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장식

실내장식

다른 표기 언어 interior design , 室內裝飾

요약 건물의 실내 설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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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내 디자인의 원칙
  2. 실내 디자인의 미학적 요소
    1. 개요
    2. 공간
    3. 재료
    4. 조명
    5. 구도의 방식
    6. 상징과 양식
  3. 실내 디자인의 물리적 요소
    1. 천장, 바닥, 벽
    2. 창,문
    3. 기타 요소
    4. 조명
  4. 고대 서양의 실내장식
    1. 개요
    2. 이집트
    3. 그리스
    4. 헬레니즘 시대(BC 323~31)
    5. 로마
  5. 중세 서양의 실내장식
    1. 비잔티움
    2. 중세초의 유럽
    3. 중세 후기의 유럽
    4. 이슬람 제국
  6. 르네상스에서 18세기말까지 서양의 실내장식
    1. 개요
    2. 프랑스
    3. 스페인
    4. 북유럽
    5. 영국
    6. 미국
  7.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의 실내장식
  8.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실내장식
    1. 독립 후 고전주의 운동(1785~1835)
    2. 낭만주의 운동과 양식들의 전쟁(1835~1925)
  9. 20세기의 실내장식
  10. 동양의 실내장식
  11. 중국의 실내장식
  12. 일본의 실내장식
  13. 인도의 실내장식
  14. 한국의 실내장식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욕망은 문명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지만, 인조 공간을 의도적으로 구상하고 설계하는 인테리어 디자인은 비교적 새로운 분야에 속한다. 적어도 20세기 중반 이래 실내장식가라는 용어는 너무 무분별하게 쓰여 거의 무의미해졌으며, 그 결과보다 기술적인 용어들이 대신 쓰이게 되었다. 이 직종이 확고히 뿌리를 내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이를 실내건축으로 보고 있으며, 인조 환경을 이루는 많은 요소와 관계하고 있는 개인들은 그 전체 범위를 환경설계라고 일컫게 되었다.

안방 가구의 배치
안방 가구의 배치

실내 디자인의 원칙

실내 디자인은 건축 또는 환경 설계의 한 전문분야이며 그 요소로는 건물의 구조, 부지 조경, 가구, 건축 그래픽, 그리고 실내세부가 있다.

오늘날에는 입안과 건축이 기술적으로 대단히 복잡해져 한 사람의 건축가나 설계자가 현대의 건물을 구성하는 많은 면을 모두 혼자서 전문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건축시공). 따라서 건축가는 통상 건물의 종합적인 설계를, 실내 디자이너는 설계상의 보다 조밀한 면들, 구체적인 미학적·기능적·심리적 관련문제들, 각 공간의 개성에 관여하는 것이 보통이다.

실내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거주용과 비거주용으로 나누며 '공간 구상', 즉 공간 수요를 분석하고 공간을 할당하며 기능을 상호 관련시키는 등 여러 새로운 분야의 작업계획이 있다. 여기에 따라 많은 설계회사들이 업무 분야를 호텔·백화점·공업단지·상점가·학원·연구소·병원·진료소·요양소 등으로 전문화되고 있다. 대부분의 대규모 건축회사에는 실내 디자인 부서가 있다.

실내 디자인의 미학적 요소

개요

미와 미학적 탁월성을 일반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원칙은 디자인이 '실용적'이냐, 즉 그 목적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이다. 극장이 시준선(視準線)과 음향효과가 불량하고 출입구가 비좁다면 장식이 아무리 아름답게 되어 있다 하더라도 분명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실내와 그 실내 비품의 미학적인 설계에서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그 시대의 자재 및 기술과 사회적·경제적 형편이다. 18~19세기에 부르주아지가 즐기던 귀족양식이 20세기 중산층에는 맞지 않으며, 오늘날의 자재와 공정을 이용하여 과거의 자재와 공정을 모방한다는 것 역시 격에 맞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실내는 정의상 건물 내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건물과 매우 현실적인 관계를 갖는다. 옛날이나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가장 좋은 실내란 성격과 적합성이 건물 자체와 잘 부합하는 실내를 말한다. 뉴욕 시의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에 있는 트랜스월드항공사(TWA) 터미널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가구가 어울리지 않아 핀란드 태생의 건축가 에로 사리넨이 전체적으로 설계 구상한 것이었다. 실내와 건물이 훌륭하게 일체화된 또 하나의 예는 뉴욕 시에 있는 포드 재단 본사이다.

건축가 케빈 로슈와 존 딘켈루의 작품으로 실내는 워렌 플래트너가 맡았는데, 울을 두른 정원 쪽으로 멋진 공간들이 열려 있는 설계가 절묘하다.

미학적으로 고려해야 할 가장 어려운 문제는 실내에 적합한 분위기 또는 성격을 부여하는 적합성이다. 디스코테크의 실내 디자인이 학술도서관에 어울리기는 어려울 것이며, 유치원에서 기대하는 분위기를 대학 교실에서 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러한 대응과 관련성은 흔히 복합적·미학적인 요인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요인들도 가지고 있다.

공간

완성된 실내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공간이다.

공간은 디자이너가 전체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기분을 즐겁게 할 수도 침울하게 할 수도 있으며, 경쾌하게 할 수도 있고 차분하게 할 수도 있다. 공간이 반드시 크고 당당해야만 미학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작은 구조물 내에서도 양감과 형태의 처리가 감동적이고 아름답게 이루어질 수 있다. 공간이란 디자이너가 색상·결·조명·규모라는 도구들을 가지고 반죽하고 성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재료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 요소들의 상호관계를 명확히 알고 싶다면 로마에 있는 성베드로 대성당의 실내를 요란한 색깔들로 칠하거나, 모든 표면에 발포제(發泡劑)를 분사하거나, 명암의 구별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 만큼 투광 조명으로 아주 강력하게 비춘다면 그결과가 어찌될 것인가를 상상해보는 것이 좋다. 이러한 변형의 어느것도 분명 그 공간의 미와 우수성을 완전히 망가뜨릴 것이다. 공간은 또한 의미있는 실내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전혀 변화가 없다면, 즉 천장이 높고 널찍한 공간만 있지 그와 대조되는 천장이 낮고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좁은 공간이 전혀 없다면, 또는 사용자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연속적인 체험을 얻을 수 있도록 공간들이 상호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면, 그 공간은 실로 단조로워서 재미가 없을 것이다.

한 건물 내의 모든 실내가 똑같은 색상과 재료와 결로 되어 있다고 해도 역시 무미건조한 결과가 생길 것이다. 공간 조작은 미학적으로나 기능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한 건물에 하나의 작은 문간방을 두는 것은 비바람이나 추위와 더위를 막는 데도 필요하지만, 옥외로부터 건물 내부로의 전환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재료

유능한 디자이너들은 모든 재료(특히 천연의 재료)의 고유한 속성과 결을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결은 외관 때문만이 아니라 촉감 때문에도, 빛의 흡수 또는 반사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도 중요하다. 쓸려 벗겨지는 표면이나 우툴두툴하게 회칠한 벽면은 촉감이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하며, 실내에서는 어떤 용도로 쓰이느냐에 따라 위험할 수도 있다.

조명

자연적·인공적인 것 모두 가장 중요한 디자인 요소의 하나지만, 표면의 색상과 결이 적합하지 않으면 조명의 조절력과 그 효과는 상실되고 말 것이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성은 조명의 조절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로 이 원리가 모든 실내 공간에 이용될 수 있으며, 현대의 실내들은 흔히 천창 또는 고창(高窓)을 설치하여 조명의 다양화를 꾀한다. 인공 조명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며 집중조명과 전반적인 조명의 질 및 다양성을 똑같이 고려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구도의 방식

공간의 구도에는 규격적인 구도와 파격적인 구도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이 둘은 비교적 쉽게 정의되고 분류되며, 사실상 가구와 실내장식의 전역사에 걸쳐 유용하다. 규격적인 양식이라면 으레 궁중 또는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의 호화로운 저택에 장치된 가구들을 연상하게 된다. 파격적인 양식이라면 으레 시골 생활, 또는 시골 지방의 장인들이 한정된 도구로 토산의 목재를 이용해 만든 단순한 가구류를 연상하게 된다. 규격화된 가구는 일반적으로 규격적인 실내구도로 이어지며 균형과 대칭은 규격적인 구도의 전제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규격이란 어느 특정 시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현대의 아주 유명한 의자 가운데 하나로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제작한 바르셀로나 의자는 규격에 극도로 신경을 쓴 우아한 가구이다. 세팅(setting)은 공간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시골풍의 세팅이라면 그 표현이 의미하는 그대로 전원적이고 파격적일 것이며, 따라서 규격화된 연립주택이나 공동주택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바르셀로나 의자
바르셀로나 의자

사무용과 공용의 실내는 대부분 도시의 중심지에 입지하는 만큼, 시골풍으로 또는 가정처럼 보이게 하려고 한다면 미학상으로 모순이 될 것이다. 구도의 어떤 방식들은 입지와 건축에 의해 결정되는 것 못지않게 공간의 기능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아늑한 또는 포근한 실내라고 하면, 주택의 실내 또는 그와 비슷하게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도록 꾸민 레스토랑을 연상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징과 양식

디자인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상징의 예가 많지만, 상징이 의도적인 표현이라기보다 양식의 미묘한 반영인 경우가 많다.

종교적인 건물, 특히 교회는 최근까지도 한결같이 양식 또는 상징의 전통적인 표현이었다(종교건축). 교회와 교회 건축은 중세에 번창했으며, 지배적인 상징이 된 교회 건축 양식은 고딕 양식이었다. 공공 건물이나 관청 건물의 디자인에도 그와 비슷한 상징 또는 양식의 전통이 있었다. 시청사, 법원 건물, 주요정부청사들은 실내와 실외가 모두 '고전'양식으로 되어 권위와 권력과 안정을 상징했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그리스 로마의 고대 문명 및 르네상스의 사상과 연관지어 생각해온 오랜 역사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실내 디자인에서 또 하나의 상징 형식은 특별한 주제 또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실내의 창조였다.

가장 오래된 실례의 하나가 이집트 무덤이다. 그 실내 디자인과 장식은 왕의 생애 또는 그의 생애 가운데 특별한 사건을 묘사했으며, 그 실내 전체는 사자(死者)의 사후 세계로 여행을 보증하고 그 세계에서 그가 확실히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주술로 계획되었다.

실내와 실내 비품들에서 발전한 양식은 항상 그 당시 사회적 구조를 반영했다.

예를 들어 루이 15세가 사용하던, 굴곡이 섬세하고 융단 장식이 풍부한 의자의 우아한 여성적인 선들을 보고 그것이 궁중 생활의 천박한 풍조가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임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다. 또한 모양이 조잡한 아메리카 초기의 가구를 보고 그것을 만든 개척민의 생활을 상상할 수도 있다. 생활이 고단하고 시간은 귀하여 가구 종류가 필수품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영업 및 사무용 디자인은 기능과 능률을 위주로 하는 만큼 상징은 부차적인 요소로 인정되고 있다. 사무실의 디자인, 위치, 책상의 크기는 그 사무실 주인의 지위를 반영한다. 그러나 고위 간부 스스로가 사무용 책상을 아예 없애버리고 거실과 비슷한 사무실로 꾸밀 수도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기계적인 문서 업무의 단계에서 벗어났으므로 표준 규격의 사무실 비품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실내 디자인의 물리적 요소

천장, 바닥, 벽

현대의 디자이너들 가운데 천장이 제공하는 디자인의 가능성을 이용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러한 가능성의 하나는 목재로 결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단순하게 회칠한 천장이 일으키는 효과 또한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빛을 반사하고 공간에 잔잔한 응집력을 줄 수 있는 하얗게 회칠한 천장이 필요할 경우도 많다.

오늘날의 천장은 대부분 낮기 때문에 굵은 결이나 강력한 색상은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낼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식 없는 흰 천장이 유행하는 것이다. 현대의 공공 건물에서는 실내의 콘크리트 슬래브 구조 속으로 들어간 천장을 빈번히 볼 수 있다. 그 슬래브와 천장 사이의 공간은 조명 시설을 깊숙이 넣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기계 설비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천장
천장

실내 바닥에는 기본적으로 2종류가 있다.

하나는 구조물의 불가분의 일부인 바닥이요, 또 하나는 구조물이 완성된 후 까는 바닥이다. 건축가와 실내 디자이너는 바닥을 슬레이트·테라초·돌·벽돌·콘크리트 또는 나무 등의 재료를 다양하게 고려하여 실내에 적합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모든 벽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재료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재료란 어떤 재료건 올바르게 사용되면 다른 것을 덧씌울 필요가 없다. 1960년 이후 건축된 몇 개의 우아한 건물은 목조의 틀들이 남긴 콘크리트 자국을 재료의 의식적인 표현으로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다.

오늘날 재료의 진정한 표현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는 과거의 전통에 대한 반발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다. 예컨대 20세기에는 벽돌로 쌓은 실내의 벽을 아주 아름답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는데, 이러한 심리에는 옛날의 연립 주택들이 매력적인 벽돌 구조 위에 여러 겹으로 회반죽과 페인트 또는 벽지를 입히고 있는 데 대한 반발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벽의 장식적인 세부 또는 장치는 그것이 쓰일 만한 정당한 이유가 사라진 지 오랜 뒤에도 존속하는 예가 드물지 않다.

벽의 패널 장식은 수백 년 동안 유행해왔으며, 실제로 자연적인 나뭇결은 보온성과 기품을 더해준다. 또한 다소 뒤늦게나마 회반죽에서도 비슷한 예술이 발전했다. 20세기의 건축 비용과 방법으로는 진정으로 정교한 패널 장식이나 고도로 장식적인 회반죽 도장을 하기가 쉽지 않거니와, 이런 종류의 모방적인 디자인은 현대건물에 적합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무 패널과 여러 가지 다른 베니어로 만든 합판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중요한 공간을 위한, 비쌀지라도 아름다운 벽면재(壁面材)가 아주 다양하게 제공된다.

창,문

현대의 디자인에서 창과 문은 장식적 요소나 대칭구조의 부분으로 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기능적 요소로 간주되며 표현된다.

이 채광과 통풍과 조망용으로 면밀하게 설계·배정되면 장식적 처리는 보통 불필요하며, 셰이드나 셔터와 같은 단순한 장치 하나면 채광과 프라이버시 관리 수단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물은 창에 장식적인 처리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건축주들이 창의 배치에 특별한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은 여닫는 방향과 위치 선정을 기능적 필요에 결부시키고 높이·색상·재료 또는 결을 인접한 벽면이나 공간의 디자인 요소들과 관련시켜 면밀하게 설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세기에 이용되고 있는 문들은 대부분 '플러시 도어'(flush door)이다. 즉 목재나 금속재의 표면이 절단됨이 없이 통으로 된 문이다. 유리가 사용되는 경우에도 보통 테나 쇠시리로 구획되지 않은 최대한의 유리면을 갖도록 짜여진다. 때로 중요한 공간의 출입문들은 구도의 초점으로 설계 또는 장식되지만, 보통은 세부 구성의 솜씨가 중요시된다.

기타 요소

문의 처리와 관련하여 언급한 세부 구성은 실내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모든 건축 요소의 세부 구성은 빈틈이 없어야 한다. 세부가 엉성하면 디자인이 엉성하게 마련이다. 디자인에서 세부 구성이 의미하는 바는 도해(圖解)에서만이 아니라 재료들을 조립하는 방법, 한 부분을 다른 부분에 묶어 고정시키는 방법, 부분과 재료들을 표현하고 분절화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세부 구성의 다양한 가능성은 디자이너에게 진정한 도전이 되며, 대량생산되는 창이나 전기 스위치 또는 배관 설비들과는 달리 디자이너에게 완전히 개성적인 또는 창조적인 방법으로 디자인할 기회를 준다.

조명

빛은 인테리어 디자인에서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이다.

20세기에 건축된 대부분의 실내 공간은 일광을 이용하는 것 못지않게 인조광을 이용하며, 따라서 조명은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아주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되었다. 조명에는 크게 기능적·미학적·위생적인 면의 3가지 면이 있다. 위생적인 면은 흔히 간과되지만, 불충분한 조명은 피로와 육체적인 불편을 일으킬 수 있다. 조명 기술자들은 각종 직업을 위한 조도(照度)의 권장 기준을 세웠으며, 광원의 밝기에 관한 규칙과 기준 및 직사광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도 마련했다.

빛은 분산될 수 있으며, 제어될 수도 있다. 현대의 실내에서 쓰이는 조명의 2가지 기본형은 백열조명과 형광조명이다. 전자는 일광보다 다소 붉지만 스펙트럼의 모든 빛깔을 포함한다. 형광은 고르지 않은 스펙트럼을 갖기 때문에 빛깔들이 왜곡되어 보이는 경향이 있다. 백열등형광등을 혼합하는 것이 빛깔의 정확도를 얻는 최선의 방법이다. 오늘날의 형광등 가운데는 빛깔의 정확도가 일광에 가까운 것도 있으며, 제조업자들은 이용할 수 있는 등의 품질 향상에 계속 힘쓰고 있다.

두 종류의 빛은 다같이 실내에서 '직접' 또는 '간접' 조명으로 이용되거나, 이들 방식을 조합한 이른바 '반직접' 또는 '반간접'으로 이용될 수 있다.

실내장식가와 건축가는 가능한한 조명 시설을 붙박이로 설치하기 위해 힘쓴다. 간접 조명, 조명 코너, 건축물 자체의 채광 장치는 일반적으로 휴대용 조명등보다 훨씬 더 능률적으로 조절될 수 있다. 우수한 조명을 계획하려면 하이라이트와 그늘과 강조광에 어느 정도의 다양성을 부여하여 단조로움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발광 천장과 같이 전체적으로 균등한 조명 시설은 고도로 능률적일 수는 있지만 개성과 감흥이 결여되었다는 단점이 있다. 실내는 낮과 밤의 다른 시간대에 공간 내에서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백화점과 전문점 같은 일정한 실내에서는 조명이 선전과 판매 도구가 되며, 무도장이나 극장과 같은 축제 분위기를 갖는 공간에서는 양질의 조명이 다른 어떤 디자인 성분보다도 광휘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돋울 수 있다.

고대 서양의 실내장식

개요

서양에서 실내장식의 기원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발굴된 고대의 유물들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실내 비품은 벽돌을 쌓아 만들어 의자·테이블·침상으로 사용한 것들로, 그 위에 직물이나 짐승가죽을 씌웠을 것이 분명하다. 벽은 페인트 칠을 했고 중요한 건물에는 벽화로 장식했으리라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다. 이동성(移動性) 가구는 처음에는 왕궁과 같은 저택과 공공건물에만 있었던 것 같으며 실물이 발견된 적은 없고 대부분 벽화, 조각, 꽃병의 그림으로만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BC 3000년경 고대 이집트의 무덤들에서 출토된 몇 개의 가구가 보존되어 있는데 침상·의자·테이블·장롱 형태의 것들이다. 그러한 가구들에서 처음 발견되는 장식은 가구(특히 침상)의 지주로 쓰인 황소와 사자 다리이다.

이집트

20세기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된 많은 기념비적인 석조 무덤 및 사원들과는 대조적으로 이집트의 가옥들은 내구성이 없는 자재들로 건축되었으며, 따라서 현재까지 보존된 유적이 거의 없다.

벽은 햇볕에 말리거나 가마에서 구워 만든 진흙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고, 마루는 흙을 다져서 만들었으며, 안벽의 마무리 작업으로는 흔히 반반한 진흙을 얇게 입혔다(벽화). 가장 단순한 형태의 벽 장식은 꾸밈이 없이 흰색 또는 색깔을 넣어 칠을 한 것이었지만, 보다 큰 저택에는 진흙 위에 정교하고 다양한 무늬를 칠했다.

이집트의 장식 모티프 가운데는 생명의 근원인 나일 강과 연관된 자연 형상들에서 따온 것이 많았다. 연꽃과 연꽃의 봉오리, 파피루스, 야자나무가 체크 무늬의 테두리나 감긴 줄 모양의 나선과 함께 장식되어 공간감과 우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리스

고전시대(BC 5세기)의 그리스 가구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없다시피하지만, 가구가 훌륭하게 제작되고 정교하게 장식되었다는 많은 증거가 되고 있다.

그림을 새긴 도기가 지금까지 대량 남아 있어 그리스 생활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여러 종류의 가구(의자, 테이블, 일상 식탁용의 소파 등)와 수많은 액세서리를 볼 수가 있다. 사실상 이 그림들은 19세기초 프랑스 제정양식에 큰 영향을 미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스 가구에 미친 이집트의 영향은 초기의 가구 일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다리 끝마다 동물의 발 모양이 달려 있는 것이 하나의 예이다.

이것도 프랑스 제정양식에서 애용된 주제의 하나였다.

헬레니즘 시대(BC 323~31)

이때는 가정적인 안락함과 장식이 다시 존중되었다.

실내의 모자이크 바닥은 중요한 장식의 하나였는데, 처음에는 올린토스(그리스 고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것같이 조약돌로 만들어졌지만 차차 로마 제국 전역에서 널리 쓰이게 되는 모자이크로 발전해갔다. 중심부가 정교하게 설계되고 가장자리는 소용돌이나 열쇠무늬로 거칠게 장식되며 넓고 사실주의적인 모티프로 디자인된 패널은 가구의 안배에서 하나의 초점 역할을 했다.

로마

로마의 실내장식은 알려진 것이 많으나 로마의 가구는 전(前)시대의 그리스 가구를 모델로 했다.

서기(西紀)초부터 서양을 지배한 양식은 로마를 경유하여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양식이었다. 고전적인 양식들은 수학적인 비례 법칙에 바탕을 두었는데, 그 법칙들은 총체적인 건물 구성뿐만 아니라 실내장식의 많은 면에도 적용되었다. 벽 장식은 로마에서 BC 150년경에 시작되었으며, BC 80년경까지 벽돌로 쌓은 것처럼 보이는 회벽이었다. 그러한 장식은 건축상의 요소들, 즉 문이나 벽기둥(벽에 붙여 세운 납작한 기둥)과 결합되었다.

또한 기둥·벽감·무개창(無蓋窓)들을 정교한 상상화와 초자연적인 형상을 새긴 벽화로 장식했다(아칸서스). 로마의 리비아 별장에 있는 것과 같은 채색 유적들은 18, 19세기의 서유럽에서 유행한 낭만주의풍의 전조(前祖)였다.

BC 27~AD 14년에 황제로 군림한 아우구스투스가 처음 본 로마는 벽돌로 되어 있었는데, 그가 떠날 때의 로마는 대리석 도시로 바뀌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것은 확실히 황제의 로마 실내장식은, 이 도시가 세계적인 도시로 부상했고 이 도시로 제국의 부(富)가 수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색다른 대리석 조각들이 수입되기 시작했고, 벽돌 담의 표면에는 흰색과 유색 석제에 운을 낸 판(Slab)이 입혀졌다. 창문용 유리가 한정된 양으로나마 사용되었는데, 판유리는 제조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대부분 작고 두꺼우며 변색된 창유리가 쓰였다.

때로는 광선을 투과시키기 위해 아(亞)셀렌산염의 투명한 결정체(투명석고)가 이용되었다. 로마의 가구는 석제·목제·청동제였다. 밖을 향해 훤히 트인 별장에 석조 벤치와 탁자를 놓는 경우가 많았다. 목제 가구는 현존하는 것이 없지만, 청동제 가구는 현존한다. 탁자는 흔히 색다른 목재와 베니어로 만들고 상아나 청동 또는 은으로 장식했다(금속세공품). 의자를 대신하게 된 식탁용 카우치(couch : 긴 의자)는 화려한 장식에 때로는 은이나 청동을 도금했다.

의자는 옛 그리스의 모형을 본떴으며, 쿠션이 푹신했다. 태피스트리 장식은 그 기술의 역사가 오래된 이집트로부터 로마로 들어왔다. 로마인들은 유리 제조 기술에도 뛰어났는데 가정용 유리가 실용적인 것과 장식적인 것 모두 대량으로 만들어졌으며, 유리 공장들이 세워졌다. 또한 여러 종류의 가재도구에 청동이 대량으로 사용되었으며 에트루리아인이 제작했거나 그리스와 그리스 식민지들에서 약탈해온 청동제 조상(彫像)이 중요한 실내장식품이었다.

중세 서양의 실내장식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동과 서가 만나기에 편리한 곳이어서 페르시아 예술의 영향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중세초 유럽의 그리스도교 양식에 전달했다(→ 비잔틴 예술). 비잔틴 제국에서 세속적인 벽화와 특히 모자이크가 계속 유행하기는 했지만, 현존하는 비잔틴 양식의 실내는 대부분 교회 건물의 내부들이다.

콘스탄티노플은 근동과 중동에서 들어온 그리스 양식이 쇠퇴하고 새로운 이슬람 문명이 수립되면서 점점 동양풍의 도시로 변해갔다.

중세초의 유럽

중세 초기 유럽에는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물질적인 소유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고 실내장식의 필요와 기회도 거의 없었다. 이 기간에 예술은 교회가 독점하게 되었으며, 교회는 중세기 세계의 모든 면을 지배할 정도로 성장했다. 9세기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이 북유럽에서 확립되었는데, 이 양식은 로마 제국 양식보다 반원형의 아치와 둥근 천장을 선호하고 건물을 장식하는 조각은 중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동양의 직물이 유럽의 호화로운 실내에서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13세기에는 중국산 자기가 처음으로 서양에 들어왔다.

중세 후기에 이르러서는 일반적으로 이라고 불린 큰 저택들이 미학적인 원리보다는 군사적인 원리에 따라 설계되었다.

중세 후기의 유럽

12, 13세기에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근동의 사치스러운 생활상을 보면서 눈을 뜨게 되었고, 고향에서 보다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자신들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성은 서서히 영주의 저택으로 발전하고 훨씬 더 많은 방이 개인용으로 분화되어 사생활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고딕 양식의 첫 등장은 12세기말경 프랑스 지방에서였다. 본래 중동 지방에서 생겨나 이슬람권의 건축가들에 의해 발전된 이 양식은 서유럽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으며,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지만 17세기에 이르러 고딕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 양식의 특징은 첨두 아치의 광범위한 이용, 널찍한 실내공간, 스테인드 글라스 창이 많은 담벽 등이다. 이 양식은 비례를 따지는 고정된 규준에서 탈피하고 장식은 대체로 당시의 유행과 건물의 용도를 이탈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장인의 자유로운 표현 수단이었다. 고딕 양식의 실내에는 태피스트리, 융단, 중세의 가구가 포함되었다.

이슬람 제국

7세기에 일어난 아랍인의 정복 사업과 8세기의 인도와 스페인을 향한 이슬람 세력의 확대는 그때까지 알려진 세계 도처의 장식 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건축). 그것은 특히 장거리 교역로의 대부분이 아랍 영토를 통과하기 때문이었다.

건축의 특성과 외관은 복잡하고도 색상이 풍부한 표면 장식을 따르고 특히 인기를 끈 대표적인 장식물은 세라믹 타일과 타일 모자이크로 바닥, 벽, 지붕, 둥근 천장의 안팎을 장식했다. 이슬람교도들의 지배를 받은 이집트와 시칠리아에서는 고도의 벽면 장식과 스페인의 무어인이 만들어낸 복잡하게 교차하는 기하학적 디자인이 지배의 잔재를 보여주고 있다.

르네상스에서 18세기말까지 서양의 실내장식

개요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는 옛 고전 양식의 부흥운동이며 이것을 공정하게 평가한다면 고딕 시대라는 단절기가 경과한 후에 일어난 서양예술 본류로의 복귀였다.

그렇지만 로마 제국의 몰락과 르네상스 사이에는 1,000년이라는 세월이 가로놓여 있었으며,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이 로마의 고전 양식과 닮은 정도는 현대의 이탈리아어가 라틴어와 닮은 정도와 같은 것이다. 둘은 비슷하지만 결코 같은 것은 아니다. 다만 역점을 두는 곳이 달라졌을 뿐 르네상스는 로마의 장식용어를 다시 쓰게 했다. 특히 고전적인 기둥 양식(기둥이 주초·주신·주두와 엔타블레이처로 되어 있는 양식)이 채용되고 새로운 건축 양식에 맞추어 수정되었다.

건축가들은 공간처리가 고도로 숙달되었으며, 장식은 공간효과를 고전 양식으로 명확히 밝히고 풍성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6세기로 접어들면서 부흥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는 수정되기 시작했고, 결국 그 양식은 뚜렷이 서로 다른 두 분야로 갈라졌다. 하나는 전통을 충실히 지키는 길이었다.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고대 로마의 작품들을 모델로 삼았으며, BC 1세기에 비트루비우스가 10권으로 된 자신의 저서 〈건축에 관하여 De architectura〉를 통해 제시한 비례의 법칙에 따라 설계를 했다.

다른 하나는 미켈란젤로가 시작한 마니에리스모(manierismo)를 거쳐 바로크 양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마니에리스모와 바로크 양식은 다같이 과장된 형태로 전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의 엄격한 논리와 정밀성을 배격했으며, 자유롭고 활달한 움직임의 느낌을 전달하고 설계라는 드라마에 관객을 포함시키는 데 목표를 두었다.

바로크는 반(反)종교개혁의 양식이었으며, 개신교의 금욕적인 교리와 대조적인 예수회가 가톨릭 교회의 속권(俗權)과 풍요의 표현수단으로 이용했다.

바로크 양식의 연극풍(演劇風)은 곧 군주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들은 자기들이 짓는 궁전을 이 양식으로 꾸미기를 원했다. 기본적인 기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기법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의 제약은 대담한 연극적인 효과와 모델링의 관능적인 화려함 속에서 모두 사라졌다. 벽은 만곡(彎曲)되고, 박공은 끊어졌으며(즉 중앙부가 빠졌음), 기둥과 붙임기둥은 건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꼬아졌다.

이러한 양식이 이탈리아로부터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각 나라나 지방의 취향과 재능에 따라 다양하게 흡수되고 첨가되었다.

프랑스

15세기 중엽 이탈리아로부터 들어온 양식이 프랑스 건물들의 외관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서서히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고딕 양식의 디자인 위에 장식의 세부를 덧붙이는 정도에서 점차 전체의 대칭과 규칙성으로 확대되었다(문장학). 프랑스 르네상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근본적인 차이의 하나는 후자에서는 양식의 혁명 시작부터 전체적인 디자인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권력의 중앙집중과 프랑스 궁중 생활의 호사는 이미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와 장인들을 후원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프랑수아 1세(1515~47)의 치하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교회 건축의 필요는 위대한 고딕 건축 시대에 이미 충족되었기 때문에, 왕과 그의 봉신들은 장엄한 외관을 자랑하는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성곽들을 서로 다투어 짓기 시작했다. 건축용 석재와 목재는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석공과 목수들은 그것들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17세기초와 루이 14세의 오랜 재위기간(1643~1715)에는 의식(儀式)과 장엄한 분위기가 궁중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정교하게 장식된 일련의 큰 방들은 왕과 그의 조신들에게 호화로운 배경을 조성해주었다(루이 14세 양식). 특히 바로크 양식은 이러한 화려하고 당당한 느낌을 표현하기에 아주 적격이었다.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St. Nicholas Church)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St. Nicholas Church)

17세기 중엽에 건축되어 널리 모방된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궁중의 실내장식과 장치 양식을 낳았으며 이 궁전은 프랑스의 영광과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습 군주인 루이 14세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건립된 본보기였다.

18세기 중엽의 공상적이고 섬세한 로코코 양식은 바로크 양식에서 파생된 것이다.

바이에른 대성당(Bavaria cathedral)
바이에른 대성당(Bavaria cathedral)

바로코 양식이 부담스러운 제약에서 탈피했다고는 해도 고전적인 대칭 관념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18세기 초반까지는 수직으로 분할된 물체는 서로가 상대의 거울상이 되는 2개의 반부(半部)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남이 없었다. 그러나 곧 비대칭이 동시대의 장식에서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가 되었고, 그것이 로코코 양식의 중요한 일면이 되었다. 더불어 비대칭으로의 전환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비대칭의 디자인을 가진 수입된 동양자기였다.

로코코 양식의 특색은 꽃 장식과 곡선에 있으며, 가구의 다리는 우아하게 굽은 모양이었고 윗부분에 뱀의 형상을 장식했다. 로코코 양식이 끝나는 시점은 쉽게 알 수 있는데, 이 양식이 끝나는 시기에 의자의 다리가 금방 똑바르게 되기 때문이다. 로코코 양식의 비대칭적인 꾸불꾸불한 선들은 동시대 영국의 양식(대칭적으로 배열한 직선·직각·원·타원의 절제된 장식)으로 서서히 대체되었다. 가볍고 세련된 쇠시리는 보존되고 장식의 형상들은 또다시 건축의 틀에 의해 제한을 받게 되었다.

스페인

스페인에서는 무어인의 영향이 그후에 들어온 서양의 고전 양식과 혼합되어 장식 디자인에서 독특한 멋을 창출했는데, 이것을 무데하르 양식(12~17세기경)이라 하며 혼합된 그리스도교인과 아랍인들의 관념이 낳은 초기의 산물이다.

신세계를 발견한 뒤 스페인은 멕시코와 페루로부터 재화를 무제한 끌어들임으로써 16세기의 유럽 제국에서 우위를 점하는 스페인의 시대가 되었다. 건축이 장려된 그 시기는 르네상스의 사상이 유럽 전역에 보급되는 것과 때를 같이했다. 이탈리아 장인들의 영향은 귀금속이 풍부한 것과 합세하여 플라테레스크('은세공사 같은'이라는 뜻) 양식의 발전을 촉진했다. 그후 호세 베니토 추리게라의 영향하에 추리게라 양식이 스페인 특유의 양식이 되어 화려한 다색화법을 쓰면서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느낌을 표현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 스텔라 성당(Santiago de Compostela Cathedral)
산티아고 데 콤포 스텔라 성당(Santiago de Compostela Cathedral)

18세기말에는 지방양식이 바로크 양식과 오래된 형태를 계속 통합하는 가운데 신고전주의 운동이 어느 정도의 발판을 획득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영향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퍼진 후 벨기에네덜란드로 침투하기 시작하여 독일 연방의 여러 나라에 이른 후 마침내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에서 사라졌다.

저지대 국가들과 북부 독일에서는 16세기의 르네상스 장식이 완전히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개작되었다. 후기 바로크 양식과 18세기의 취향은 특히 벨기에에서 프랑스의 모델들로부터 모방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16세기 후반에 독립을 달성한 후 그들의 장식을 보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발전시켰다. 독일에서도 전반적인 추세는 비슷했지만,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바로크와 로코코의 디자인에 새로운 자극과 개성이 주어졌다. 프랑스·네덜란드·영국의 혼합된 영향이 17세기 중엽에 스웨덴과 덴마크에 미쳤고, 러시아는 17세기말과 18세기에 외국의 디자이너와 양식들을 수입하여 표트르 대제와 그의 딸 옐리자베타, 그리고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서구화 운동의 영향하에 건축된 궁전들을 장식하게 했다.

영국

장미전쟁(1455~85)과 뒤이어 15세기말에 등극한 헨리 7세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봉건제도의 붕괴는 당시의 사회 구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결과 국내의 건물과 그 장식도 큰 영향을 받았다.

여건의 변화로 방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해졌으며, 큰 홀이 옥내 생활의 중심을 이루던 시절은 이제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부의 폭넓은 배분으로 수많은 시골 저택이 생겨났으며, 그후 400년 동안 영국인은 건축과 장식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이탈리아의 양식이 영국에 들어온 것은 16세기초였다. 그후 약 40년 동안 영국의 장인들은 낱낱의 이탈리아 장식 수법을 차용했고 종종 그것들을 전통적인 고딕 양식의 모티프들과 혼합했다. 16세기 후반기에는 로마와 단절된 결과 이탈리아 양식이 대부분 저지대 국가들과 독일의 뚜렷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대체되었다.

이탈리아 양식과 플랑드르 지방의 양식도 영국의 장인들에 의해 개작되고 어느 정도 중화되었으며, 그결과 영국 특유의 새로운 양식이 생겨났다(튜더 양식). 널찍한 침실과 긴 복도, 정교한 원통형의 천장, 가파르고 꺾임이 급한 중세식의 나선형 층계가 이 양식의 특징이었다. 그 직후에 고전적인 절제를 선호하는 풍조가 퍼졌다. 이무렵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고전주의 요소의 일부가 나타났지만 18세기가 될 때까지, 그리고 16세기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에게서 영향을 받은 팔라디오파(派)가 출현하기까지는 완숙하게 계발되지 않았다.

공화정 기간이 끝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바로크풍이 들어와 절제를 중시하는 고전주의와 융합하여 대조의 성공적인 균형을 이루었는데, 위대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설계로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건축가의 영향이 주택의 외면으로부터 실내장식으로 확산되고 가구 자체의 디자인에까지 미침과 동시에 우수한 목세공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많은 실내장식이 프랑스 장식가들의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 로카유(rocaille)라는 비대칭적 모티프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치장 벽토와 조각 장식의 디자인이 가벼워지면서 보다 몽상적이 되었다(치장회반죽세공). 시누아즈리(중국풍)가 되살아났고 탑, 중국 인형, 고드름과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그리고 색다른 나뭇잎과 새들이 로코코 양식의 절정을 이루었다.

야스나 고라 수도원(Jasna Góra Monastery)
야스나 고라 수도원(Jasna Góra Monastery)
미국

영국에서 초기에 아메리카로 건너간 이주민들이 처음 마련한 집들은 기본 골격이 영국 남동부의 전통적인 작은 가옥을 모방한 것이었다.

뉴잉글랜드 남부의 집들은 건축 자재가 목재에서 벽돌과 석재로 바뀌어갔고 허드슨 강변 지방에서는 플랑드르 지방과 위그노 교도 출신 정착민들의 전통적인 오두막이 전형적인 농가가 되었다. 이무렵 벽돌로 지은 네덜란드식의 좁은 연립주택은 뉴암스테르담(나중에 뉴욕) 북쪽과 남쪽에 들어선 영국계 부락과는 다른 외관을 가졌고 버지니아와 남부에서는 제임스 1세 시대의 영주 저택과 유사한 식민지풍의 저택이 건립되었다.

이때까지 북부와 남부에서는 가옥 구조에 큰 차이가 없었다. 버지니아 북쪽에서는 1750년경까지도 대저택이 드물었고 남부에서는 대농장주들이 영국 조지 왕조의 초기 양식으로 된 영주 저택을 모방하여 지었다(조지 양식). 남부의 저택보다 일반적으로 작기는 했지만 북부의 것은 벽돌과 석재로 된 조지 왕조의 형태들을 목재에 쉽게 적용한 점이 독특하다. 18세기중에 펜실베이니아의 독일계 정착민들은 영국 전통이 지배적인 식민지에 독일의 전통적인 디자인 양식을 가미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의 실내장식

프랑스에서는 신고전주의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가 나폴레옹이 권좌에 오르면서 로마의 양식들에 이집트의 모티프들이 가미되었다. 이것이 프랑스에서는 앙피르(Empire) 양식으로, 영국에서는 리전시(regency) 양식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제국 시절에는 가구들이 부피가 크고 당당해졌으며, 검고 화려해지기도 했다.

곡선은 모든 가구에서 사라졌으며, 비대칭적 곡선이 대칭 장식으로 바뀌었다. 독일에서는 물질적 번영의 증거로 비더마이어 양식의 견고하고 간소한 가구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 특징 가운데 많은 것이 장차 빅토리아풍으로 영국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동안에는 리전시 양식이 우아함을 추구하면서 널리 유행하여 많은 걸작을 낳았다.

18세기 후반에는 산업혁명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고, 많은 실내장식품의 기계 생산이 증가하고 있었다. 19세기초에는 양식에 우열의 차이가 없다고 하는 절충주의적 사고의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이것이 서로 다른 양식을 혼합해서 나쁠 것이 없다는 관념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사고가 19세기의 전기간에 걸쳐 유행했고 20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유럽 주요국가들의 실내장식은 갈수록 중후하고 정교해졌으며, 대담한 무늬가 있는 밝은 색상의 벽지들이 널리 쓰였고 방들은 가구로 빽빽해졌다.

1830년대 로코코 양식이 부활되고 여기에 중국·일본 양식과 유사한 장식이 제한적으로 가미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로코코가 퐁파두르 양식으로 부활하고 신르네상스 시대가 출현했으며, 영국에서는 디자이너이자 작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중세적인 착상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창했다(→ 미술공예운동). 그렇기 때문에 기계 제품들의 가능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1890년대에 발전된 아르 누보(Art Nouveau) 양식은 고딕 양식을 상기시키면서 최근에 수입된 일본 예술을 함축했다. 그것은 뚜렷하게 비대칭적이었고 꽃 장식을 주로 했으며 곡선을 강조했고 장식 모티프들을 어울리지 않게 병렬하는 데서 효과를 끌어내었다. 이러한 장식은 훗날의 아르 데코(Art Deco) 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가 끝날 무렵 가구를 빽빽이 채우고 지나치게 공을 들여 꾸민 실내에 대한 반동의 기미가 강해지면서 흰색이나 아주 가벼운 색깔을 입힌 무늬없는 실내벽, 자연 그대로의 목재, 단순한 문과 벽난로 등이 20세기 전반에 일어난 변화의 하나였다.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실내장식

독립 후 고전주의 운동(1785~1835)

미국에서는 1800년 무렵까지 조지 왕조풍의 식민지시대 양식이 존속했으나, 1785년에 이르러 자유 팔라디오주의(다소 묵직한 고전적 양식)로 알려진 풍과 이 양식으로 제작된 당시의 역작(力作)에 대해 유럽에서 반동이 일고 이것이 미국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의 장식면을 지배한 것은 고전적인 모티프들에 대한 보다 자유롭고 더 개인적인 해석이었다. 1800~10년경에 지은 집들은 합중국 초기 양식의 비례에 따라 아주 정밀하게 적용시켜 지은 것들로 그것들은 원과 타원과 8각형이 간간이 도입되어 설계에 변화를 주었고, 독립 구조의 계단이 현관 홀의 특징이 되었다. 1820년 이후로는 합중국 초기 양식이 쇠퇴하고, 제퍼슨식(式)의 고전주의 양식에 그리스적인 세부와 이집트적인 세부까지 도입시켜 수정되었으며 소위 그리스 복고풍을 이루었다. 1820년대에 확립된 고전적인 무늬가 건축과 장식 디자인에서 기본 양식이 되었는데, 그것은 18세기 신고전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 운동의 개시를 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낭만주의 운동과 양식들의 전쟁(1835~1925)

1835년 무렵에는 로마 고전 양식의 특징인 질서정연한 상징주의의 제약들이 따분해졌다. 초기 빅토리아풍의 낭만주의 속에서 질서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지고, 기계로 쉽고 싸게 생산되는 장식 모티프와 장식물들이 범람하게 되었다. 1850년대에는 고전적 모티프와 중세적 모티프의 혼합을 밀어내고 18세기의 형상들이 부활하여 일시적으로 '제2의 로코코'를 구가했다.

그 뒤를 이어 17세기와 후기 르네상스에 입각한 패션이 퍼지고, '공예의' 중세 취향과 식민지시대의 것을 포함한 보다 고지식한 양식이 잇따라 되살아났다. 이런 것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19세기말의 심미주의 운동이 받아들인 이색적인 동양의 영향을 흡수했다.

20세기의 실내장식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저속하게 화려하고 지나치게 장식적인 디자인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세기에 필요한 취향과 그에 맞는 간소화된 현대 디자인이 애호되었다.

유럽에서는 '형태는 기능에 수반한다'는 명제를 앞세운 일단의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1919년 독일의 바이마르에 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Bauhaus)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예술과 공예의 조화를 가르치고 기계가 일으키는 비인간화와 싸우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전통을 고수하려는 욕망과 기계산업 사회를 수용해야 할 필요 사이의 고투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노골화되었다.

여기에 바우하우스파의 목표는 산업 기술로서 전쟁으로 인해 정신적·물질적으로 연약해진 사회의 필요를 맞춰서 수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기능주의는 과거의 수식적인 모티프들과의 완전한 결별과 형태·비례·선·재질의 활성화를 요구했다. 또한 인간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모든 종류의 물리적 자극에 심리적 반응을 연관시키는 데 목표를 두기도 했다.

이런 인습에 대한 기능주의의 대담한 도전이 실내장식에 주목할 만한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바우하우스로부터 발생한 이른바 국제주의 양식(International Style)은 많은 사람이 보기에 인간미가 결여되어 있었다. 기능주의적 사고는 기계로 생산할 수 있는 플라스틱, 합성섬유, 아크릴 페인트와 같은 재료들을 점차 선호했지만, 여전히 이 재료들이 다른 재료의 모조품으로 쓰이고 있었다.

1920년대말과 1930년대초 서양의 진보적인 디자인에 주된 영향을 미친 것은 수정된 아르 누보 양식으로 제작된 온건성 급진주의의 프랑스 고급 공예품과 스웨덴 전통 공예 산업과의 협력에 의한 조합과 발전이었다.

이 영향들이 아르 데코 양식을 발전시켰다.

1935년 무렵에는 기능주의 운동이 젊은 건축가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상당한 추종자를 얻고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실상 발전이 중단되었고, 그 이후로는 관심이 다시 스칸디나비아 제국으로 쏠리게 되었다.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스웨덴이었는데, 이 나라에서는 기능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의식이 자연적인 나뭇결과 명확한 채색 및 짜임새의 단순한 가구 설치 방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무늬는 억제되었으며, 무늬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윤곽을 복잡하지 않게 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그 이후까지 기능주의자들이 세력을 얻고 있었다. 기능주의 운동의 결과로 생긴 가장 뚜렷한 변화는 기계화, 실내 공간의 재분배, 옥내와 옥외를 가르는 형식적인 장벽의 철거였다. 이러한 발전에는 장식 및 가구와 부속품들의 디자인과 용도에 있어서의 급진적인 변화가 수반되었다.

거주 장소에서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고 상호관계를 중시한 결과, 전통적인 실내 칸막이들을 없애버림으로써 기능이 수월해진 새로운 실내는 새 시대에 잘 부합되었다. 장식은 기능 중심적으로 되었고, 하나의 거주 장소가 하나 이상의 목적에 기여하게 됨에 따라 설계가 빈번히 불규칙해져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하나의 단위로 취급하기가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색상·재질·재료의 변경이 장신구를 대신하여 장식 디자인의 주된 수단이 되었다. 현대 기능주의 운동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목적을 달성했다.

그것은 실내장식예술을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볼 새로운 길을 열었으며, 또한 1950년대에 스칸디나비아와 덴마크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영감에 접할 길도 열었는데, 후자는 바우하우스의 작품에 결여된 듯한 인간적인 면들을 간직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실내장식에서 스칸디나비아의 디자인과 어떤 유사성을 지닌 순수한 일본 예술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1960년대에는 무늬가 되살아났는데 의자·쿠션 따위의 덮개에 추상적인 무늬가 실내장식용으로 등장했고, 세탁이 수월해진 재질과 부드럽고 연한 색조의 무늬 제품이 생산되었다.

동양의 실내장식

지난 5세기 동안 서양으로부터 수출된 '작은 미술품'(objets d'art)과 장식을 통해 서양의 많은 모티프가 익히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모티프에는 서양 양식의 복잡한 양식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양 예술의 모티프는 많고도 다양한데 예를 들어 도처에 편재하며 인간에게 유익하다는 용, 중국산의 꼬리가 긴 봉황(소위 불사조), 그리고 실재하거나 전설적인 여러 종류의 동물 등이 모티프로 쓰이고 있다.

꽃과 잎은 정교한 꽃 상징의 일부이며, 뜻을 알면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복잡하고 풍부한 상징의 일부를 이루는 추상적인 모티프도 많다. 동양의 인테리어 디자인에서는 그림이나 붓글씨가 있는 족자가 특징적인데 이것은 장식 구성에 신선함을 부여하며 그 진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도 수시로 바뀐다. 마찬가지로 복숭아꽃이 피어 있는 가지 하나가 그려진 꽃병 하나를 실내에 배치하는 데도 세심한 신경을 쓴다.

캐비닛[欌]과 농은 아주 중요시되며, 보통 녹나무로 만든다. 중국 북부지방과 한국의 가옥에서 중요한 특색의 하나인 온돌은 난방용 바닥으로, 추운 겨울에 가족이 그 위에서 자거나 앉는다.

중국의 실내장식

동양에서 가장 오랜 문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동양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쳐왔다.

장식의 형태와 모티프들은 일찍이 BC 18~12세기의 상왕조(商王朝)나 그보다 더 옛날인 전설상의 하왕조(夏王朝)에서 시작되어 중국의 전역사 기간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다. 재료들은 서양의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제도술(製陶術)에 뛰어났으며 그들의 기술이 한국·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 제국에 보급되었다. 중국인들은 불에 잘 타고 세월이 흐르면 변질되는 목재를 건축의 주재료로 썼기 때문에 현존하는 오래된 건물은 드물다.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은 782년에 건립된 한 사원의 본당인데 방벽에는 벽돌과 석재가 쓰이고, 과 교량에는 아치(홍예), 분묘에는 아치형 천장이 쓰였다. 사원과 분묘에 코벨돔(연속적으로 위층이 아래층보다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벽돌을 층층이 쌓아 궁륭처럼 보이도록 한 건축)이 쓰인 아주 희귀한 예들이 있었다.

중국의 목조 건물에서 기본 요소는 건물을 세우는 고대(高臺), 기둥과 린텔(上引木方 : 수직의 기둥들 위에 수평의 들보를 얹는 방식) 구조, 지붕의 브래킷(받침대), 그리고 기와지붕 등이다. 벽과 벽 사이는 비어 있어 벽돌이나 대를 엮어 회를 입힌 것과 같은 가벼운 재료로 채울 수 있고 중요한 건물의 지주와 브래킷은 조각되고 채색되었으며 그 디자인들 가운데는 중국 도자기에 쓰인 것들과 비슷한 것이 많았다.

은 여러 가지 무늬의 나뭇조각으로 격자를 붙이고 그 위에 투명한 백지를 발랐다. 격자무늬가 있는 것 외에 창 자체의 윤곽도 아주 다양했으며, 출입구 역시 환상적인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모든 종류의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붕인데, 당나라 때는 위로 치켜올라간 처마와 유약을 짙게 바른 우중충한 색깔의 지붕 덮개가 발달했다. 지붕은 주로 석제나 청동제의 기부(基部) 위에 세운 목제 기둥으로 지탱된다.

통상 가정집은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별채(파빌리온)가 있고 이것은 담으로 둘러싸였다. 안뜰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사람은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변함없는 이상 때문이다. 연꽃과 한 그루의 나무와 큰 바위들이 있는 작은 못은 전체적인 자연 경관을 상징했으며, 여기에 가장 세심한 관심을 쏟아부었다. 각 건물을 정4각형이나 직4각형의 한 단위로 여기는 '별채 관념'은 설계의 규모와 유연성을 제약한다. 설계의 변화는 별채의 수를 늘리는 것으로만 기할 수 있으며, 별채들은 으레 안마당 주위로만 배열되고 덮개가 없는 복도로 서로 연결된다.

사저(私邸)에서는 본채의 대청이 출입구와 마주 보도록 앞뜰을 배치하는 것 외에는 대청과 뜰의 배열에 일정한 형식이 없다. 그러나 북경의 웅장한 자금성(紫禁城)과 같은 궁전에서는 주요대청들과 그에 딸린 뜰이 서로 뒤에 가도록, 즉 뒤뜰이 되도록 배치하면서 점차 그 규모를 크게 한 다음 다시 차차 규모를 줄여나가는 구도로 건축을 했다. 고대의 회관과 사원들은 대저택의 일반적인 배치 방식을 따랐다.

명나라(1368~1644)의 한 유한계급에 속하는 사람의 집을 묘사한 것을 보면 노란 갈대를 엮은 것으로 칸막이를 한 천장, 종이를 바른 벽과 기둥, 광택이 나는 검은 판석(板石), 비단 휘장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풍부하게 채색된 융단, 의자 씌우개, 방석들이 검은색의 가구와 대조를 이루었는데 이 가구는 비대칭의 균형이라는 엄격한 원칙에 따라 배치되었다.

이런 중국의 가구는 이상할 정도로 체계적인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

가구의 기원이나 제작소가 대부분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가구제작자에 관해서도 전연 알려진 것이 없어서 가구의 제작 연대를 추정하기가 극히 어렵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화들에서 발견되는 낮은 탁자, 덮개 씌운 침상 등에서 디자인이 전시대에 걸쳐 두드러지게 보수적인 것을 볼 수 있다.

중국의 가구는 자개로 상감하고 정교하게 조각한 목제 칠기 가구와 무지(無地)의 경재(硬材) 가구로 구분된다.

전자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단지 용과 모란 같은 장식 모티프들의 디자인과 배경으로만 연대 추정을 하고 있다. 가구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8세기부터 일본의 황실 창고에 보존되어 있는 자개상감의 검은 칠기 가구이며 걸상과 탁자 같은 붉은 칠기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명나라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칠기들의 만듦새는 후대인 청나라(1644~1911/12) 것보다 윤곽이 부드러우며 디자인이 자유롭고 활기찬 것이 특징이다.

이 칠기들이 유럽의 가구 제작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무지경재 가구는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이 중국과 서양에서도 그만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고전적인 단순함과 절도있는 장식 및 가식이 없는 점 때문이었다. 최고의 솜씨로 제작된 이 가구는 선의 순수함, 조형력(造形力), 그리고 흠없는 광택이 조화로운 효과를 자아낸다. 가구를 덜 필요로 하는 중국식 가옥의 특징 때문에 가구의 종류가 보다 적으며 주로 옷장, 체스트(櫃), 제단용·카우치(긴 의자) 등과 여러 종류·모양의 높고 낮은 탁자, 스툴(팔걸이와 등받이가 없는 의자), 때로 커튼으로 가려져 닫집 모양이 되기도 하는 침상, 침상용의 병풍과 스툴, 의자 등이다.

중국의 가구 제작 기법은 BC 1000년경에 이미 정립되었음이 분명하지만, 중국 가구에서의 큰 발전은 서력기원 초기에 인도로부터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루어졌다.

그 이전에는 중국인들이 방바닥이나 스툴 위에 책상다리를 하거나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나 불교가 등받이가 있는 높고 딱딱한 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는 방법을 들여왔는데, 그런 의자에 팔걸이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다. 세밀히 제작된 대표적인 가구 체스트와 아모아르(이동식 찬장)에는 견고한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크게 돋워주는 정밀한 세공장식 쇠붙이가 딸린다.

무지가구의 제작에 사용된 경재는 그 종류가 많은데 대표적인 것은 자줏빛을 띠는 최고급의 백단향과, 주로 인도차이나에서 수입하며 '구'(舊)·'신'(新)·'황'(黃)으로 불리는 많은 품종의 자단(紫檀), 주목(朱木) 등이다.

자단은 품종이 많은 만큼 자주 쓰이고 투명한 외양과 매끄럽고 부드러운 마무리칠로 인해 가장 인기가 높기도 하다(칠보). 무엇보다도 중국의 가구에서 서양인의 시선을 끄는 것은 흠잡을 데 없는 만듦새와 우수한 광내기 솜씨이다. 18세기 서양의 가구 제작자들의 이상이 된 것은 나무의 정령을 존중하는 중국인들의 태도와 선·곡면·입체의 비례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었다.

낮은 스툴과 탁자가 일찍부터 사용되었고 의자, 경대, 제단용 탁자 및 덮개를 한 침상은 서한(전한) 시대(BC 206~AD 25)에 이르러서는 일반화되었다.

자단은 항상 널리 쓰였으며 궁전용으로는 금은·비취·상아·자개 등을 박아넣었다. 중국에서는 동양의 다른 지역에서보다 의자·탁자·카우치·침상·찬장·서랍장 등을 실내에 많이 비치하는 편이었다. 서양에서와 마찬가지로 팔걸이가 있는 의자는 윗사람이 앉는 자리로 인식되었다. 사용되는 목재는 각 지방에서 산출되는 목재들이다. 조각을 한 칠기 가구는 황제와 고관들의 전용물이었다.

일본의 실내장식

일본의 실내장식은 특히 8~12세기에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간결하며 우아하게 발전했다.

중세 이후 변한 것이 없던 일본의 실내장식이 현대에 들어 달라진 것은 목조 마루를 덮은 다타미[疊]와 외겹 병풍 또는 커튼이 달린 미닫이문이다.

다타미
다타미

일본 가옥은 두 면에 영구적인 벽이 없고 나무로 짠 테에 부드러운 산광(散光)을 투과시키는 종이를 바른 칸막이가 있는데 이것은 떼어서 옮길 수 있어서 실내의 재정리를 수월하게 한다. 4계절의 변화에 대한 관심은 하루의 시각의 변동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일본식 인테리어 디자인의 특징인 자연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의 일부를 이룬다. 떼어낼 수 있는 문과 병풍으로 막은 넓은 공간은 자연과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정원은 흔히 풍경의 축소 재생판이다.

벽과 미닫이문, 그리고 접는 병풍은 흔히 풍경이나 꽃, 새 또는 그와 비슷한 제재를 그린 그림으로 장식되어 방에 있는 사람에게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해준다.

일본 가옥의 실내는 아주 용의주도하게 장식된다. 벽 장식은 보기가 어렵다.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방바닥에 볏짚을 엮어 만든 얇은 돗자리인 다다미를 깔고 의자 대신 그 위에 앉기 때문에 탁자는 낮고 팔걸이로도 이용된다. 층층으로 된 선반이 흔하며 보통 선반에 옻칠을 하고 장식적인 그림을 그려넣는다.

선반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며 이 가구류에서 일본 미술의 비대칭적인 특성을 파악할 수도 있다. 선반의 수와 위치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선반의 높이도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서양의 관례와 대조적으로 일본인들은 방안을 여러 개의 미술품으로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방안에 초점이 되는 특별한 자리를 정하고 그 자리에 하나의 예술품을 전시하며, 이 예술품은 수시로 바뀐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고대의 예술품을 존중하며, 특히 일본의 나라[奈良]에 있는 9세기에 건축된 쇼소인[正倉院]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쇼소인이 건축될 무렵에는 문이 중국식의 회전문이었으며, 미닫이식의 쇼지[障子] 대신 밖으로 미는 목재 격자창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도 신사(神社)와 사원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큰 비중을 가진 인물을 위해서는 발로 가려진 상단이 마련되었고, 목조 바닥에는 다른 사람들이 앉는 1인용 돗자리들이 있었다.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그때도 방 밖에는 방들을 연결하는 복도가 있었다. 15세기말에 실내는 지금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옛 궁중 양식이 선종 불교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아 무사계급이 선호하는 보다 검소한 가옥 양식과 서서히 융합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16세기말에는 다회(茶會) 스승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다실과 다실의 정원 조성 및 바른 예법을 포함하는 '다도'(茶道)에 정통해 있었으며 가옥 건축과 실내장식 및 정원 설계의 대부분에 관한 미학적 조언을 담당하는 세습 가문과 유파들을 수립했다. 이들은 검약, 비대칭, 움직임의 절약으로 미를 달성하는 데 목표를 두었으며, 일본식 실내의 단순한 우아함은 그들에게 힘입은 바 크다.

전통적인 양식으로 건축된 현대의 일본 가옥에서 장식은 거의 구조적이며, 모든 계급의 거처가 똑같이 정갈하고 천박함이 전혀 없다.

거처들의 조화로움과 정교함은 완전히 표준화된 설정 속에서 세부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데 연유한다. 방의 크기는 보통 다다미의 개수로 계산한다. 목공품에는 일체 그림을 그리지 않으며 칠을 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러나 방과 방을 구획하는 '후스마'[懊 : 맹장지]에는 보다 변화를 주어 많은 무늬가 있는 종이를 바르거나 그림 또는 붓글씨로 장식한다.

그러므로 방의 한 면은 전체가 흑백 또는 채색 풍경을 드러낼 수 있으며, 그 배경은 흔히 금빛이나 은빛을 띤다. '후스마'를 교체하면 방의 외관이 완전히 달라지며, 그것을 떼어내면 2개 또는 그 이상의 방이 하나의 방이 된다. 침구를 널찍한 벽장 속에 쌓아 두기 때문에 모든 방을 침실로 이용할 수 있다. 객실은 다른 방들보다 장식의 여지가 많은 편인데, 이는 객실의 한쪽 끝에 '도코노마'[床の間]가 있기 때문이다.

'도코노마'란 값지거나 희귀한 나무기둥으로 받치는 덮개가 있는 반침으로서, 그 안에 유일한 벽장식인 1폭이나 1벌의 그림을 걸고 꽃꽂이로 장식한다. 그림과 꽃꽂이도 계절이나 기분에 따라 자주 바뀐다. '도코노마' 옆에는 흔히 붙박이 책상이 있다. 이 책상 곁에는 보통 식기대 비슷하게 찬장과 선반을 비대칭으로 배열한 장식선반 '지가이다나'[違い棚]가 있다.

'후스마'의 윗부분과 천장 사이에는 흔히 나무나 대로 만들어 무늬나 풍경을 조각한 교창(交窓)인 '란마'[欄間]가 있다. 그 자리에 때로는 시 1수나 그림이 새겨진 명판(銘板)을 비치하기도 한다. 다른 벽들은 칙칙한 색조로 회칠을 할 뿐이다. 천장은 보통 얇은 판자들을 약간 겹쳐서 만들고 약 1평방인치 두께의 가로장들로 받치며, 그 전체를 마룻대에 매달리게 한다. 신사와 사원에서 보는 것과 같은 큰 방에서는 코브(cove)와 정간(井間)으로 장식하고 정간에는 옻칠한 목세공, 그림, 무늬가 들어있는 '중국식 천장'을 종종 볼 수 있다.

대, 갈대, 나무토막을 엮어 만든 이상한 동물상들도 드물지 않다. 대는 일본인의 가옥에서 기둥·창살·천장 재료로서 많이 쓰이며, 쪼개어 납작하게 펴서 널빤지로 쓸 수도 있다. 창은 여러 가지 모양의 것이 있으며 밋밋한 벽에서 관심의 초점이 된다.

일본의 전통 가옥에는 가구가 많이 비치되어 있지 않다. 보통 검은 옻칠을 한 장식장 하나, 낮은 필사용 탁자 하나, 또는 금빛이나 은빛 바탕을 풍경화로 장식하여 금란(金襴)으로 표장한 2폭이나 6폭짜리(후자의 경우는 보통 쌍으로 되어 있음) 병풍 하나가 놓여 있다.

때로는 현관에 외겹의 병풍 하나를 세워 두기도 한다. 여유 있는 집에서는 두루마리 그림, 숯불용의 금속제 화로, 도기제품, 여분의 '후스마', 서적, 골동품 등을 따로 떨어져 있는 내화성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변화를 주기 위해 이따금씩 꺼내어 비치한다. 다다미는 종종 천을 씌우기는 했지만 자연적인 무늬만을 장식으로 이용했다. 천으로 된 방석도 쓰였으며, 접는 식이나 고정식의 수수한 나무의자 또는 옻칠한 작은 탁자도 이용되었다. 경대와 필사용 탁자는 간단한 탁자를 특별히 변형시킨 것이었다.

접는 식의 병풍은 이동시킴으로써 방의 전경을 바꿀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가구들의 필수불가결한 부속물이었다. 하나의 이동할 수 없는 설비는 독서용의 고정식 책상을 내단 일종의 퇴창인 '쓰케쇼인'[附け書院]이었다.

인도의 실내장식

캘리코(calico)·친츠(chintz)·팰럼포(palampore)와 같은 인도 기원의 단어들은 서양의 인테리어 디자인 역사에서 인도산의 직물들이 갖는 중요성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인도인들 스스로는 이런 역할을 분명히 자각한 적이 전연 없다. 그만큼 그들 고유의 실내는 카펫이나 기도용 융단을 제외하면 석조 바닥과 무늬없는 흰 벽의 단조로움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지극히 단순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주거를 만드는 데 이용된 자재가 내구성이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다 웅장한 건물에서는, 그리고 보통 힌두교와 불교의 사원에서는 벽에 그림들을 그렸는데, 이 관례는 문헌의 기록만으로도 멀리 마우리아 왕조(BC 321~185)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굽타 왕조(320~600)의 동굴 사원들에 남아 있는 그림은 으레 활동적인 가공의 생물이나 인물의 무리를 묘사하며, 물결 모양의 선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후기의 한 표본은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 코친의 마탄체리 궁에 있는 17세기초의 미완성 벽화들에서 볼 수 있다. 준보석(準寶石)들의 상감, 조각되고 까치발을 댄 기둥과 주두(柱頭)들, 그리고 투각 세공의 대리석 패널들도 지방 통치자들의 저택 장식으로 쓰였다.

가구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인도의 위치는 독자적인 양식의 창조자로서의 위치라기보다 수입된 서양 양식의 개조자 또는 변형자로서의 위치이다. 유럽에서 알려진 의미로서 실내 가구는 인도에서는 16세기까지 전통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테이블이나 의자 같은 친숙한 물건들도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의 가구가 보급되기까지는 쓰이는 일이 드물었다. 18세기에 인도에서 영국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영국의 영향력하에 인도-유럽의 모든 가구 양식이 갈수록 증가했다.

유럽인 구매자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갈수록 유럽의 가구 양식들을 좋아하게 된 인도의 통치자들을 위해서도 치펜데일과 셰라턴의 양식으로 된 가구 일습이 상아로 제작되었다.

한국의 실내장식

실내장식은 건축물의 기능에 따라 그 구성이 다르지만 한국의 전통적인 목조가구식 건축은 그 바닥·천장·벽이 거의 비슷하다.

따라서 주택의 실내공간이 모든 건축물의 기본이라 할 수 있으므로 주택의 실내장식을 살펴보려고 한다. 전통주택은 여성공간인 안채, 남성 공간인 사랑채,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노비의 공간인 행랑채, 필요에 따라 건립된 별당 등 여러 채의 건물들이 독립적으로 건립되거나 안채와 사랑채가 연속으로 건립되기도 한다.

안채는 안주인과 며느리·딸·노모 등 여성의 생활공간으로 주택의 안쪽에 위치하며, 안방·대청·윗방·건넌방·누마루·부엌 등으로 구성된다.

① 안방 : 안주인의 생활공간으로서 낮에는 거처실이 되고 밤에는 침실로 사용한다. 이 방에는 직계존속의 남성 이외에는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되는 가장 은밀한 곳이다. 바닥은 구들 고래를 덮은 구들장 위를 진흙으로 두텁게 바르고, 그 위에 초배지를 여러 겹으로 바른 다음 장판지를 발라 마감한다.

장판지는 콩기름과 들기름을 먹여 내구성을 높이고, 깨끗한 면을 이루도록 한다. 4면 벽에는 초배지를 몇 겹 바른 뒤에 벽지로 마감하는데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의하면 전주산 간장지, 남원산 선지, 영변산 백로지, 평강산 설화지 등이 유명했다고 하며, 천장은 휴지로 초배를 하고 중배지로 두꺼운 종이를 바르고 정배지로 청색·오색·녹색 등 색깔 있는 종이를 골라 바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마감은 방으로서의 바닥·벽·천장의 기본적인 마감이 된다.

아랫목은 안주인의 자리로서 보료를 깔고 장침과 사방침을 놓고, 안석을 다락문 쪽 벽에 기대어 놓아 안주인의 등과 허리를 받쳐주도록 했다. 보료 밑에 가끔 둘레가 낮은 살평상을 놓고 그 위에 보료를 깔기도 하는데, 이는 온돌의 뜨거운 열기로 인하여 보료가 눋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보료 앞쪽에는 방석들을 놓아 손님들이 방문했을 경우에 앉도록 했으며, 겨울에는 화로를 보료 앞에 놓았다. 안마당 쪽에 있는 쌍창이나 옆마당 쪽에 있는 창 아래 또는 벽 아래쪽에는 쌍문갑을 놓는다. 그러나 문갑은 본래 남성용 가구로 안방에는 놓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안방에 놓는 쌍갑문은 나전칠기·화각으로 된 화려한 것을 놓는다. 문갑 위에는 등촉대를 놓아 밤에 조명으로 사용했는데 초는 귀하여 상류계층에서나 사용하고 대개는 기름등잔대를 사용했으며, 좌등을 창가에 놓기도 했다.

벽 쪽으로는 반닫이 또는 가께수리를 놓고 이 위에 거울이 있는 좌경을 얹어놓았는데, 촛대나 등잔대가 문갑 위에 없을 때에는 좌경을 얹어놓았다.

벽에는 빗접고비를 걸어 빗 등을 보관하고 화장할 때 사용했다. 다락벽 쪽으로는 병풍을 쳤는데 곽분양의 〈행락도〉를 그린 병풍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화조도와 같이 장식성이 높은 화려한 병풍들이 사용되었다. 밤에는 머리맡 쪽으로 2폭의 머릿병풍을 쳐서 방안을 아늑하게 했다. 방의 윗목 좌우에는 사방탁자를 놓고 탁자 위에는 서책이나 모과와 같이 향기가 있고 빛깔이 좋은 과실을 자기에 담아 얹어두었다.

창에는 외풍을 막기 위하여 무렴자(무면자 또는 몰면자)를 치는데 창 밖에 있는 쌍창을 닫고 그 위에 치는 것이 원칙이다. 벽에도 외풍을 막기 위해 방장(房帳)을 치는데 이것은 장식적인 경향이 크다. 또 천장에는 위에서 내려오는 한기(寒氣)를 막기 위하여 앙장(仰帳)을 치기도 한다. 한편 여름철에는 창, 대청 쪽, 분합문 쪽에 발을 쳐 통풍이 잘 되면서도 바깥으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했다.

② 윗방 : 바닥·벽·천장은 안방과 같이 마감한다. 안방의 위쪽에 붙여 지은 방으로 안방과는 사잇장지로 연결된다. 이 방의 윗벽을 등지고 장과 농을 놓으며 의류들을 정리하여 수납한다. 장은 2층장과 3층장이 일반적이고 때로는 4층장도 사용한다.

농은 2개의 궤를 포개어놓은 것으로 2층이 된다. 장과 농 위에는 함과 궤를 얹어두는데, 함은 바느질함(반짇함)과 색함 등을 말한다. 함은 대나무로 만든 채상(彩箱)과 유상(柳箱) 등이 있고, 궤는 옷을 넣는 의궤가 있다. 안방 사이의 사잇장지는 평상시에 열어두어 아랫목에서 웃방의 벽에 있는 가구들을 부담없이 보며 즐길 수 있도록 했다.

③ 대청 : 안방과 건넌방의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안방과 건넌방을 출입할 때 통과하는 전실로서의 기능을 갖는데 여름철에는 안채 안주인의 거처가 되며, 가족이 모이는 장소로도 이용된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마감하고, 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며,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는 연등천장으로서 서까래 사이는 회반죽으로 마감한다. 특히 대들보·종보·동자기둥·대공 등의 짜임새가 노출되어 가구미가 돋보인다. 대청의 뒷마당 쪽 양벽 모퉁이에는 사방탁자와 뒤주를 놓고, 뒤주 위에 크고 작은 항아리들을 놓아 마른반찬이나 음식물을 보관했다.

대가(大家)에서는 반빗간이나 찬방에 뒤주를 두기도 한다. 여름철에는 바닥에 화문석과 같이 무늬와 색깔이 있는 돗자리를 깔고, 안마당 쪽으로 발을 늘어뜨려 밖에서 안이 들여다 보이면서도 퉁풍이 원활하도록 했다. 때로는 살평상을 들여놓고 밤에 잠자리로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대들보 위나 안마당 쪽 기둥 사이 높이에 선반을 매어 평상시에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 즉 제사 때 사용하는 병풍 등을 얹어두었다.

④ 건넌방 :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마주하는 곳에 자리하는 방으로 경상도지방에서는 상방이라 부른다.

이 방은 며느리 방인데, 안방물림을 하게 되면 장성한 며느리가 안방으로 가 안주인이 되고 노모는 건넌방으로 옮겨간다. 바닥은 장판지로, 벽은 벽지로, 천장은 천장지로 마감한다. 윗목 쪽 긴 벽을 등지고 장롱들을 놓고 그 위에 색실함이나 반짇고리 등을 얹어둔다.

⑤ 부엌 : 음식을 장만하는 곳으로 안방과 연이어져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가에서는 반빗간이 따로 건립되어 부엌에서의 기능을 전담한다. 바닥은 흙으로 마감하고 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며,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는 연등천장일 때 서까래 사이를 회로 마감하나 다락이 있을 때에는 다락의 마룻바닥 뒷면이 천장이 된다. 안방 쪽 벽 아래에 부뚜막이 만들어지고 크고 작은 솥들이 3~4개 걸린다. 부뚜막 반대쪽 벽면을 등지고 식탁과 찬장 등이 있는데 식탁에는 그릇을, 찬장에는 음식물을 보관했다.

벽에 못을 박고 소반들을 걸어둔다. 그러나 찬방 또는 찬광이 있을 때에는 이 공간에 이러한 것들을 보관한다. 또한 반빗간이 있는 대가에서는 반빗간에 이들 가구들을 비치한다. 지방의 대농가 부엌에는 밥청이 따로 있어서 아랫사람들이 이 밥청에서 식사를 했다.

사랑채는 남자들의 생활공간으로 주택의 바깥쪽에 위치하며, 사랑방·침방·대청·누마루 등으로 구성된다.

사랑방 : 주인의 일상거처실로 손님을 맞이하거나 서고에서 가져온 서책을 본다. 바닥은 안방과 같이 장판지로 마감하고, 벽과 천장도 안방처럼 마감하지만 색지를 사용할 경우에는 청색 계통의 색을 주로 사용한다. 가끔 천장을 우물천장으로 하여 천장지를 바르는 경우도 있다. 아랫목은 주인의 자리로 보료를 깔고, 장침과 사방침을 보료의 좌우에 놓고 안석을 다락벽에 기대놓는다.

보료 뒤쪽으로 병풍을 둘러치기도 한다. 보료 앞에는 연상·담배함·재떨이를 놓고 때로는 경상이나 서안을 놓아 서책을 볼 때 사용하기도 했다.

창 아래에는 쌍문갑을 놓으며, 문갑 위에는 등촉대나 필가 등을 놓아둔다. 문갑의 반대쪽 벽 아래에는 가께수리를 놓고 중요한 물품을 보관했다. 좌등은 방구석에 놓았다. 윗목 좌우에는 사방탁자를 놓고 모과·석류와 같이 향기나 색깔이 아름다운 과실들을 얹어두거나 서고에서 가져온 서책들을 쌓아둔다.

벽에는 서간을 보관하는 서간고비를 걸어두었다. 때로 다기장을 놓아 차와 차그릇, 과일 등을 보관한다. 겨울에는 벽에 방장을 치고 창에 몰면자(무렴자)를 치는데 이는 창 밖 덧창 위에 치는 것이 원칙이다. 천장에는 앙장을 쳐 위에서 내려오는 한기를 막았다.

② 침방 : 주인의 일상 침실로 대개 1칸 정도의 작은 온돌방이며 바닥·벽·천장은 사랑방과 같이 마감하고, 실내가구는 문갑을 창 아래에 놓고 문갑 위에 등촉대·망건꽂이 등을 놓아둔다.

여유가 있을 때에는 의걸이장을 놓아 도포 등을 보관하고 장 위에는 관모함·문서함 등을 얹어둔다. 여름에는 살평상을 들여놓고 죽부인을 놓아두며, 겨울에는 사랑에서와 같이 방장·몰면자·앙장을 치고 병풍을 둘러 찬 공기가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③ 대청 : 사랑방을 드나들 때 통과하는 전실로서의 기능과 여름철 주인의 거처실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뒷마당 쪽 좌우 모서리에는 사방탁자를 놓고, 여름철에는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발을 쳐서 시선을 차단하면서 통풍이 잘 이루어지도록 했다. 또한 살평상을 들여놓아 취침을 하기도 한다.

④ 누마루 : 대청 옆에 붙어 있는 것으로 바닥이 대청보다 한결 높은 우물마루로서 주로 여름철 거처공간이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손님을 맞이하여 담소하는 곳이며, 목침을 마련하여 낮잠을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⑤ 책방·서고 : 사랑채에 있는 방으로 책을 보관하는 곳이다. 대가에서는 별채로 지어 책만을 보관하거나 책도 보관하고 또 온돌방을 들여 서책을 보며 은밀히 손님을 맞기도 한다. 이곳에는 책궤를 쌓아두거나 서장을 두는데, 오동나무서장이 일품이다.

⑥ 산정사랑 : 뒷동산에 건립한 정자로서 주인의 가장 은밀한 공간이며,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서(書)·화(畵)·금(琴)·기(棋)의 사우(四友)라 하여 각종 서화·가야금·바둑 등을 비치했다.

사당은 조상의 신위를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북벽 앞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오면서 고조고비·증조고비·조고비·고비 등 4개의 감을 설치한 다음 감 밖으로 휘장을 늘이고 각 위마다 탁자를 놓았으며, 최존위 앞에 향탁을 놓되 향로는 서쪽에, 향합은 동쪽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