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교회

다른 표기 언어 church , 敎會

요약 교회건축 본연의 기능은 종교적 실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복음을 상징하면서도 성스럽고 토착적인 교회 건축양식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최초의 교회들은 이교도인 로마인들이 재판정이나 공회당으로 썼던 바실리카를 본떠 만들었다. 11세기말로 접어들면서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예배의식이 복잡해지자 이에 맞추어 바실리카 평면도 더욱 복잡해졌다. 그리고 14세기말부터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유럽 교회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인 강당식 교회가 등장했다. 한국의 교회건축은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뒤부터 시작되었고, 특정 건축양식에 구애받지 않아왔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전쟁 후부터 1960년대까지의 한국 교회는 주로 실용성 위주로 건축되며 더욱 다양해졌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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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한국의 교회
교회
교회

개요

최초의 교회들은 이교도인 로마인들이 재판정이나 공회당으로 썼던 바실리카를 본떠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바실리카는 신도들이 모이는 홀로 평평한 나무 지붕을 올린 네이브(nave 身廊)가 있어서 그 양쪽에 아일(aisle 側廊)을 1~2개 만든 것으로, 네이브와 아일 사이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기둥으로 구분한다.

서쪽 끝에는 회개하는 사람과 세례를 받지 않은 신자를 받아들이는 나르텍스(narthex) 즉 현관이 있으며, (→ 나르텍스)동쪽 끝에는 성직자를 위해 따로 마련한 반원형 또는 4각형의 앱스(aspe 後陣)가 있다(→ 정향).

그뒤 시대가 흐르면서 바실리카 양식에 트랜셉트(transept)가 덧붙여졌다.

트랜셉트는 남북으로 축을 이룬 네이브에 직각을 이루며 튀어나와 라틴 십자형 평면을 이루었다. 종종 트랜셉트 양끝에는 특별한 성인들에게 봉헌된 보조제단을 세웠다. 캔터베리 대성당, 링컨 대성당, 솔즈베리 대성당 등 중세 영국의 몇몇 대성당에는 동쪽에 주된 트랜셉트 말고 부차적인 소규모의 트랜셉트가 하나 더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가 번성했던 비잔틴과 소아시아, 동유럽의 교회는 주로 그리스 십자형 평면을 따라 지었다.

나무 지붕을 얹은 긴 네이브 한쪽 끝에서 네이브보다 짧은 트랜셉트가 교차하는 라틴 십자형 평면과는 대조적으로 동유럽 교회들은 4개 날개부의 길이가 같으며 교차점을 이루는 한가운데 네모난 부분 위로는 돔을 올렸다. 대표적인 예로는 콘스탄티노플(오늘날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6세기)가 있다.

11세기말로 접어들면서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예배의식이 복잡해지자 이에 맞추어 바실리카 평면도 더욱 복잡해졌다.

성가대석은 보통 트랜셉트 동쪽에 자리잡게 정해져 있었으나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처럼 네이브에 놓이기도 했다. 초기 바실리카식 교회에서는 성직자 자리가 앱스에 있었으나 사제석이 따로 생겼다. 원래 네이브와 앱스를 나누는 난간 바로 뒤에 있는 부분을 가리키는 챈슬(chancel 內陣)이라는 말은 이제 여러 제단 및 예배를 이끄는 성직자와 성가대원들을 위한 자리를 통틀어 일컫게 되었다.

간혹 챈슬이라는 말 대신 성가대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교회의 동쪽 끝이 슈베(chevet)라는 구조로 다듬어졌고, 이런 형식은 클레르몽페랑에 있는 노트르담뒤포르 같은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슈베는 많은 앱스가 있는 동쪽 끝을 가리키거나 반원형의 앰뷸러토리(ambulatory)나 방사형 예배당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앱스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높은 제단에 가능한 한 가까이 많은 보조제단을 놓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방사상으로 퍼진 예배당들은 보통 홀수였고, 가운데 예배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어 마리아 부속예배당이라고 불렀다. 마리아 부속예배당은 프랑스와 영국에 지어진 대성당의 특징이다.

그러나 유럽 교회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은 14세기말부터 16세기초 이탈리아에서 바로 강당식 교회가 나타난 것이다.

반(反)종교개혁이 절정에 올랐을 때 나타난 강당식 교회는 잘못된 길로 빠진 대중들을 올바르게 이끄는 설교의 중요성을 살릴 수 있도록 입구에서 제단에 이르는 긴 공간을 줄여 설계했으므로 예배를 드리는 이들이 더욱 앞으로 다가앉을 수 있었다. 또한 네이브 한가운데 설교단을 놓고 양 옆으로 주 예배당을 덧붙여 더많은 청중들에게 한꺼번에 설교할 수 있었다. 발전된 강당식 교회는 자코모 다 비뇰라가 세운 제수(1568, 로마)에서 볼 수 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대부분 바실리카식이나 강당식으로 교회를 지었다.

새로운 건축형태의 실험은 로마 가톨릭 교회 예배의식의 근대화와 여러 프로테스탄트 교단의 혁신적 정신에 중요한 몫을 했다. 설계가들은 그리스 십자형 평면형식을 계속 변화시키거나 전통적인 형태들을 완전히 탈피했다.

한국의 교회

정동감리교회
정동감리교회

한국의 교회건축은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뒤부터 시작되었고, 특정 건축양식에 구에받지 않고 축조되어왔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형식을 띠고 있다.

한국식 교회건물이 있는가 하면 고딕 양식, 로마네스크 양식, 아메리카 조지아식 등 다양하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건물은 종교적 실재를 표현하는 상징적 공간이라는 교회건축 본연의 기능은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즉 건물양식이 복음을 상징하면서도 성스럽고 토착적인 한국 교회 건축양식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초창기 한국 교회는 교인들의 집을 교회로 사용했다.

최초의 장로교 교회인 황해도 솔내교회도 작은 초가집이었다.

이 당시 교회는 일정한 양식이 없었으나 'ㄱ'자형 건물이 많은 것이 특이한 점이다. 그 이유는 오랜 유교 풍습 때문인데 남녀 출입구를 따로 만들고 중앙에 강단을 배치하기 위해서였다. 장로교는 토착화에 착안하여 교회당을 한국식으로 지었다.

이 한국식 교회는 교회를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 어색한 기분을 없애 초기 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끌게 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감리교는 정통 감리교회와 같은 아메리카 조지아 양식을 처음부터 도입하여 개화기의 새로운 분위기를 상징했다. 초기건물에서는 독창적인 건축양식은 찾을 수 없으며 대체로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고딕 양식을 주로 하고 다소 절충적인 양식의 교회당을 세웠다.

대표적인 것으로 정동감리교회(1897)는 외국 선교사들이 도입한 아메리카 조지아식이며, 영락교회(1950, 박동진 설계)와 명동성당(1898, 코스트 설계)은 고딕 건축양식이다. 또한 성공회 서울 대성당(1926, 딕슨 설계)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강화에 있는 성공회 성당은 1902년에 지은 것으로 토착적이고 우아하다. 그리고 대구 제일교회(1933, 평양 건평사 설계)는 붉은 벽돌로 지어 당시의 전형적인 도시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락교회(永樂敎會)
영락교회(永樂敎會)

8·15해방 후에는 갑자기 교회당들이 난립하게 되었지만 6·25전쟁으로 많은 교회당이 파괴되거나 소실되었다.

전쟁 후부터 1960년대까지의 한국 교회건축은 더욱 다양해졌는데, 주로 실용성 위주로 건축되었다. 1970년대에 와서는 현대적 감각의 양식들이 많이 나타났다. 따라서 외부 색감도 산뜻하며 건물 자체도 날씬하고 편리하게 변모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