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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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학 > 불교체험관 > 역대고승관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

고려의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한 고승. 성은 왕(王)씨.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송악출신.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이다.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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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에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는냐."고 물었을 때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때부터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1085년(선종 2)에 송나라로 유학을 떠나 유성법사(有誠法師)와 함께 화엄의 깊은 사상과 현수(賢首)의 천태교판(天台敎判)에 대하여 다르고 같은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사진자료 : 문화재청 보물1044호]

1086년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하면서 학문에 더욱 몰두하였다. 흥왕사 주지로 있으면서 그는 요나라·송나라·일본 등에서 불교서적 4,000 여권을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도 모았으며,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간행목록으로서 3권을 편집하였다.

이 <신편제종교장총록>의 상권에는 경의 장소 561부 2, 586권, 중권에는 율의 장소 142부 467권, 하권에는 논의 장소 307부 1,687권이 각각 수록되었는데, 모두 합쳐 1,010부 4,740권이 된다.흥왕사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하여 간행하였으며, 이를 이라고 한다.

1097년(숙종 2) 2월에 국청사(國淸寺)가 완성되자, 같은해 5월에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천태종의 개립을 보게 되었으며, 그뒤 1099년에는 제1회 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후에는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하였다 이로써 천태종은 세상에서 공인된 한 종파가 된 것이다.

의천은 원래 화엄종계통의 승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태교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선·교 양종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의천은 이러한 고려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근본이념을 천태사상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의천은 불교전적을 정비하고,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으며, 송나라에 유학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였고,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1101년(숙종 6) 10월 5일,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이 47세, 법랍 36세로 입적하였다.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 22권, 250권, 의천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23권과 13권, 3권, 3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없어지고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만이 전하여오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