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양식

중국양식

다른 표기 언어 chinoiserie , 中國樣式

요약 17~18세기에 유럽인들이 중국적인 양식을 환상적으로 해석해서 표현한 유럽의 실내장식 및 가구·도기·직물·정원설계 등의 양식.

1610년대에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장인들이, 그후에는 다른 지역의 장인들이 중국에서 수입해온 장식장·자기·자수품에 있는 장식 모양을 자유로이 모방하기 시작했다. 중국양식으로 꾸민 주요한 실내장식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670~71년 루이 르 보가 베르사유에 루이 14세를 위해 자기질의 타일을 쌓아서 지은 트리아농 궁전이었으나 곧 파괴되었다. 이 유행은 삽시간에 퍼졌는데 특히 독일에서는 중국식 방이 없는 궁전은 한 군데도 없었을 정도였다.

이 중국식 방은 종종 트리아농 궁전과 마찬가지로 왕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예를 들면 1714~22년의 라크카비네트, 슐로스 루트비히스부르크, 뷔르템베르크). 중국양식은 주로 바로크·로코코 양식과 결합되어 쓰였다. 금박과 유약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청화자기(예를 들면 델프트 도기)와 같이 청백색을 많이 사용하며, 균형이 잡히지 않은 형태와 전통적인 원근법의 파괴, 동양적인 형상과 무늬의 사용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가볍고 불균형적이며 수많은 무늬가 자주 바뀌는 이 양식은 프랑스의 화가 앙투안 바토와 프랑수아 부셰의 그림 등 순수예술 방면에도 나타났다.

이 양식이 크게 유행하면서 유럽에서는 훨씬 더 격식에서 벗어난 정원설계를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18세기에는 중국적인 탑들과 다과를 즐기기 위한 큰 정자가 유럽의 정원에 전망대로 자리잡았다. 영국에서는 중국 철학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개념이 장엄미·낭만미·자연미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인식과 결합되어 영국의 정원, 즉 앵글로차이나 정원을 만들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중국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에피쿠로스의 정원에 관하여 On the Garden of Epicurus〉(1685)의 저자 윌리엄 템플 경의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중국에 체재한 적이 있는 〈중국건축의 설계…… Designs of Chinese Buildings……〉(1757)의 저자 윌리엄 체임버스 경의 견해를 따랐는데, 그것이 유럽 대륙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19세기에 중국양식은 점차 퇴색했는데 그 이유는 그때 중국과 동아시아의 매력이 터키·이집트·고딕·그리스 양식과 같은 다른 이국적인 취향과 경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중국양식은 1930년대에 실내장식에서 잠시 활기를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