하니, 여산은 남방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산에 들어가 34년간 한번도 하산하지 않았고, 내객이 있어 전송할 때에도 호계로써 경계를 삼았고. 덕행이 고결하여 일세를 감복케 하였다.

동진의희 14년(416) 83세로서 입적하였다.

혜원이 교학상에 끼친 공적을 들면

① 당시는 옛반상주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혜원은「佛題至極 至極則無變 無變之理 登有窮耶」라 하며 (법성론)을 지어 지극히 무변함을 논하였다. 라집삼장이 이논을 보고,「登火妙載」이리오 라고 찬란하였다.

그 때 (대지도론)을 역출하니, 요흥이 그 서문을 명하나 감히 응하는 자가없어 멀리 혜원에게 글을 보내 질문을 청하니 사가 그 서문을 짓고, 또 (대지도론) 20권을 지어 학자를 계발하니 사가 얼마나 불교의 뜻에 깊이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② 혜원의 공적으로서 특필할 것은 백연사이다.
혜원이 여산에 거주할 때 당시 지명의 유자·도사·유덕의 고승이 육면하여 사문에 기지하였다. 동림사의 백연지방에 방사를 결구하여 아미타불의 존상을 안치하고 염불회를 열으니, 이 집회를 백연사라하고, 128명중 지명의 18명을 여산의 18현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신앙으로써 모인 결사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미중유의 성사로서 당시 일반인은 청담공론에 압증이 나서 실제적인 신앙을 구하고, 도솔왕생의 사상, 나아가 서방왕생의 사상이 되었다. (무량수경)을 번역하기 6회를 거듭하고, (반야삼매경) 등의 제경에서 아미타불을 찬탄하였으며 도안이 (정토론)을 지어 미타의 사상을 고취함에 정토신앙은 아주 원숙해졌으며, 이것이 혜원에 이르러 순연한 신앙중심의 결사가 된 것이다.

원·명시대에 이르러서도 민간신앙으로서 운선히 이어 내려와 중국 정사교의 기초를 열었다. 이 정사교의 단체는 연면히 불교교단 발전의 일형체라고 할 수 있으며, 근대까지도 혜원의 유풍이 상존하여 여산류의 염불이라 하고, 염불과 선과의 일치함을 종지로 하였으므로 담란 도작·선도류의 정토교와는 다소 상이점이 있다. 그러나 중국정토교의 창시자로서 후세 정토교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삼학균수한 수행을 중시한 것은 해원불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혜원은 삼학의 실수에 의하여 자금 몸은 가지기 극히 엄숙하여 속계와 멀리하고 권문에 아부하지 않았다 <不敬王者論>으로서 그 풍격을 알 것이니, 동진 성제 시 수영이란 사람이 정사에 참여하여 사문도 왕자를 병예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실행이 못되고, 안제 시에 상현이한 사람이 경왕론을 창함에 혜원이 이를 듣고, 가사는 조종의 옷이 아니며 발우는 묘당의 그릇이 아니다. 사문은 진외의 인으로서 왕자에게 경을 치하지 않는다는 등 <沙門不敬王者論> 4편을 지었다.
이것으로써 혜원의 초속탈진의 도를 알 수 있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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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5

남조는 모두 건강(南京)에 도읍하여 남조문화를 건설하였는데, 송의 무제·문제 이래 제·양·진대는 모두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외원하였다. 그중에서 양대 55년은 남조불교의 최융성을 이룬 시대이며, 그 대표자 양무제의 불교신앙을 중국 역대제왕중 누구도 이에 비할 자가 없을 정도로 깊었다. 양대라 할지라도 무제의 48년에 의하여 점거돼 있다.
무제의 비범한 재주와 그 호학은 다만 불교뿐만 아니라 일반 문화에 융성을 가져왔고, 강좌에 문물이 열리면서부터 200년간은 더욱 융성하였다.
무제의 성은 소(簫)씨. 이름은 연(衍)이다.
처음에는 유학·도교를 연구하여 정통하고, 불교에 대해서는 별로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는데, 불교에 접속하기 시작하여서는 곧 귀의하고 깊이 연구하여 제경의 의소도 제작하고 강설도 하였다. 다만 제작 및 강설을 할 뿐만 아니라 몸소 불사에도 적극 참여하여, 천감 3년(504) 4월 8일의 불탄일을 기하여 도속 2만 여인을 인솔하고 중운전에서 사도봉불식(捨道奉佛式)을 거행하고, 공경·백궁·종족에 칙하여 도교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토록 하였다.
천감 10년에는 단주육문을 공표하고, 다시 천감 16년에는 제사에 생류를 금하고과로서 대체시키며, 대의 (大醫)로 하여금 생류를 약으로 쓰는 것을 금하였다.
물론 지금까지 오의 문화가 있기는 하나 북방문화에 대하여 남방문화를 건설한 것은 동진시대부터이다. 동진의 불교에 있어서도 북방의 불교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를 대표하여 후세에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많다. 혜원·불타발타라(각현)·법현을 위시하여 지둔·축잠·시리밀다라 등이 그들이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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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반도 중앙부에 위치한 나라로 한때「크메르」라고도 불리웠으며, 인구는 800만 명이다. 전설에 의하면 고대 캄보디아는 인도에서 건너온 왕이 이 나라의 여왕과 결혼하여 개국했다고 한다.이 전설에서 보듯이 캄보디아의 문화와 종교는 인도로부터 전래되었음이 확실하다.이 나라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종교는 힌두교와 불교로서 민중의 생활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캄보디아에서는 힌두교와 불교가 혼재하여 있기 때문에 불교에는 미신적, 토속적 요소가 많다. 지금도 남아있는 앙코르와트의 유적은 불교가 캄보디아에서 힌두교와 어떻게 혼융되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11세기 이후 확립된 상좌부 불교의 전통은 캄보디아를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중요한 불교국으로 발전시켰다. 캄보디아의 젊은이들은 누구나 한 번를 출가생활을 하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으며, 사원에서의 교육은 그들이 평생 동안 살아가는 삶의 표준적 가치를 제공해 주고 있다.

승단의 조직은 태국과 마찬가지로 마하니카야와 담아유타니카야 양파로 나누어져 있다. 승려의 수는 1970년 통계에 따르면 마하니카야가 5만 3천 200명, 담마유타카야가 1천 300명 등 5만 4500명이었다. 사찰수는 마하니카야가 2천 980개, 담마유타니카야가 110개로 캄보디야가 110개로캄보디아 전체로는 3천90개다. 그러나1946년에 비하면 승려의 수는 약간 줄어든 반면 사찰은 계속 늘어났다. 1946년 캄보디아 불교는 2천 696개의 사원에 6만 5천48명의 승려가 있었다.

이 나라의 승단은 상가나요크라 불리우는首長에 의해 통솔되는데, 서로 독립되어 각자의 교단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캄보디아 불교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사회 교육적 기능이다. 대개의 교육기관은 사찰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따라서 국민전체를 대상으로 자연스러운 종교 교육을 하게된다. 1970년 통계에 따르면 캄보디아 불교사원에서 운영한 초등파리어 학교는 529개, 학생수는 1만 983명, 불교고등학교는 2개로 학생수는 500명, 불교대학은 1개로 112명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활동은 1975년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폴포트에 의해 수십만이 학살된 캄보디아는 종교도 완전히 없애 버렸다. 폴포트를 내몰고 헴 삼린 정권이 들어서면서 몇 군데의 사원이 복구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승려가 되는 것은 막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과학적 유물론은 미신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며 폴포트의 학살 만행을 피해 용케도 살아남은 스님들이 더 이상 불교교리를 전파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최근 한 서방기자의 르포에 따르면,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된 여러 가지 그림이나 조각을 팔던 상점들에는 옛날의 풍경이 사라진지 오래이고 안드로포프나 헴랜의 초상화를 팔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캄보디아 불교의 현재적 상황이 어떠한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민중의 삶에는 불교적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었을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이 나라의 불교가 수 천년에 걸쳐 민중들의 생활과 깊은 관계를 맺어오면서 그들과 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기원전 3세기경에 아쇼카왕이 파견한 전도승에 의해서라고 알려지고 있다. 이것은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것과 때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역사는 1세기말 메콩강 하류에서 扶南이란 나라가 세워진 것에서부터 시작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캄보디아 불교사의 단초로는 볼 수 없다.

캄보디아 불교사의 첫 장은 3세기초 열렬한 불교신도였던 范蔓王시대 때부터 비롯된다. 그는 불사를 짓고 승려를 존중했으며, 불교를 보호하는 정책을했다. 이어 5세기 초, 카운디야왕조가 들어서면서 캄보디아의 불교는 크게 융성하여 승가바라(460-524)와 같은 유명한 고승을 배출했다. 그는 512년 阿育王經등 많은 불전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가 梁武燾의 명을 받아 역경에 종사했다. 이에 앞서 關耶跋摩王 때에는 雌伽仙 비구가 齋南의 무제에게 파견돼 불상을 헌납하고(484년) 돌아오기도 했다. 扶南時代의 纖盛했던 불교의 상황은 중국의 구법고승 義淨三藏(653~713)이 쓴 동남아여행기(南海寄歸內法傳)에도 소상한 기록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부남시대의 캄보디아에는 正量部와 有部의 불교가 유행했었다고 한다. 동남아의 중심 국가로 6세기까지 흥성했던 부남은 속국이었던 眞腦의 샤나바르만왕에 의해 멸망했다. 샤나바르만시대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대승불교가 移入됐다는 사실이다. 최근 발견된 자료는 이 시대에 관세음보살상 건립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진랍은 한때 융성했으나, 왕위계승 문제가 원인이 되어 남북으로 분열됐다. 이를 수진랍(南) 육진랍(北)이라 하는데, 9세기초 자야바르만 2세가 재통일을 하고 앙코르왕조를 열었다. 앙코르왕조의 3대왕인 야쇼바루만 1세는 수도를 앙코르 톰으로 옮기고 대승불교를 공식으로 승인했다. 그는 특히 세계적 걸작품으로 알려진 앙크로와트(T城寺)를 조영한 왕으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캄보디아 특유의 힌두교와 불교가 혼재하고 있다. 이어 1002년에 즉위한 스리아바루만 1세는 스스로 불교도입을 선언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하지만 앙코르왕조는 힌두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를 탄압하지 않았으며 소승과 대승도 엄밀하게 따지지 않았다. 1181년에는 캄보디아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자야바루만 7세가 즉위하여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다.

그는 열렬한 불교신도로서 특히 관음신앙이 대단히 깊어 여러 곳의 거대한 암석에 관세음보살상을 조각했다.「앙코르의 미소」 또는 「크메르의 미소」라 불리우는 이 조각은 눈을 반쯤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신비한 미소를 띠고 있어서, 크메르불교 미술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앙코르왕조는 자야바루만 7세 시대를 절정으로 점차 쇠퇴하여, 13-15세기에는 태국의 침공을 받아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겼으나 서서히 멸망하고 말았다.

캄보디아의 근대사는 19세기 프랑스의 식민지배로 시작된다. 프랑스는 불교의 전교(傳敎)를 억압했으나, 앙코르의 유적군(遺跡群)은 그들에 의해 발굴되고 보호됐다.오늘날 세계에 자랑하는 앙코르의 유적은1989년 월남한 하노이에 세워졌던 「프랑스극동학원」의 조직적 연구에 의한 것이 많다. 외국의 지배아래 있으면서도 캄보디아국민의 불교에 대한 신앙은 열렬했다. 황의를 입은 승려들은 승복을 입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경을 받았으며, 외국인들은 캄보디아를 <승려의 나라>라고 부를 정도였다.

불기 2494년(1950년)에는 인도에서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建連)의 유골을 봉안해 와 대대적인 법회를 가졌다. 16세기 이후 전통적으로 왕실의 보호를 받아온 라오스 불교는 1947년 헌법개정때 국교로 정해졌다. 또 1951년에는 태국의 선례를 쫓아 <라오스 상가법>을 제정했다. 1957년에는 불멸 2500년 기념식도 성대히 가졌다.

라오스의 헌법 前文에는
「‥‥라오스인민은이 헌법에 의해 다음의 의무를 진다. 조국에 대한 신봉, 종교의 존중‥‥」그리고, 본문7조에는「불교를 국교로 한다. 왕은 그 최고의 보호자가 된다」.

제 8조는「왕은 열렬한 불교신도가 아니면 안 된다」고 명시했었다. 라오스의 불교사원 가운데 유명한 절들을 수도 브양트얀에 있는 尨龍寺·中央寺院·타트루앙사·와트프라크사 등을 꼽을 수 있다. 방룡사는 수도 브양트얀에 있는 유일한 베트남계 사원으로 규모가 크고 잘 정비되어 있다. 이 절에는 베트남인과 중국계 회교불교신도들이 나오고 있다. 법당에서 본존으로 석가모니불을 모셨고,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좌우보처로 봉안했다.

중국계대승불교의 교리에 따라 아침에는 능엄주, 저녁에는 아미타경을 봉독하는 모습이 남방 불교권에서는 특이 하다 중앙사원은 마하니카야파에 속한 두 번째 큰절로 500여년 전에 창건한 고찰이다. 장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은 라오스의 불교사원을 대표한다. 경내에는 팔리어학교도 부설돼 있으며, 비구와 사미 200여명이 4학급으로 나눠 공부를 한다. 이 학교에서는 매년 3월 졸업시험을 치르는데 이 시험에 합격해 졸업한 비구는 높은 대우를 받는다.

또 이 절에서는 일반 청소년들을 위해 야간학교와 일요학교도 경내에 운영하여 사회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광대한 부지에 금색과 흑색의 첨탑이 높게 솟아 있으며 그 밑에는 높은 기단의 회랑이 주위에 둘러져 있다.

이 절의 탑은「황금의 탑」 또는「국왕의 탑」이라고 불려지고 있는데 탑 속에는 거대한 에메랄드불상이 안치돼 있었다. 이 불상은 타이가 약탈해가 봉안하고있다. 라오스에서 승려들의 평상생활은 새벽 4시에 기상하여 5시까지 좌선을 하고 6시에 탁발을 나간다. 오후는 각자의 시간을 가지며 취침 전에도 1시간씩 좌선을 한다.

좌선은 반가부좌로 1시간씩 하고 5분은 휴식을 취하는데 좌선법은 水想觀, 光想觀 등의 관법으로 한다. 佛前儀式은 새벽 4시, 오전6시, 오후 6시 등 하루에 3회를 한다. 한때 재가불교운동도 일어났던 라오스에서는 국내의 불안한 정정을 반영하여 불교와 사회주의를 접목하려는 움직임도 승려들 사이에 있었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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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1963년 5월 29일은 일요일이었다.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사이공의 판딘풍 거리를 황색법의의 비구와 회색법의의 비구니가 조용한 저항의 표정으로 가두진행을 하고 있었다. 거리의 어디쯤에 행렬이 멈췄다.

스님들은 흐느끼듯 염불을 시작했고, 73살의 쾅둑 스님은 아스팔트 위에 坐禪의 자세로 앉았다. 한 스님이 5캘론짜리 휘발유를 쾅둑스님의 머리 위에 부었다.

그때 쾅둑스님은 스스로 성냥을 꺼내 불을 당겼다. 갑자기 광둑스님은 불길 속에 휩싸였다. 베트남불교의 한 상징처럼 여겨지는 이鑛身供養(세상에서는 이를 焚身自殺이라고불렸다.)은 정부의 불교탄압에 베트남 불교도가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쾅둑스님의 소신공양 이후 일주일 사이월남에서는 9명의 비구·비구니가 불교탄압에 대항해 분신자살을 했다. 이에 앞서, 그 해 5월 8일 후에는 9명의 불교도가 디엠정부의 발포로 학살된 사건이 있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디엠은 佛旗게양을 불법이라고 했으며, 가톨릭과 불평등하게 대우했다

이에 반대하는 불교도는 체포됐으며, 의식 수행과 전도의 자유가극도로 제한됐다. 이에 대한 불교도의 저항은 맹렬한 것이었으며 마침내 분신자살, 트리 쾅의 지도에 의한 반정부운동으로 치달았다. 1975년 4월 30일 패망하기 직전 베트남인구는 1천 600만명 (월맹은 2천 160만명), 그중 40%이상은 불교도였다

가톨릭은 170만명 밖에 안 되었다. 가톨릭은 제 2차 세계대전 전까지 프랑스의 통치아래 보호를 받아 성장했다. 이로 말미암아 전통종교였던 불교는 도교·유교와 함께 뿌리가 뽑혔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는 각사원의 승려수를 제한했고, 새로운 佛事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대항해 베트남 불교도는 1920년부터 불교재흥을 시도하여, 1931년에는 최초로 사이공에서 불교연구위원회를 창설했다. 유사한 위원회들이 1932년에는 후에에서,1934년에는 하노이에서 창립됐다. 불교단체는 일본이 베트남을 장악했던 2차대전 동안 말없이 잔존해오다가, 1945년 승려그룹이 식민주의를 대항하는 불교조직(Phat Giao Khan Chien)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던 목적이 달성된 1954년에 해체됐는데, 대부분의 불교도는 반프랑스 조직의 맴버였다. 戰後 베트남불교의 부흥은 1951년 5월 50명의 승려와 평신도가 참석한 국민 불교회의가 후에에서 개최됨으로써 시작됐다.

이 모임은 僧團을 재조직했고, 불교의식을成文化했으며, 불교청년그룹 조직과 성인교육센터를 설립했다. 베트남 불교도들은 또한1950년 콜름보에서 창립된 세계불교도대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45년 제네바협정에 따라 17도선을 경계로 북부와 남부가 분리되고, 고딘디엠이 남부에서 정권을 잡게 되자 베트남불교는 새로운 시련을 맞게 되었다.

디엠정부가 가톨릭과 불교를 차별대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불교는 식민치하에서는 프랑스에 적대하기 위해, 그리고 나중에는 胡志明의 공산주의에 대항키 위해 결합했던 가톨릭과 결별하고 격렬한 반정부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같은 강경노선은 군사쿠데타에 의해 티우, 키와 같은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해서도 계속됐다. 그들은 계속해서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반정부지도자 트리 쾅스님은고 지적하면서, 불교탄압은 곧 민주주의 세력의 탄압이라고 정부를 공격했다. 그의 말은 옳은 것이었다. 베트남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중국의 지배가 시작된 1세기경부터였고, 이후 불교는 베트남의 가장 중심적인 종교였다. 인도차이나반도 동부에 위치한 베트남은 참족이 먼저와서 살고 있었으나, 기원전 4세기경에 절강성에 있던 越나라의 멸망과 함께 월의 여러 부족의 남방으로 이동하여 참족을 밀어내고 통킹 지방에 정주하면서역사를 시작했다.

월남이란 말은 중국에서붙인 말로 越의 한 派란 뜻이다. 월남은 나중에 安南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치사적으로 토킹지방은 기원전 3세기경 말에 廣東서 성립된 趙王朝의 甫越國에 소속되었으나, 기원전 111년 漢武帝의 토벌을 당하여 南越이 漢에 병합됨과 함께 베트남 또한 漢의 지배를 받게 됐다. 중국의 베트남 지배는 10세기까지 1천년동안 계속됐으며, 그 사이 중국 문화가 이곳에 깊숙히 침투, 정착되었다. 불교는 중국의 영향, 특히 한나라 말기 때부터 당나라 중엽 때까지는 북부 베트남에 대승불교가 보급되었으며.

남부 베트남에는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아 태국이나 캄보디아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전해졌다. 이처럼 대소승의 불교를 고루 받아들인 예는 동남아에서는 드문 일이다. 베트남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사람은 후한 말 理惑論을 쓴 牟子(165-253)라는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당시 어지러웠던 전란을 피해 통킹(交跳) 지방으로 이주해와 불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베트남이 중국과의 문화교류가 그 이전부터 있어온 것을 고려하면, 이때 최초로 전해진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쨌거나 모자는 베트남불교사에 최초로 이름이 나오는 인물이다. 베트남에서 禪의 鼻祖는 毘雇多流支라는 인도승려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남인도 사람으로 580년 交州로 와 衆善寺에서 禪을가르쳤다고 한다. 그가 交州로 오기 이전에는 이미 古株의 法雲寺에는 緣觀禪師가 선을 가르쳤다고 하나 영향력은 크지 않았던 듯하다. 비니다류지는 원래 중국의 長安으로 들어갔으나(574), 마침 北周의 破佛이 있던 때여서 努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중국선종의 三祖인 승찬(? ~606)을 만나 달마선을 배웠으며, 숭찬의 권유로 廣州로 내려가 6년간 制旨寺에 머물면서 象頭精舍經·業報差別經을 한역하고, 다시 交州로 내려가 베트남 승려들에게 禪을 가르쳤다.

그 딘에는 300명이 넘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 뒤를 이은 사람은 法賢이라는 사람이었다.그는 처음에 法雲寺 緣觀선사 밑에서 불도를 닦다가 나중에 毘尼多流支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 법맥은 法燈에서 淸弁으로 이어 졌다. 비나다류지 禪은 9세기 이후 無言通에 의해 비롯된 無言通派와 나란히 이조말기까지 법맥을 지켜왔다. 비니다류지계통의 禪이 이렇게 베트남불교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청변의 탁월한 인물됨 때문이였다.

그는 12살 때 보광사의 법등 앞으로 출가해 金剛般若經을배우고 금강경을 중심으로 禪을 공부했다. 법등이 입적한 뒤 그는 다시 崇業寺의 惠嚴문하에 들어가 선을 배웠는데, 이때 비니다류지의 선은 중국 南頓禪의 법풍을 받아들여 완전한「베트남선」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불교가 본격적인 개화를 맞는 것도 이 무렵이다.

唐은 679년 이 지역에 安南都護部를 설치하고 베트남을 지배했는데, 이때 중국에서 본격적인 대승불교의 선이도입 된 것이다. 중국 南頓禪은 이후 베트남에 새로운 계통으로 다시 한 번 전해졌다. 馬祖道-의제자 百丈懷海(補O~8려)에게서 공부한 無言通이라는 사람이 그 주역이다. 그는 이름에서 보듯 과묵하면서도 다방면에 거처 깊은 지식을 가졌던 인물이다.

백장아래서 수년간 선을 공부하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建初寺를 짓고 그곳에서 禪法을 선양하다가 826 년 입적했다.

이 계통의 선을 無言通派라고 하는데 그 후, 이 계통의 법맥은 400년간 비니다류지파와 나란히 계승되다가 비니다류지파의 선맥이 끊어진 뒤에는 100년간 베트남 선불교를 지배했다. 이후 무언통파는 陳朝의 聖宗(1258-1278)대에 일어난 竹林派에 그 맥을 계승시켰는데, 죽림파는 중국선을 베트남풍으로 변화시켜 13세기 이후 오렛동안 베트남 불교계를 풍미 했다.

唐지배 시대의 베트남에는 많은 求法僧과 渡來僧들이 머물면서 중국과 인도의 교류접점을 이뤄 최신의 불교지식이 항상 새롭게 넘쳐흘렀다. 僧伽跋磨는 이곳에 머물면서 대기근을 만나 허덕이는 베트남 민중에게 음식과 의약품을 제공하고 고아를 양육해 常晴보살이라는 존칭을 받았다.

중국의 지배는 10세기까지 계속되었으나, 당의 멸망과 함께 베트남은 독립의 기회를 얻었다. 938년 베트남의 吳權은 비크. 당강 싸움에서 당시 남중국의 지배지였던 西漢軍을 쳐부수고 吳朝를 열였다. 그러나吳祖는 단명으로 끝나고, 그 뒤를 이은 T祖나 黎祖에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세의 어지러움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계속 발전했다.

특히 이 무렵에는 베트남 최초로 僧官制가 확립되어 승려가 정치에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고승들의 정치참여가 불교에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승려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베트남에서 가장 선진적인 승려들은 선진 중국으로 유학했고, 또 중국 승려들이 이곳으로 오는 등 교류가 빈번했고, 학문이나 사상에서 숭려들은 지도적 위치에있었다.

吳·T·黎朝의 위정자들은 이같은 승려들의 견문과 학식, 경륜이 필요로 했고 승려들도 기꺼이 위정자들을 보필했다. 베트남이 혼란기를 지나 최초의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룬 것은 1009년 李公蘊에 의해 열린 李朝 때부터이다. 국호를 大越로칭한 李朝는 昇龍(현재의 하노이)을 수도로 정하고, 1225년까지 베트남 최장기의 왕조를 유지 했다. 李朝는 불교를 보호하여 많은 절을 짓고 승려들을 보호했다.

특히 太朝(이공온)는 창업추시 10개의 사찰을 지어 불교를 훙륭시키는 한편, 宋에 사절을 보내 대장경을구입 하기도 했다. 이 무렵 비니다류지파의 제 12대 조사 萬行은 국사의 지위에 올라 중요한 정책을 입안하는데 깊이 관여했다. 또 이 파의 13대조사 惠生도 太宗의 귀의를 받아 정치를 자문하고 왕에게 禪을 가르쳤다. 李朝는 3대 왕인 聖宗 때는 草堂이라는 선승이 중국에서 돌아와 초당파를 확립했다.

그는 성종의 귀의를 받고 정치 자문을하는 한편 후진을 양성해 나중에 무언통파와 함께 禪界의 주류를 이루었다. 2세기 동안 계속된 이조의 뒤를 이어 성립한 陳朝는 베트남사상 가장 화려한 문화를 창조했다. 陳朝는 한자를 이용해 <츄놈>이라는 문자를 창만했으며, 이로 인해 불경이 번역되고 불교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시대 불교의 특이한 점은 세 번째 임금 인종때, 무언통파에서 나온 죽림파가 임제선의 전통을 계승케 된 것이다. 마침, 이 무렵에는 중국에서 元이 일어나 중원을 병탄해 갔는데. 베트남은 전후 8년간 항전하여 원을 퇴각시켰다.

그는 성종의 귀의를 받고 정치 자문을하는 한편 후진을 양성해 나중에 무언통파와 함께 禪界의 주류를 이루었다. 2세기 동안 계속된 이조의 뒤를 이어 성립한 陳朝는 베트남사상 가장 화려한 문화를 창조했다. 陳朝는 한자를 이용해 <츄놈>이라는 문자를 창만했으며, 이로 인해 불경이 번역되고 불교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시대 불교의 특이한 점은 세 번째 임금 인종때, 무언통파에서 나온 죽림파가 임제선의 전통을 계승케 된 것이다. 마침, 이 무렵에는 중국에서 元이 일어나 중원을 병탄해 갔는데. 베트남은 전후 8년간 항전하여 원을 퇴각시켰다.

이 전쟁을 담당한 인종은 나중에 스스로 출가해 죽림대사라 칭하고, 무언통파 17대 조사 慤忠의 뒤를 이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죽림파는 이후 베트남 선불교의 가장 중심적인 세력이 되었다. 陳朝가 망하고, 後黎가 성립(1428)하자, 불교는 크게 후퇴하는 양상을 나타냈다. 後黎는 중국 明의 영향을 받아 유학을 크게 숭상했으며,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불교는 쇠미현상이 뚜렷했다.

특히 후려의 성종은 전국에 사찰을 새로 짓는 것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1461), 寺領을 엄격히 제한했다-왕조가 불교를 외면하는 정책을 취하자, 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 들어가 새로운 형태로 변모해 갔다. 죽림파는 선보다는 정토적 색채를 강하게 보였으며, 중국 송대에 일어난 백련교가 도입돼 염불과 밀교적 색체를 베트남 고유의 민간신앙과 결합시켰다. 겉으로는 임제선을 표방하는 듯했지만, 내용으로는 정토염불이 중심이었다.

베트남불교는 이때부터 정토교의가 신앙의 중심으로 이루었다. 이후 베트남은 잦은 정변으로 莫氏→鄧駑→甫朝로 바뀌다가 院朝로 넘어 갔다. 이시기에 민중들은 전쟁과 정변에 혐오를 느껴 來世往生을 희구하는 풍조가 일어나고(아미타경)·(무량수경)이 번역돼 정토교는 더욱 확실하게 뿌리를 내린다.

이는 불교가 민족주의 세력과 결합하는 기반이기도 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베트남은 서구 식민세력과 서구 식민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900년 라오스·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령(佛領) 인도차이나로 규합되면서, 정치적 독립은 또다시 어려움에 빠졌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독립동맹은 8월 혁명에 성공, 院朝를 무너뜨리고 외세로부터 조국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프랑스는 다음해 다시 베트남을 지배하려고 전쟁을 시작했고,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은 이에 항전해 마침내 1954년 완전 승리했다.

그러나 이국의 개입으로 베트남은 남북으로 갈라져 60년대에는 다시 세계사에<베트남 전쟁>으로 기록되는 전쟁에 들어갔다. 이 무렵 남부베트남에서는 반민족적 국가독재정부가 불교를 탄압했다. 프랑스 지배시대에 들어온 가톨릭으로 개종한 군부지배자들은 민족주의 세력의 대표적인 불교탄압과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1963년 남부베트남 불교도들은 반정부운동을 전개하여 숱한 희생을 치르며 10개월 만에 군사정부를 무너 뜨렸다.

그러나 결과는 엉뚱하게 발전했다. 정국의 혼란은 전쟁을 폐해로 몰고 갔다. 독재는 무너뜨렸으나 1975년 베트남 전쟁 종식 결과함께 불교의 탄압도 가일층 강화된 것이다. 공산화 이후 베트남의 불교는 정부에 의해 일체의 종교 활동을 중지당하는 호심한 탄압을 받았다. 불교도들은 보트피플이 되어 외국으로 탈출했으며, 이들은 지금 세계각처에 흩어져 조국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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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1만 3천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구성돼있다. 면적은 192만㎢ 이렇게 많은 섬들 가운데 사람이 사는 섬은 1천여 개도 안 된다. 유인도라 해도 수도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와 수마트라, 술라바시섬을 빼고 나면 사람이 사는 둥 마는 둥 하는 상태다. 인구는 1억 6천 800여만명. 종족은 300을 헤아리며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생활 관습으로 살고 있다

종교는 이슬람교가 지배적이며, 그 다음이 힌두교. 기독교 순이다. 이에 비해 한때 이 지역에서 융성했던 불교는 유물만 남아 있을 뿐 거의 절멸한 상태다. 인도네시아의 고대사는 14세기 마차파히트왕국이 현재의 인도네시아 영역을 통합하기 전까지 수마트라와 자바가 별도로 발전했다. 따라서 불교도 그 이전에는 자바와 수마트라지역에서 나뉘어 발전했다.

인도네시아의 불교가 전해진 것은 1세기~5세기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이 기간중 인도네시아 각 섬에는 인도로부터 불교와 힌두교를 배경으로 한 문화가 전파했다. 5세기경에 인도를 순례한 法販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지역에서는 힌두교가 융성하고 불교는 미미했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에는 계빈국(카시미르)의 구나발마(369~431)가 찾아와 교화활동을 폄으로써 불교가 정착되었다. 8세기경에는 사이드라왕조(774~864)가 출현하여 불교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이 왕조는 말레이와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침공하여 수진랍을 전멸시켰다. 역대 왕들은 불교를 신봉하고, 발전과 보호에 힘썼으며, 또한 불사를 많이 지었다. 이 지역에 펴진 불교는 密敎를 주로 하는 대승불교로서 귀족적인 색채가 농후했다. 당시에 건립된 사원으로는 칼라산·멘두트 세부 등이 있으며, 유명한 보로부도르도 이때에 조영된 것이다. 이 사원은 어느 왕이 지은 것인지, 패 보로부도르라고 하는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석조사원의 규모로는 인도네시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1814년 영국인에 의해 발견된 이 사원은 전체면적이 2천 580 ㎢나 되며, 정방형의1변은 111m에 이르고 있다. 기단으로부터 종모양의 탑까지는 9층 31m나 된다.평면도를 보면 마치 거대한 曼多羅圖를 연상케 한다. 이 사원 내부에는 1천 460점의 佛晝와 1천 212점의 장식화, 그리고 505점의 불상이 각층에 고루 안치되 장엄한 불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사원이 조영된 것으로 보아, 과거 이 지역에서의 불교가 어느 정도 흥왕했었는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0세기 경에는 신도크가 자바 지역에서 새 왕조를 세우고, 시바교를 보호하였다.

이후부터 이 지역에는 불교가 시바교와 혼융하여 발전하기 시작했다.한편 수마트라 지역에서는 7세기 후반수리비자야왕국이 출현하여 급진적으로 발전해 갔다. 이곳에서는 불교상황은 당시 인도를 다녀왔던 義淨의 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의정은 681년에서부터 695년까지 수리비자아를 거처 인도를 왕복했는데, 귀로에는 약 10년간 이 나라에 머물렀다. 그가 번역한 根本說一切有部百一達磨의 註記에따르면 이 나라에 수천의 승려가 학문과 수행에 힘쓰고 있었다고 한다.

또 그의 여행기인 南海寄歸內法傳에 의하면 당시 수리비자야에는 釋迦鷄栗底라는 유명한 학승이 있었으며, 그는 手枕論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인도불교와 요가파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의정이 한역하여 전하고 있다. 수리비자야는 9세기부터 사러렌드라 왕조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여, 11세기초까지 최성기를 이룩했다. 이 무렵에는 불교도 극성하여 동남아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11세기 초두에는 法稱(찬드라키르티)과 같은 대학장이 나타나 불교홍보에 진력하였다. 그의 저술은 現官莊嚴論이라고 하는 般若經釋論 주석에 있어서 難解語解明疏를 비롯, 入菩提行論三十六攝義·入菩提行論攝義·集菩薩學論現官 등 4종류나 된다. 이 중 첫 번째 것은 미륵의 (현관장엄론)에 대한 주석서의 난해한 용어를 해명한 명저로서 그의 주저이다. 그의 이름은 동인도 방면까지 널리 알려져서, 아티샤(982~l054)가 찾아와 20년간 硏學하기도했다. 아티샤는 나중에 티베트에 들어가 라마교를 개혁했으며 당시 불교학의 2대 중심지로 알려진 비크라마시라승원이 학장이 된 고승이다.

法稱의 저서가 티베트대장경에 들게 된 것도 아티샤가 티베트어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11세기 초엽까지 발전을 거듭하던 수리비자야는 1025년경에는 남인도 촐라의 침입을 받는 것이 실마리가 되어, 서서히 국세가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불교도 왕조의 쇠망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불교는 이후 라덴 비자야가1293년에 세운 마자파히트 왕조에 이르러 새로운 계기를 맞이했다. 대승불교의 밀교가 힌두교와 혼융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라덴비자야의 딸 자야비슈누 바르다니는 영명한 여왕으로 인도 신화의 라크슈미 여신(미와 지혜의 여신)의 화신이라 하여, 그들 일가를 신격화하고, 사원을 지어 불상과 함께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같은 예는 인근 캄보디아의 경우에도 없지는 않으나, 이 경우는 왕들이 보살의 화신으로 칭송되어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인도신화에 나오는 신의 화신이라 할 때, 불교의 교의는 발붙일 수 없게 된다. 때문에 많은 불교사원은 힌두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신앙의 형태도 이미 불교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샤먼화 된 불교>가 되고 말았다.

이 시대의 대표적 건조물은 장려하기 그지없는 찬디파나타란인데, 이곳에는 힌두교의 3대신을 모시고 불상은 힌두화된 것들이 전해질 뿐이다.1938년 하얌우르크왕이 죽자, 마자파히트 왕조는 급속한 쇠망을 시작했다. 內因은 왕가의 왕위계승 쟁탈, 기근 등이었지만, 外因이었던 이슬람교도의 마자파히트침투는 결정적으로 이 거대한 힌두교 국가를 붕괴 시켰다.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이슬람교는 급속하게 교세를 확장했으며, 힌두세력과의 마찰도 셍겼으나 끝내는 굴복받아 1628년에는 사실상 이슬람국가가 성립됐다.

이 후 이슬람세력은 자바와 수마트라 이외에도 보르네오 남부, 실레베스의 마카사르 몰루카제도, 필리핀군도 등 광대한 지역으로 퍼져 불교는 이 지역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말았다. 현재에도 이곳에는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세력이며, 약간의 힌두교와 새로 들어온 기독교가 신앙될 뿐 불교는 없다. 인도네시아에서의 불교 사멸은 불교가 본래의 교의를 잃고 세속화할 때, 필연적으로 망한다는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준 예다.

인도에서도 그랬지만. 인도네시아도 불교가 이슬람침입 이전에 힌두교로 흡수되어, 흔적초자 남기지 않고 사라진 점은 한국불교에도 좋은 교훈이 된다 하겠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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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네팔은 히말라야산맥의 주맥들이 북부의 국경선을 따라 동서로 달리고 그 남쪽으로는 마하바라트 산맥이 소히믈라카를 이루는 구릉지역에 위치해 있다. 국토면적은 14만1천 ㎢이고 인구는 1천 314만 명의 소왕국이다.

중앙산지인 고지대에는 몽고계의티베트족·버마족 등 여러 종족이 토착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힌두교와 라마교가 혼재하여 구별이 분명치 않은 양상을 보이는 점이 특징 적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중앙산지의 북부지역인 고지대에는 셀퍼를 하는 티베트인이 많아, 자연 라마교가 강한 편이고. 남부의 힌두스탠 평원으로 이어지는 저지대에는 농경을 하는 인도계 종족이 많고 종교도 힌두교가 우세하다.네팔은 불교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성지 룸비니를 국경 안에 두고 이다.

부처님이 탄생한 룸비니는 남부 타라이 지방의 최대도시인 마이라와 서쪽 18km지점 즉 티우나 강 등 몇 개의 작은 강을 가로질러서 자동차로 30분쯤 달리는 거리에 있다. 19세기 이전까지 이곳은 매몰된 채 잡초만 무성했었다. 8세기경 이곳을 순례한 慧超는 往五天竺國傳에서 이곳을 방문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13세기경 인도의 佛蹟地를 순례한 티베트의 승려 다르마스마빈은 그의 기행문에서 룸비니를 언급치 않았다. 이로 미루어보아 룸비니는 10~13세기 인도를 침입한 회교군에게 파괴되었을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룸비니가 탄생의 성지로 확인된 것은1896년 고고학자 퓨라박사에 의해서다. 그는 이곳 유적을 발굴하면서, 아쇼카왕이 세운 石柱를 찾아내고, 이곳이 룸비니임을 확인했다. 고고학적 유적지로만 남아 있던 룸비니는 1967년까지만 해도 황폐한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에 이곳을 방문했던 우탄트(전 UN사무총장)는 이를 애석히 여겨 룸비니의 재건을 호소, 세계인의 호응을 얻어 이곳을 개발했다. 현재 룸비니에는 룸비니 개발위원회 사무실과 티베트사원의 숭려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탄생의 성지 룸비니가 있는 나라 네팔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이 언제인가는 확실치 않다. 네팔불교의 상징인 스와얌브나드 스류파(일명 限塔)가 건립된 것이 1세기경이라고 하니까, 이때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 서쪽 교외에 있는 이 탑은 높이가 20m이고 4각탑신 윗부분에는 9개의 相輪이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탑신에는 동서남북 사방을 꿰뚫어본다는 부처님의 눈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양식상으로 보아 밀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팔의 불교 전래시기는 훨핀 下代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흔히<네팔벨리>로 불리는 네팔의 중앙산거에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많은 부족국가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 가장 세력이 강설했던 카리티족은 왕국을 세워 29대를 이었다.

그 뒤에 리차비왕조(300-800)와 바초리왕조(800-1200)가 이 지역을 지배했으며, 뒤를 이어 유명한 밀라왕조가 18세기까지 계속됐다. 말라왕조의 역사도 전기(1200-1480), 후기(1480~1750)로 나누는데 이 무렵 네팔에는 <네팔불교>라고 할 만한 특징과 문화가 확립됐다. 불교는 인도의 갠지즈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전 인도와 동남아 중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자기 변모를 거듭한다.

사상적으로는 이른바 원시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가 차례로 일어나 그 의례와 불교문화도 힌두교의 영향으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밀교학 밀교는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가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특히 티베트에서는 샤머니즘적 본교와 융합하여 라마교라는 독특한 불교를 발전시켰다. 네팔은 산지 아래로는 인도와 인접해있지만, 등 뒤의 히말라야를 넘으려면 티베트와도 접경을 이루고 있다. 한때 네팔은 티베트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이때 라마교가 자연스럽게 네팔에 뿌리내리게 됐다.

물론 네팔은 불교를 티베트로부터 전수받은 것만은 아니다.인도대륙에서 융성하던 불교는 주변국가인 이곳에 자연스럽게 전파되었을 것이지만 힌두교의 영향으로 그렇게 융성한 편은 못 되었다. 또 불교라 해도 그것은 이미 힌두교의 영향으로 변질된 헝태로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라마교의 정착은 매우 용이했을 것임을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오늘의 네팔불교는 곧 <라마교>를 지칭한다. 네팔 곳곳에 있는 사원은 모두 티베트승려들에 의해 운영되는 라마사원들이다.

티베트의 법왕이자「살아 있는 부처」「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되는 달라이라마는 티베트가 중공에 의해 공산화되자, 티베트를 떠나 많은 라마숭을 데리고 네팔로 옮겨갔다. 그 년에 와서는 티베트 난민과 승려의수가 늘어나자, 사원도 새로 지어졌다. 네팔의 불교문화는 대체로 말라왕조, 그중에서도 후기 말라왕조때 설립, 완성된 것이다. 전기 말라왕조 때에도 이슬람군이 크게 융성했지만, 14세기경 벵갈 지방으로부터 이슬람군이 카트만두 분지에 침입하여 불교사원을 파괴하고 행정기구를 마비시키자 크게 위축되었다.

14세기말 유능하고 강직한 시티말라왕이 네팔을 재통일하면서 다시 불교가 꽃피기 시작하였다. 카트만두 동남쪽에 이는 말라왕조 후기의도성 바드기온이나, 남쪽에 있는 古都파탄에는 지금도 많은 힌두사원과 불교사원이있다. 바도사원에 있는 불교사원은 모두 삿갓 같은 지붕을 3~4층씩 쓰고 있는데, 그 옆에는 또 힌두교 특유의 파라밋형 신전이있다. 파탄에는 원숭이신을 모신 힌두사원부근에 마하붓다사원이 있다. 이 사원에는4천 개의 불상이 벽돌 하나하나에 조각돼있어 장관이다.

네팔에는 이러한 힌두사원, 불교사원이 2천 500여 개에 달한다. 그러나 두 종교간의 엄격한 구분이 없어, 네팔불교에 대한예비지식이 없는 순례자들은 힌두의 신앙을 관음보살이라고 참배하기도 하고, 힌두의 승려를 불교의 승려로 오인하기도 한다. 특히 네팔은 많은 사원의 탱화에도 힌두교 성력파의 영향을 받아 구세불 둘레에 육감적인 미녀를 배치하고, 사원의 벽면에는 에로틱한 여신상을 조각하고 있어 불교와 힌두교가 어떻게 혼재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말라왕조는 18세기 중엽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왕국을 3분하여 통치했으나, 호전적인 구르카족의 침입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불교는 티베트에서 온 라마승들에게 의해 계속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스와얌브나드사원 경내에는 소년 불교학교가 운영되고 있으며. 학생은 200여명 정도다. 이들은 모두 사원에서 합숙을 하면서 종교예절. 교리 외에 일반 중학과정을 배우고 있다. 허락 없이 집에도 갈수 없는 엄격한 규율아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이들이 앞으로 네팔불교를 이끌어갈 재목이 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출처 : 불교설화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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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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