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전리 유적

세전리 유적

[ 南原 細田里 遺蹟 ]

지역 남원

전북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철기시대 집자리 유적으로, 행정구역상 으로는 남원군 송동면 세전리(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에 속한다. 이곳은 남원시에서 서쪽으로 30˚정도 치우친 남쪽으로 11㎞ 지점이며, 전남 곡성군과 전북 남원군의 군계(郡界)가 되는 섬진강의 강안(江岸)에 해당된다. 또한 곡성읍에서는 직선거리로 4㎞ 내외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은 세전리 부락의 남쪽 들판, 수지천(水旨川)과 요천(蓼川)이 합류하며 이루는 삼각형 대지상에 위치한다. 유적은 본디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으며, 주변은 수전(水田)이었다. 이것은 유적이 주변지역보다 한 단 높은데서 비롯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유적이 있는 밭이 수전보다 1.5m 가량 높다. 이처럼 유적이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본래의 유적이 더 큰 규모였을 가능성을 뜻하며, 밭과 수전의 경계면에서 유구단면이 확인되는 점과 동쪽의 수지천이 자주 범람했었다는 주민들의 얘기에 의해서도 그 가능성이 더욱 짙다.

1985년 초부터 1986년 5월까지 3차에 걸쳐 조사된 집자리는 30여 기로, 평면형태는 타원형 내지 장방형(長方形)을 하고 있다. 면적은 25~35㎡ 내외의 크기이고, 움의 깊이는 얕다. 바닥처리는 생토를 그대로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주로 점토와 모래를 주재료로 삼아 단단하게 굳힌 경우로 나눌 수 있다. 기둥구멍(柱孔)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원추형의 집으로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또한 움집 안에서는 난방, 취사와 관련된 화덕자리(爐址)를 조사하였는데, 가운데 위치해 있기보다는 한쪽벽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 이중 특이한 것은 예새 따위가 혼입된 소토부(소토부)가 상층에 있고, 그 하부에 다시 소토가 노출된 것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소토부 주위에는 많은 토기편들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 중, 토기는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를 포함한 무문토기계통의 전통을 강하게 지닌 경질무문토기타날문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기종으로는 접시, 바리, 독, 귀때토기, 목항아리, 시루 등이 있다. 소형토기는 경질 계통의 무문토기로, 실생활 용도가 아닌 실생활 토기를 모방해서 만든 특수한 용도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유적에서는 토기의 기형이 다양하고, 수량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쇠손칼(鐵刀子)를 포함한 철기류는 여러 집자리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집자리 주변 흙에서 불에 탄 쌀, 보리, 팥 등의 곡물과 각종 뼈가 검출되었고, 유구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세형동검(細形銅劍)도 발견되었다. 이외에 가락바퀴(紡錘車), 그물추(漁網錘)를 비롯한 토제품과 홈자귀(有溝手斧), 돌끌(石鑿), 돌칼(石刀) 등의 석기도 출토되었다.

세전리 유적에서는 각종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토제굽은옥(土製曲玉), 대롱옥(管玉), 토제소옥은 주로 적갈색과 흑갈색을 띠고 있으며, 이중에는 세트로 발견된 것도 있다. 또한 수정을 잘라낸 원석(原石)이 발견되었으며, 이것은 수정옥을 제작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구슬이 다량으로 발견된 것은 당시의 기록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마한조(馬韓條)의 기록인 “以瓔珠爲財寶......”의 내용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세전리 집자리는 그 출토유물로 보아 무문토기 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대략 4세기 정도까지 존속했던 취락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全北地方 原三國時代 住居址의 硏究(溫華順, 漢陽大學校 碩士學位論文, 1994년)
  • 全北地方 原三國時代 硏究의 問題點(尹德香, 韓國上古史硏究의 現況과 課題(1), 韓國上古史學會, 1988년)
  • 南原細田里遺蹟地表收拾遺物報告(尹德香, 全羅文化論叢 第1輯, 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