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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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탑의 유래

탑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탑파(塔婆)'의 줄임말이다. 탑파는 인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스투파라고 한다 스투파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 (Sanskrit, 梵語)의 stupa의 소리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탑파는 팔리 어(Pali)의 투파(thua)를 한문으로 표기한것으로, 이것의 줄인 말로 탑이 되었다. 스투파는 신골(身骨)을 담고 흙과 돌을 쌓아 올린 부처님의 신골(身骨, 眞身舍利)을 봉안하는 묘(墓)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탑파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에서 비롯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부처님의 사리뿐만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인 불경을 비롯하여 부처님과 관계되는 물건이 부장되어있는조형물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탑은 부처님의 진짜 육신이 있는 곳 또는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이 있는 곳으로 부처님이 머물고 계심을 뜻하는 조형물이다. 열반 당시 부처님이 당신의 장에 대해 "다비를 마친 뒤에 사리를 거두어라. 그리고 네 거리에 탑을 세워 사리를 그속에 봉안하고 탑의 표면에는 비단을 걸어 길을 가는 모든사람들이 부처님의 탑을 볼 수 있게 하여라. 살아서는 여래법왕의 도와 교화를 사모하여 삶의 행복을 얻을 수 있게 하고 죽어서는 천상에 태어날 수 있도록 ‥‥‥라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탑은 법왕의 도를 사모하는 중생이 돌아가는 곳이고 불교신앙의 핵심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그러므로 탑은부처님 제자들이 부처님을 예배하는 대상물이었고 또 수행하는 도량으로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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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이 루시나가라(Kusinagara)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서 열반한 뒤 당시 사회의 풍속에 따라 부처님의 제자들은 유해를 다비(茶毘, 火葬)하였다. 당시 장례를 집행한 말라족 사람들은 부처님 사리를 거두어 집회장에 모셨다.
뒤늦게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접한 여덟 나라에서 각각 사리를 받아 큰 탑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말라 족사람들이 사리를 주지 않겠다고 거부하자 마가다국 아자타샤트루 왕과 바이샬리의 릿차비 족 등은 사리를 차지하고자 쟁탈전이 일어났다.

이에 드로나라는 브라흐만의 중재로 사리를 똑같이 여덟 등분하여 분배하였다. 이를 '사리팔분(舍利八分)' 또는 '분사리(分舍利)'라한다. 이때 사리가 분배된 여덟 나라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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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마가다 국 아자타샤트루 왕
② 바이샬리 성의 릿차비 족
③ 카필라국의 샤캬 족(석가족)
④ 칼라칼파국의 불라 족
⑤ 라마그라마국의 콜리 족
⑥ 비슈누다파국의 브라흐만들
⑦ 파파국의 말라 족
⑧ 쿠시나가라의 말라 족

이상 여덟 나라는 분배 받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각기 탑을 세웠다. 이를 근본8합이라 한다. 이 8합이 세워진 곳은 카필라 국의 룸비니 동산 ·사라나트의 녹야원 ·사위성의 기원정사 · 파파 국의 곡녀성 · 마가다 국의 왕사성 바이샬리 · 쿠시나가라 등이다.

그런데 근본 8탑 이외에 사리 배분을 중재했던 드로나는사리 가들어 있었던 병을 받아 병탑(甁塔)을 세웠고, 또한 뒤늦게 도착한 핍팔리바나의 모리야 족은 남은 재로 회탑(灰塔)을 세웠다.

그래서 당시의 탑은 근본8탑, 병합그리고회탑을 합해 모두 근본 10탑이었다. 그러나 이 근본 10탑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후대인도 마우리야 국 아쇼카 왕은 근본 8합의 사리들을 다시 8만4천개로 나누어 전국에 널리 사리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아쇼카 왕이 죽은 뒤에 인도 전역의 여러 불탑이 파괴되면서사리도 여러 곳으로 흩어져 분실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초기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가져와 경주 황룡사 · 양산 통도사 · 울산 태화사에 봉안 하였다가 현재는 다섯 곳의 적멸보궁에 봉안되어 있다.

인도에서 불교의 쇠망과 더불어 현재까지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우리나라에 많이 전해져 있는 점도 특이한 인연이라하했다.
[사진자료 :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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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는 것이 원칙이나경우에 따라 사리 대신 <금강경>이나 <화엄경>,
한국 탑에는 작은 탑을 많이 만들어 봉안하였는데그 안에는 부처님 사리보다 경전 등을 넣는 경우가 많다. 탑은 일반적으로 부처님이 열반한 뒤 불상보다 먼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불상이 조성되기 전에 탑을조성하여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부처님 진신사리와 유품등을 함께 봉안하였다.

그러나 불상이 조성되면서 차층 부처님 형상에 더욱 매달리게 되어 탑의 의미는 부처님 진신이 계신 곳으로 신성함과현실감을 느끼게 하는 경배의 대상으로 바뀌어 갔다. 탑은 사찰의 흔적을 말해준다. 특히 석탑은 유구한 세월에 걸쳐 전해오는 불교신앙의 흔적을 추측할 수 있는 문화적 유물로서 그 의미가 더욱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탑돌이나 탑을 둘러싼 신앙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어쨌든 탑은 성립 당시부터 바로 부처님 진신이 계신 곳을 상징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탑을 수행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점차로 일정한 거주 공간이 확보되고 불전이 조성되는 등 신앙의 공간이 확대되고 별도의 수행 공간이 더해지면서 오늘날 볼 수 있는 사찰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찰은 신앙과 수행의 공간이라는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진자료 : 금산사]

탑의구조

인도에는 날씨가 덥기 때문에 수행하는 곳으로 달리 건축물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부처님 당시부터 죽림정사와 기원정사를 비롯하여 몇 군데 건축물이 있는 수행처가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부터 보리수 아래서 수행하여 성불하였듯이 노천에 앉아 수행하면 그곳이 바로 수행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단 부처님의 진신을 모신 탑이 만들어지자 수행자들이 모여들어 수행하는 기준처가 되었으며, 점점 탑이 수행처의 중심처가 되었다.
그러나 탑을 세운곳 가까이에 생활할 수 있는 건축물이 생겨나고 그 건축물이 수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되면서 탑의 기능은 점차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으로만 인식되어 수행하는 곳으로서의 기능은 사라졌다. 탑은 다만 경배의 대상으로 현실적 복을 비는 복전의 역할을 하게 된다.

곧 인도불교 초기 사찰에서의 탑은 종교적 기능을 담당하였지만 점차 금당이 중심이 되면서 탑은 경배와복전의 대상으로만 간주 되었고 탑이 없는 사찰도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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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단부
탑 맨 아래의 밑받침 부분이다. 제1층 옥개석을 기준으로 옥개석을 받치는 면석 아래쪽 부분 전체가 기단부에 해당된다. 기단부에는 기저부와 몇 개의 기단부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기단부을 받치는 기저부의 석재는 자연석을 이용하거나 또는 원형이나 팔각헝으로 다듬은 석재를 놓는 경우도 있다.

[2] 옥개부
옥개부는 지붕석을 말한다. 이는 옥개받침전각 우동으로 세분한다.

① 옥개받침
지붕 돌의 받침 부분에 몇 개의 층계로 이루어진 부분을 말한다. 옥개받침의 정형성은 다섯개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초기에는 받침석이 네 개로 줄어들고 고려 중기 이후에는 받침석이 삼단으로 변화된다.

② 전각
옥개석의 끝 모서리 부분이 살짝 들려 올라간 부분을 말한다. 백제 계통의 석탑은 아래와 위쪽이 같이 들려 올라간 형식이나 신라 계통의 석탑은 아래 면은 평행선이고 윗면만 위로 들려 있는 형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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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륜부
탑의 위쪽에 해당하는 부분을 말한다. 이에는 노반 · 복발·앙화·보륜 보개 ·수연 용차·보주로이루어져 있다.

① 노반
감로수 이슬을 받는 부분을 말한다.

② 복발
노반의 위쪽 부분을 말한다. 이는 바릿대를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으로 흙무덤을 상징하는 부분이다.

③ 앙화
복발위에는신성한 것을 올리기 위해 조성한 위로 받들어올리는 형상의 꽃이 있는 부분을 말한다.

④보륜 ⑤보개 ⑥수연 ⑦용차 ⑧보주

앙화위에 전륜성왕의 네 가지 덕을상징하는 부분을 말한다.

보륜을 덮기 위한 덮개 부분을 말한다

보개 위의 물안개를 상징하는 부분을 말한다.

수연을 올려놓고 용이 앉는 자리를 말한다.

용차 위에 용을 상징하는 여의주를 올려놓은 부분을 말한다.

[자료사진 : 표충사]  

탑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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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탑의 전형적인 구조는 기원전 3~l세기에 세워진 중인도의 산치 대탑에서 볼 수 있다. 산치 대탑은 아래서부터 크게 기단부 복발 ·평두 · 산개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기 인도의 탑은 흙이나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어겼다.

이러한 인도 탑의 양식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누각형식이 가미되어 기단부위에 누각을짓고 누각의 지붕위에 인도탑 양식인 복발 ·평두 · 산개를 올리는 형식으로 변하였다. 중국에서는 탑의 재료로 벽돌과 나무를 많이 사상 하였는데, 이러한 중국의 누각형의 탑 양식은 우리나라에 전래될때는 주로 목탑 양식이었다.
점차로 목재 건축양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석재나 벽돌로 탑을 만들게 되었다. 우리나라 탑의 재료는주로 나무와 돌이다. 돌 가운데서도 화강암을 특히 많이 사용하였다. 양식은 목재 건축물을 본뜬양식이고 탑의 상륜부는 인도의 탑처럼 쌓아올린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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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의 나라
이것을 실증적으로 잘 보여주는 목탑으로는 충북 보은 속리산법주사 팔상전이 있고, 석탑으로는 경주불국사 석가탑을들수 있다. 동양 삼국 가운데 중국은 특히 전탑을 많이 세워 전탑의 나라, 일본은 목탑을 많이 세웠으므로 목탑의 나라, 우리나라는 돌탑을 많이 세웠으므로 석탑의 나라로 불린다.
왜 이와 같이 나라마다 각기 다른 재료로 합을 세웠을까? 그것은 탑을 세운 곳의 자연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의 넓은 평야와 진흙 빛 땅은 전탑을 연상시킨다.

일본은 화산이 분출하여 생긴 나라이므로 그 흙이 벽돌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고, 돌은 석재로서 가치가 거의 없기 때문에 목탑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
[사진자료 : 앙코르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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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전국 어디서나 풍부하고 질이 좋은 화강암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목탑과 전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유입 되었으므로 중국처럼 처음에는 목탑이, 그 다음에는 중국의 전탑 유행과 함께 전탑 모양의 탑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특히 목탑에는그 안에 예배할수 있는공간을 조성하고 거기에 불상이나 부처님의 일대기를 탱화로 조성해 놓았다.

그러므로 수행과 예불을 할 수 있는, 실제로 활용 공간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석탑은 목탑 양식을 상징화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탑에 들어가는 입구를 만들고 공간을 약간 두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임을 표현하고자 하지만, 형식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 사용되는 공간은 아니다.
[사진자료 : 도갑사]

탑의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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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탑]
목탑은 재료가 목재이기 때문에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모두 타 없어져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의 것은 남은 것이 없다. 다만 현재 그 터전만이 각처에 들어져 있을 뿐이다.

특히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지와 사천왕사 목탑지는 신라목탑터전(地)의 대표적인 것이다. 충남부여 군수리 목탑지는 백제의 것이고, 평양 청암리 절터의 목탑지는 고구려 시대의 대표적인 것이다.

다만 목탑 양식을 전해 주는 예로는 17세기 초 조선 시대의 건축물인 충북 보은 법주사 팔상전과 전남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 있다
[사진자료 : 쌍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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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우리나라 석탑의 발생은 삼국 시대 말기인 60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의 건립시기였고, 오랜 목탑의 건조에서 쌓여진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 석탑을 발생케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는 당시 삼국 중에서 가장 건축술이 발달한 나라였기 때문에 석탑은 백제에서 처음으로 조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양식은 당시에 유행하던 목탑을 본뜬 것이었다. 백제에서는 7세기 초반에 이르러 석재로 목탑을 모방하여 만든 석탑을 처음으로 건립하게 되었다.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현재까지 보존된 것은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충남 부여 정림사지 석탑뿐이다. 한편 신라의 석탑은 전탑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 하였다. 그러나 그 받침 형식 등이 벽돌로 만든 탑의 양식으로부터 발생했다는 것은아니다. 백제와 신라의 초기 석탑들은 서로 그 양식을 달리 출발 했지만 얼마 뒤 하나의 양식으로 통일된다. 여기서 비로소 한국 석탑의 전형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계기를 마련해 준것은 삼국통일의 덕택이었다. 신라의 석탑은 삼국통일과 함께 백제와 통일 전 신라의 각기 다른 양식을 종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갖추게 된다. 새로운 계기를 맞아 집약 정돈된 형식으로 건조된 석탑 가운데 가장 초기 양식의 표본을 보이는 것은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과 고선사지 3층석탑이다. 고려 시대에는 석탑 건립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후기에 들어서면 각지방의 토착 세력이 탑을 세우는 데 참여하여 정형화된 양식보다는 각 지방 나름대로 특징이 반영되어 다양한 양식의 탑이 조형 되었다.

또 사원 규모가 작아지면서석탑도 규모가 작아지고 세부적 장엄 장식도 화려하게 발전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말기의 석탑양식이 그대로 유지된다. 이 시기의 것으로는 강원 도양양 낙산사7층석탑, 경기도 여주 신륵사 다층 석탑. 경남 함양 지리산 벽송사3층 석탑 정도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다소 계승하고있으나, 전체적인 형태로는 더욱 무기력화된 느낌을 준다.
[사진자료 : 범어사,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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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탑]
전탑은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지는 못하였다.
탑을 세우기에 앞서서 벽돌을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만 세워졌을 뿐이다.
우리나라 전탑 가운데서 최대의 전탑은 안동 신세동에 있는7층 전탑이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를 회흑색의 무늬 없는 벽돌로 축조하였고, 1층 남쪽면에 감실을 내었다.

또 안동 조탑동과 동부동의 5층전탑, 경북 칠곡 송림사5층전탑, 그리고 경기 여주 신륵사다층 전탑이 유명하다.

[모전석탑]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었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현존하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이라고도 부르며, 원래는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고 높이는 9.3m이다.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다고 하며, 지금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수리 복원된 것이다.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1층 탑신 네 면에 감실을 내고 석문을 달아 출입구를 내었다. 이 부분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안에는 현재 불상을 모셨지만 원래의 것은 아니다. 감실입구 양편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인왕입상(仁王立像)을 좌우로 배치하였다.

중층기단 네 모서리에는 동해를 향한 곳에는 물개를, 내륙 쪽에는 사자상을 조각하여 세웠다. 이 탑과 관련된 탑으로는 경북의성 탑리에 있는 5층석탑을들수 있다.

이 탑도 석재로 전탑모양을 모방한 것이나 부분적으로 목조건물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한국 석탑 양식의 발달을 고찰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러한 모전탑은 후대로 내려오면 곳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충북 제천 장악리 7층 모전탑,경북의성 빙산사지 5층 모전탑 전남강진 월남리 월남사지모전탑, 강원도 영월 정양사 수마노탑등이 있다.

층수에 따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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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은 수직층과 수평층으로 일정한 형식을갖추고 있다. 수직층의 수는3 ·5. 7 ·9등의 홀수로 나타낸다. 이 홀수는양(陽)을 나타내고 하늘을 의미한다. 이것은 삼국시대 이래탑을 만들 때 근거하는 경전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거하여 무한한 공덕을 상징하는 관념적인 의미인 홀수로 탑의층수를 쌓은 것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들어오면서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짝수층으로 세워진 탑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현재 경복궁에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과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서울 탑골 공원의 원각사 10층 석탑이 있다. 수평층의 수는4 ·6. 8등 짝수로 나타낸다. 이짝수는 음(陰)을 나타내고 땅을 의미한다.

이처럼 탑은 동양사상의 음양오행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탑의 수직층은 항상 3층 이상의 홀수 층으로 이루어지고, 수평층은 4각형 · 8각형 · 원형 등으로 구성된다. 특히 우리나라 대부분의 탑은 3층 양식이 많으며, 5층. 7층·9층· 13층탑 형식 등도볼 수 있다.
[사진자료 : 월정사]

양식에 따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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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양식]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석탑, 왕궁리 5층석탑등이 있다. 고려 시대 탑으로는 부여 무량사 5층석탑,부여 장하리 3층 석탑 등이 백제 계열의 탑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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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양식]
경북의성 5층석탑, 경주감은사지, 경주 고선사지 3층석탑, 경주나원리 5층석탑, 경주 구황동 황복사지 3층석탑, 경주 장항리 5층석탑 등이 있다.
8세기 중엽의 경주천군동 동서 3층석탑, 불국사3층석탑, 금릉 갈항사지 동서석탑, 9세기 탑으로는 장흥 보림사 쌍탑. 영주부석사3층석탑, 합천청량사3층 석탑, 산청 단속사지 동서 3층석탑,남원 실상사 동서 3층 석탑, 대구 동화사 금당암 3층 석탑,봉화 서동리 동서 3층석탑, 문경 내화리 3층석탑, 봉암사3층 석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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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양식]
이러한 전형적인 탑과는 달리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 탑을 이형탑(異形塔)이라 부른다. 이에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구례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과 서 5층 석탑 월성 정혜사지13층석탑, 철원 도피안사3층석탑, 경주석굴암3층석탑, 경주 원원사지 동서탑, 남원 실상사 백장암3층 석탑,경주남산동서3층석탑, 양양선림사지3층석탑, 개성경천사 10층 석탑등이 있다.
[사진자료 : 불국사,화엄사]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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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륜부

  가장위에 놓인 부분으로, 여러가지 요소로 등을 화려하게 한다.

화사석

불을켜는 부분

상대석

화사석을 받친 받침돌

간주석

상대석과 하대석을 잇는 기둥모양의돌

하대석

밑에 받친 받침돌

보 주

맨꼭대기에 있는 구슬모양의 부분

옥개석

탑신위에 덮는 뚜껑

화 창

돌화사석에 뚤는 창

귀 꽃

고귀한 모양의 꽃무늬

지대석

땅에 터전을 잡고 쌓는돌

불이문을 지나면 탑에 이어 나타나는 석조물이 석등이다.
어둠을 밝히는 석등은 사방으로 화창이 뚫려 있고 불을 넣는 곳을 팔각으로 만들고 그 위에 지붕석을 올리고 지붕석 정상에 여의주를 얹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지면과 구별하는 기단부에는 거꾸로 엎은 연꽃(覆蓮)이 신성한 것을 모신다는 의미로 조성되고 있는데, 앞에서 보았듯이 연꽃이 조성되면 최소한 보살 이상의 부처님을 모셔야 한다.
그러므로 엎어진 연꽃 위에 올라가는 존재는 불 ·보살임을 알 수 있다. 그 복련 위에 팔각기둥을 세우는데, 수행자가 성불을 위해 수행하는 것을 상징(팔정도)하여 팔각으로 조각하고 있다. 다시 팔각의 간주 위에는 위로 받드는 모양의 연꽃[仰蓮]으로 좌대를 만들고 그 좌대 위에 창을 만들어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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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이 나가는 창의 사방은 사성제(고 · 집 · 멸 .도)의 법문을 의미하기도 하고, 모든 중생계를 비춘다는 의미도 있다. 특히 석등에서 불을 켜는 화사(불집)에서 비추는 광명은 부처님의 진신을 상징하므로 부처님을 모신 것을 의미한다.

곧 석등은 실용적인 의미에서는 어둠이 내릴 때 주위를 밝히기 위한 용도로 조성되었지만, 신앙적으로는 수행을 통해 성불한다는 뜻과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중생계를 두루 비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간주형 석등은 팔각기둥으로 된 석등으로 영주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있는 석등이 유명하다. 고복형 석등은 통일신라 후 호법지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석등으로 원형기둥의 중앙에 북 모양을 닮은 굵은 마디를 두었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석등, 합천 청량사 석등, 남원 실상사 석등, 담양 개선사 지석등 등이 고복형 석등이다. 이러한 석등 가운데 중간 기둥이 팔각 간주로 이루어진 것 외에 사자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석등을 볼 수 있다.

이 경우에 사자 기둥은 지혜를 통해 성불하는 것을 상징한다. 문수보살도 사자상을 타고 있듯이 사자는 바로 지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하는데, 부처님의 설법이 모든 중생의 번뇌를 제압한다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다.
[사진자료 : 파계사, 해인사]

부도

원래는 탑의 다른 말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탑을 말한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탑이 사리탑이라면 훌륭하신 스님이 열반하신 뒤에 그 분들의 사리를 모신 탑은 부도탑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부도탑은 주로 복발형이라 해서 밥그릇을 엎어 놓은 형태다. 그러나 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목조건축물을 그대로 본뜬 형태도 있다. 탑이 일정한 정형성을 가지고 있다면 부도는 상대적으로 그 조형양식이 일정 부분 자유롭게 조성된 경우가 많으므로 독특성과 창조성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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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는 사료와 사적기에 의존하여 각 절마다 그 절에서 수행하여 일정한 수행의 단계에 오른 고승들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확인하는 곳이고, 부처님의 진리가 전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역사속에서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때로는 절이 폐허가 되어 있을지라도 옛날에 조형되었던 부도를 통해 그절의 규모의 크기가 얼마나 많은 고승을 배출한 유명한 곳이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부도에 새긴 돌로된 조형 기술은 정형화된 탑과 달리 당시 석조공예가의 솜씨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것이므로 뛰어난 예술성을 접할 수 있다. 전남 해남 미황사에 있는 부도들은 자면미가 한껏 발휘되어 있고,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있는 고려 말에서 조선조의 고승이었던 지공화상 ·나옹화상 무학대사 3화상의 부도전은 정제된 완성미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큰 스님 일수록 외형이 화려하고 장엄한 부도가 많다. 특히 선종의 각 선문 시조의 부도는 거의 탑에 가까울 정도로 화려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부도의 양식은 크게 8각원당형, 석종형, 탑형, 특수형 등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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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각원당형]
8각원당형은 통일신라 때부터 시작된 정형적인 부도 양식으로 기단부 위에 향신과 옥개석을 얹은 모양이다.

이 양식으로는 경복궁내의 염거화상부도, 화순쌍봉사 철감선사부도, 장흥보림사 보조전사창성탑, 문경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과 실상사 수철화상능가 보월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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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종형]
석종형은 종 모양처럼 생긴 부도 앙식이다. 이 양식으로는 울산 태화사지 12지신상 부도를 비롯하여 고려 말에서 조선조에 걸친 부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사진자료 :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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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형]
탑형은 평면방형을 기본으로 하여 탑과 유사한 부도 양식이다. 이에는 원주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이 있다.
[사진자료 :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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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형]
특수형은 탑신부가 원구형을 이루는 부도 양식이다. 이에는 충주 정토사 흥법국사실상탑이 있다.
[사진자료 : 해인사(성철스님)]

비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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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비의 구조]
비문석은 돌로 된 비석에 글을 적은 놓은 것을 말한다. 사리탑과 관계 있는 스님의 일대기를 적은 것이 많고, 사찰의 창건과 유래가 적혀있는 사적이 비문석에 기록하여 전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비문석은 비석을 받치는 좌대, 석비,상단부분인 이수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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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거북을 많이 조형한다. 거북은10장생(해 ·달 물·돌. 구름 · 소나무 · 불로초 · 거북 · 학 · 사슴)의 하나로서 그 등이 넓고 편평하여 영원함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통일신라 때부터 초기의 좌대는 거북의 생동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많다. 그 뒤 고려 시대에 들어오면 거북의 형상을 가진 좌대의 머리부분이 점차 용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발톱이 날카로우며 매우 생동적으로 표현된다.

이처럼 머리부분이 용의 모습으로 변해 갔지만 비문석을 올리는 귀부는 또한 거북의 등을 조형하여 만들어 놓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거북의 좌대는 등 부분이 말려 올라가 연꽃모양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특징으로 한다. [사진자료 : 송광사(보조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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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의 형상을 취한 좌대 위에 올려진 사적기나 스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문석을 말한다. 좌대 위에 올려놓은 비문석에 쓰인 내용은 절의 사적이나 그 스님의 일대기를 후대까지 전해주는 중요한 사료로 전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진자료 : 송광사(보조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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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석 위에 비와 햇빛을 막아주고 지붕의 역할을 하는 석재로 된 부분을 말한다. 용모양을 하고 있다. 멀리본다는 뜻을 가진 이용은 통상적으로 2마리 이상을 조성한다. 모습은 구름속에서 용트림 하면서 여의주를 물고 있는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어 천상의 신비감을 더 해준다.
[사진자료 : 송광사(보조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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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