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스님

혜공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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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惠空)스님 (생몰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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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진공(天眞公)이라는 귀족의 집 심부름 할멈의 아들로 아명 우조(憂助) 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이(靈異)한 일이 많았고, 자라서도 신이(神異)하여 주인 천진공(天眞公)이 성인(聖人)이라고 우대하였다. 그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는 법명을 혜공(惠空)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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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된 혜공(惠空)은 언제나 조그만 절에 살면서 매일 미치광이 처럼 술에 대취하여 삼태기를 등에 지고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그를 부궤화상이라 불렀고, 그가 사는 절을 부개사(夫蓋寺)라 하였다.
그는 영묘사(靈廟寺)의 화재를 미리 예방했고, 생사를 자재로 했으며, 또 당대의 고승 신인(神印)조사(祖師) 명랑(明朗)스님의 금강사(金剛寺) 낙성회(落成會)에서는 당시 대덕(大德) 가운데서 가장 존경받는 스님으로 초청받아 비 속에 왔으나 옷이 젖지 않았으며, 우물 속에서 잠을 자고 나와도 옷이 젖지 않는 등 신이(神異)가 많았다

[사진자료 : 원효스님과의 일화가 전해오는 오어사]

또 그가 말년에 항사사(恒沙寺)[영일(迎日) 오어사(吾魚寺)]에 머물렀는데, 그 때 원효(元曉)스님이 여러 경소(經疏)를 저술하면서 언제나 그에게 물었다. 그만큼 혜공(惠空)스님은 모든 면에서 당시에 가장 뛰어난 고승이었으며, 공중에 떠서 입적했는데 사리(舍利)가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았다고 한다.

원광(圓光)스님과 자장(慈藏)스님 등의 귀족 불교시대에 있어서 조그만한 절에 살았다는 것도 일반민중 속에 들어간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삼태기는 초부(樵夫) 목동(牧童) 또는 농부(農夫)들의 도구이니 이러한 것을 등에 졌다는 것도 막벌이 천민이나 서민들과의 접촉을 뜻하는 것이고, 또 술에 취하여 가무(歌舞)했다는 것 역시 골목거리의 모든 서민들과의 접근을 위한 방편이었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요즘 생각할 수 있는 관계 탈선의 추태가 아니라는 것은 당시 불교의 위치나 시대성과 사회상에서 알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서민 대중화의 용감한 모험이며, 선구적 실천운동으로 보살행의 방편이었다는 것을 다음의 대안(大安)스님과 원효(元曉)스님의 행적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