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곡리 유적

군곡리 유적

[ 海南 郡谷里 遺蹟 ]

지역 해남
출토 소형토기. 高(右上) 8.8cm

출토 소형토기. 高(右上) 8.8cm

전남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 방처마을에 있는 철기시대유적으로, 이 유적은 1986-88년까지 3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해 패각층, 집자리, 토기가마 등이 조사되었다. 1차 발굴은 국립광주박물관과 목포대학교박물관이, 이후 2·3차 발굴은 목포대학교박물관이 담당하였다.

유적은 해발 334m의 가공산(駕空山) 서쪽 기슭의 낮은 구릉에 위치한다. 이곳 구릉의 정상부에는 일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나 경사면은 계단식 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비교적 덜 훼손되었다. 조개무지의 규모는 높이 약 26m의 구릉을 중심으로 너비 200여 m, 길이 300여 m이고, 면적은 약 2만평에 이른다. 구릉은 과거 바다였던 백포만(白浦灣)으로 돌출되어 있고 평탄한 정상부 아래는 비교적 급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1차 발굴은 구릉의 서남쪽 경사면(A지구)과 북서쪽 경사면(B지구)을 조사하였는데, A지구에서의 층위는 자연층에 의해 14개층으로 나뉘어지며 이는 다시 5개의 문화층으로 나뉜다. 먼저 Ⅰ기층은 패각층이 쌓이기 이전에 형성된 층으로 점토띠토기(粘土帶土器) 등이 출토된 청동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층이다. Ⅱ기층은 경질무문토기가 화천(貨泉), 철기, 골각기 등과 함께 출토되는 층으로 패각의 퇴적이 시작되는 시기에 해당한다. Ⅲ기층은 Ⅱ기층과 성격이 비슷한데 토제곡옥(土製曲玉)과 복골(卜骨)이 많이 출토된 층이다. Ⅳ기층은 경질찰문토기회색연질토기가 등장하는 층이고, Ⅴ기층은 타날문토기가 모두 등장하는 시기이다.

출토유물은 무문토기(無文土器)·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경질찰문토기(硬質擦文土器)·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를 비롯하여, 가락바퀴(紡錘車)·그물추(漁網錘) 등 토제품, 돌화살촉(石鏃)·숫돌(砥石)·홈돌 등 석기류, 쇠도끼(鐵斧)·쇠손칼(鐵刀子) 등 철기류, 손칼자루·뼈화살촉(骨鏃) 등 골각기, 복골·토제곡옥·소옥 등 장신구 및 동물뼈 등이 다량으로 발견되었고, 중국 화폐(貨幣)인 화천(貨泉)도 1점 출토되었다.

2차 발굴은 1차 발굴의 동남쪽으로 연장하여 조사하였는데, 층위는 9개층으로 나눌 수 있고, 이를 1차 발굴과 비교하면 Ⅰ기층과 Ⅲ기층에 해당한다. 유구는 패각층 아래의 구덩이 이외에도 패각층이 형성될 당시의 집자리 1기와 패각층 중에서 추정 야외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집자리는 패각층 바로 옆인 구릉 정상부에서 조사되었는데 그 규모는 3.5-3.6m이며 평면형태는 원형에 가깝고 움의 깊이는 10㎝ 내외이다. 움의 깊이가 얕은 것은 경작으로 인해 벽이 많이 깎여 나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닥의 전면은 불에 탄듯이 매우 딱딱하였고, 기둥구멍은 어깨선 밖에서 6개가 발견되었으나 다른 시설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출토유물은 경질무문토기, 시루편, 굽다리접시편, 점토띠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는데, 패각층과 비교해 볼 때 그 연대는 1세기경으로 생각된다. 패각층에서 출토된 유물은 1차 발굴시의 유물과 비슷하나 토기는 대부분 경질무문토기였다. 다만 Ⅲ기층의 특징적인 유물로 인식되었던 토제곡옥과 복골이 Ⅱ기층에서도 출토되었다. 따라서 Ⅲ기층의 연대는 Ⅱ기층의 연대와 연속적인 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3차 발굴은 2차 발굴에 이어 A지구에 3개의 피트를 구획하여 조사하였고, 구릉의 북동쪽 경사면(C지구)과 남동쪽 하단부에서 발견된 토기가마터(土器窯址)도 조사하였다. 유구는 집자리 1기와 토기가마터 1기가 조사되었다. 집자리는 거의 파괴되고 집자리의 윤곽선이 일부 조사되었을 뿐인데 확인된 규모는 장축, 단축이 2.79×1.28m이나 원래 규모는 3.8×2.7m로 추정된다. 평면형태는 타원형에 가깝고 움의 깊이는 0.4m 내외이다. 집자리 내부에서 대형항아리편(大形壺片), 굽다리접시편(高杯片), 손잡이편(把手部片), 손칼편(刀子片), 골각기, 홈돌 등이 조사되어 3세기 이후의 집자리로 추정된다.

토기가마터는 구릉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적황색의 석비레층을 파고 만든 칸이 없는 지하식 굴가마(登窯)이다. 가마의 평면은 표주박 형태이고, 순수한 가마 자체의 길이는 4.2m이다. 그리고 불때는 곳의 길이가 1m, 출입시설의 길이가 1.1m로 유구 전체의 길이는 6.3m이다. 소성실의 장축방향은 남-북에 가까운 남동-북서 방향이며, 지상에 노출된 아궁이, 연소실 등의 장축방향은 남-북으로 소성실에 비해 30˚가량 틀어져 있다.

가마터에서 출토된 유물은 계란모양토기(卵形土器),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 등 모두 타날문의 연질토기이다. 이 가마는 충북 진천 산수리·삼룡리 가마터와 비교되며, 군곡리 가마터의 경우 주변 퇴적층에서 발견된 토기와 조개무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비교해 볼 때 3세기 초반경으로 추정된다. 패각층의 층위는 Ⅱ기층을 제외한 모든 기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출토유물은 경질무문토기 이외에도 타날문토기가 다수 발견되었고, 1·2차 조사와 마찬가지로 많은 유물이 수습되었다. 특징적인 유물은 블록 샘플링한 곳에서 소형의 옥류, 탄화된 쌀 및 보리가 발견되었다.

군곡리 유적의 연대는 B.C. 4-3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3세기경에 해당되는데, 이 유적은 전남지방에 있어서 이 시기의 문화적 공백을 메워 주는 유적이다. 즉 그동안 전남지방에서는 이 시기의 유적으로 광주 신창동 독널무덤(甕棺墓) 이외에 알려진 유적이 없었기 때문에 수 없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고분기에 접어들어 영산강유역에서 독특하게 발달된 대형독널무덤 사이에 문화적인 공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곡리 유적이 조사됨으로써 이러한 문화적인 공백을 메워줌은 물론, 김해 회현리, 부원동, 수가리, 부산 조도, 삼천포 늑도 유적, 남원 세전리 유적 등과 함께 남해안지방의 철기문화를 밝히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참고문헌

  • 海南 郡谷里貝塚Ⅰ·Ⅱ·Ⅲ(崔盛洛,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년 - 198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