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디오

팔라디오

다른 표기 언어 Andrea Palladio 동의어 Andrea di Pietro della Gondola, 안드레아 팔라디오
요약 테이블
출생 1508. 11. 30, 베네치아 공화국 파도바
사망 1580. 8, 비첸차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건축가·이론가.
본명은 Andrea di Pietro della Gondola.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작품
  3. 로마 방문과 비첸차에서의 작업
  4. 베네치아 시절
  5. 평가
팔라디오(Andrea Palladio)
팔라디오(Andrea Palladio)

개요

16세기 북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로 평가된다.

많은 궁전(palazzi)과 별장, 특히 비첸차 근처의 유명한 빌라 로톤다(1550~51)와 논문 〈건축 4서 I quattro libri dell'architettura〉(1570)로 서유럽 건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초기생애와 작품

팔라디오는 북부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파도바의 한 조각가 밑에서 도제로 있다가 16세 때 근처인 비첸차로 옮겨 벽돌공과 석공의 길드 조직에 가입했다. 그는 베로나의 마니에리스모 건축가 미켈레 산미켈리의 양식으로 기념물과 장식 조각을 제작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공방에 석공으로 고용되었다.

1530~38년 인문주의 시인이자 학자인 잔 조르조 트리시노 백작은 비첸차 외곽 크리콜리에 있는 빌라를 고대 로마식(고전양식)으로 개축하고 있었다.

그는 이때 석공으로 일하던 팔라디오를 눈여겨보고 인문주의 교육을 통해 실무경험을 늘려주고자 했다. 빌라 트리시노는 성기 르네상스의 중요한 건축가인 발다사레 페루치의 작품을 연상하게 하는 형태로 개축되었다. 이 건물은 수도사에 준하는 생활을 하며 수학, 음악, 철학, 고전 작가들을 공부하는 트리시노의 제자들을 수용하는 배움의 전당으로 계획되었다.

이 빌라는 BC 46~30년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건축가·이론가인 비트루비우스를 해석하는 트리시노의 관점을 보여주는데, 팔라디오는 후에 비트루비우스를 자신의 스승이자 안내자로 묘사했다. 인문주의자들의 관습에 따라 트리시노가 붙여준 팔라디오라는 이름은, 신화적인 인물인 팔라스 아테나와 트리시노의 시 〈이탈리아 고트족으로부터 해방되다 Italia liberata dai goti〉에 나오는 인물을 암시하는데 이는 피후견인에 대한 트리시노의 희망을 말해준다.

빌라 트리시노에서 팔라디오는 비첸차의 젊은 귀족들을 만났으며 이중 몇몇은 후에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1541년에 이르러 그의 양식은 미켈레 산미켈리의 마니에리스모 작품이나 자코포 산소비노의 성기 르네상스 건물들을 훌륭히 소화해낸 것이었다. 산소비노가 설계한 베네치아 산마르코 바실리카 도서관은 1536년에 이미 착공되어 있었다. 그는 파도바에서 알비세 코르나로에게 소개된 듯한데, 알비세 코르나로의 디자인은 로마의 르네상스 양식을 북부 이탈리아에 처음 선보인 것이었다. 필라디오는 또한 유명한 마니에리스모 건축가이자 이론가인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를 만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베네치아에 있던 세를리오가 쓴 〈건축론 L'architettura〉 제3권(1540)과 제4권(1537)에서 필라디오는 영감을 받았다.

1540년경 팔라디오는 그의 첫번째 빌라인 지롤라모 데 고디의 빌라를 로네도에 설계했고 첫번째 궁전으로 비첸차에 있는 조반니 치베나의 궁전을 설계했다. 빌라 고디의 평면은 빌라 트리시노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나 전통적인 베네치아의 전원주택과도 유사성이 있다. 빌라 고디는 마구간과 창고를 양쪽으로 대칭되게 배치한 것, 집 앞에 벽으로 둘러싸인 뜰을 두는 것 등 장차 그의 빌라 설계에 쓰일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다.

팔라초 치베나는 입면이 16세기초 로마에서 발달한 성기 르네상스 궁전 양식에 가깝다. 평면은 산미켈리가 설계한 베로나의 팔라초 카노사(1535경)와 닮았다. 혁신적인 특징은 주입면 뒤에 북부 이탈리아의 전통인 아케이드 포장도로를 사용한 것으로, 고대 로마의 포룸을 모방·재해석한 개념이다.

로마 방문과 비첸차에서의 작업

1541, 1547년에 팔라디오는 트리시노와 함께 로마를 방문했다.

이 방문은 그의 궁전 설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방문중에 그는 성기 르네상스의 위대한 건축가인 도나토 브라만테, 페루치, 그리고 건축작품보다는 회화로 더 유명한 라파엘로 등의 작품을 보았다. 그는 또한 공중욕장을 비롯한 고대 로마의 유적을 측량했다. 궁전 디자인에 대한 팔라디오의 기본개념은 첫 작품을 계획한 1540년과 로마를 방문한 1554~56년에 형성되었다.

1546년에 팔라디오는 15세기 비첸차에 지어진 시청을 개축하기 위한 설계안을 마련했다.

이미 훨씬 전인 1534년에 마니에리스모 건축가이자 화가인 줄리오 로마노와 몇몇 유명한 건축가들이 설계한 계획안이 거절당했고 1548년에 팔라디오의 설계안이 받아들여졌다. 이후 비첸차 바실리카로 불린 이 건물은 그가 최초로 위촉받은 주요한 공공건물로서, 낡은 건물을 부축할 버팀벽 구실을 하도록 넓은 홀을 흰색 석조의 2층 아케이드로 고친 작업을 포함해 1617년에야 완공되었다.

원래 건물의 고딕 양식과 고전적 오더[柱式]의 공간에 모두 잘 어울리는 이 아케이드는 아주 섬세한 비례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건축적인 모티프는 세를리오의 작품과 베네치아에 있는 산소비노의 산마르코 바실리카 도서관에서 따온 것이다. 팔라디오는 1556년까지 3가지 기본 궁전양식을 창조했다. 첫번째 것은 1550년에 지은 팔라초 키에리카티로, 그는 여기에서 팔라초 치베나의 포룸 개념을 발전시켜 한 블럭을 보도와 평행하게 놓아 로지아, 즉 지붕이 있는 개방된 회랑으로 보도를 감싸도록 했다.

건물의 결정적인 초점이 되는 콜로네이드[柱廊] 입면을 3등분한 것은 하나의 혁신이었다. 2번째 양식은 1552년 비첸차에 있는 팔라초 이세포 포르토에서 나타났다. 여기에서 그는 로마식 주택을 가장 분명한 형태로 재건축할 것임을 보여주었다. 정면은 로마에 갔을 때 스케치했던 브라만테의 작품 라파엘로 저택(1514경)과 같은 로마의 르네상스 궁전양식에 기초를 둔 것이었으나 팔라디오가 생각했던 대로의 고대 로마 양식에 따라 계획되었다. 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4주홀(tetrastyle hall) 2개가 거대한 코린트식 콜로네이드로 둘러싸인 중정에 마주보도록 배치되었다.

3번째는 1556년 우디네에 지은 팔라초 안토니니에 나타난 양식이다. 중앙에 4주홀을 배치하고 그 한쪽에만 비대칭적으로 보조공간을 둔 정4각형 평면의 건축물이다. 정면에는 6개의 기둥이 있는데, 독립구조가 아니라 벽에 붙은 형태로, 2층 정면의 중심에 몰리도록 놓여 있으며 그 위에는 낮은 박공이 덮여 있다. 낮은 박공은 그의 빌라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장치이다.

팔라디오는 팔라초 이세포 포르토의 기본평면을 발전시켜 비첸차에 있는 팔라초 티에네(1545~50경)에 적용했다.

이 궁전은 그의 궁전 설계안 중 가장 크고 문제가 많은 것으로, 한쪽 면과 뒤쪽 블럭만이 완성되었다. 설계안에 따르면 로마 시대 공중욕장과 비슷하게 직4각형 방과 작은 8각형 방이 있는 4개의 날개부 건물이 대칭적으로 커다란 중정 주변에 배치되었다. 입면은 다른 작품에는 유례가 없을 만큼 웅장하다. 이 궁전의 양식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마니에리스모 양식과, 특히 처음 계획될 때 비첸차에 있었던 줄리오 로마노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최초의 작품이다.

팔라디오는 1554~56년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로마의 유적 Le antichità di Roma〉(1554)을 출간했다. 이 책은 200년 동안 권위 있는 로마 안내서로 쓰였다. 1556년에는 고전학자인 다니엘레 바르바로와 함께 비트루비우스의 영향력 있는 건축논문인 〈건축십서 De architectura〉(BC 26 이후 씌어짐)에 도판을 넣기 위해 로마 건축물을 복원하는 일을 연구했다.

이 새로운 책은 1556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되었다. 팔라디오의 입면은 평면의 대칭축을 나타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 형태는 1565년 비첸차의 팔라초 발마라나에서 발전되었고 아울러 표면의 스투코 부조와 거대한 기둥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기둥들은 1층 이상으로 뻗어 있다. 거대 기둥은 특히 미켈란젤로가 자주 사용한 마니에리스모적인 요소였다. 거대 기둥은 거대한 규모의 미완성 작품인 팔라초 포르토 브레간체(1570경)에서도 사용되었고 1571년 로지아 델 카피타니오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

로지아 델 카피타니오는 피렌체나 베네치아의 로지아들과 같은 많은 비슷한 로지아들과 겨룰 셈으로 지어진 것이다. 아래층은 단을 놓은 형식으로 광장을 향해 트여 있으며 위층은 회의실로 계획되었다. 원래의 장식은 1571년 베네치아가 레판토에서 투르크군을 물리치는 데 이바지한 비첸차의 업적을 상징하고 있으며 측면에 개선문 모티프가 덧붙여졌다. 승리의 대가로 비첸차의 재정이 고갈되어 2~7칸으로 계획되었으나 3칸만 지어졌다.

팔라디오는 동시대의 마니에리스모 양식 모티프를 흡수하기는 했지만 그의 평면과 입면은 미켈란젤로와 줄리오 로마노 등으로 대표되는 마니에리스모 건축에서는 찾을 수 없는 차분함과 정연함을 유지하고 있다.

초기작품의 특징인 단순성이 사라지면서 대체로 로마 제국 후기 건축물에서 확인한 상세부 형태를 편입시켰고 당대에 일반적이었던 고고학적인 연구를 반영해주고 있다. 빌라 설계에서는 로마 방문의 여파가 크지 않았다. 실제 효과를 감안해 항상 돌에 새긴 세부표현을 극소화하고 스투코 벽돌조를 사용했다. 그의 목표는 플리니우스와 비트루비우스의 라틴어 저서에 묘사된 로마 빌라를 이해한 대로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그가 설계한 빌라는 젠트리 자본가들을 위한 것으로, 이들은 팔라디오의 원숙기에 부유해졌고 농업개량과 토지개간을 통해 새로운 경제적 출구를 찾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빌라 트리시노의 평면을 발전·변형시킨 많은 빌라를 크리콜리에 지었다. 그 평면은 도시귀족의 여름 주거나 부농의 소유지 본부로 사용되도록 규모나 기능을 바꿀 수 있었다. 귀족의 별장으로 사용된 전자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는 팔라디오의 빌라 설계 작품 중 덜 전형적이고 가장 많이 모방된, 이른바 빌라 로툰다가 있다.

비첸차 근처의 언덕 꼭대기에 자리잡은 벨레데레(전망대식 정자) 형식의 여름별장으로, 줄리오 카프라를 위해 지은 이 건물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6주식 포티코가 각 4면에 위치하고 중앙 원형 홀에 돔이 씌워져 있다. 멜레도에 계획했던 같은 양식의 빌라 트리시노는 주 포티코에 굽은 날개부 건물이 붙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부지의 농업적 용도를 고려하지 않아도 될 때 주로 채택한 구성이었다.

이 건물은 세워지지 않았으나 〈건축 4서〉에 도면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

팔라디오는 고전시대의 신전 전면 형식을 빌라 정면에 적용시켰는데 이는 출입구에 알맞은 위엄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에 있는 판테온 등의 고대 사원에 박공을 얹은 포티코가 있으므로, 사원보다 먼저 생긴 주택에도 포티코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때때로 피옴비노데세에 있는 빌라 코르나로(1560경~65)와 몬타냐나에 있는 빌라 피사니(1553경~55)처럼 층마다 큰 방이 있는 2층 포티코가 있기도 했다. 미라에 있는 말콘텐타라고도 불리는 빌라 포스카리(1560), 판촐로에 있는 빌라 에모(1550년대 후반), 빌라 바도에르 등 일반적으로 포치는 주층인 1층과 지붕 밑을 덮으며, 하나의 기초부 위에 건물 전체를 세웠기 때문에 기초부는 보조공간 및 창고로 쓰인다.

3번째 유형은 학자인 친구 다니엘레 바르바로를 위해 설계한 마세르에 있는 빌라 바르바로(1555경~59)에서 볼 수 있는데 신전처럼 포티코가 주택 전면을 완전히 덮는 것이다. 이 빌라 내부에는 베네치아 출신의 거장 파올로 베로네세(1528경~88)가 그린 프레스코로 치장되어 있으며 별로 남아 있지 않은 당시의 실내 장식 중의 하나이다.

그는 〈건축 4서〉에서 재현한 로마 시대의 빌라와 매우 비슷한 웅장한 주택을 계획하고 퀸토에 빌라 티에네를 짓기 시작했으나(1550경) 완공하지 못했다. 산타소피아의 빌라 사레고(1568경~69)는 비슷하게 안쪽으로 집중하는 복합건물을 계획했으나 역시 완성되지 못했다.

이 디자인은 거칠게 다듬은 2층 콜로네이드가 중정의 3면을 둘러싼 방 쪽으로 로지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통 빌라와 다르다. 이 형식은 1550년 마니에리스모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바르톨로메오 암만나티(1511~92)가 피렌체에 지은 피티 궁전의 중정을 연상하게 한다.

팔라디오의 빌라들은 총체적인 복합건물로 계획되었으나 주인의 필요를 당장 만족시키는 것들만 일부 지어졌다.

그는 주택의 앞이나 측면에 있는 정원에 중요성을 두었는데, 이러한 정원은 주택 축의 대칭성이나 비율을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20년간 수많은 건물을 지은 후에 1570년 〈건축 4서〉를 출간했다. 이 작품은 고전 건축에 관한 연구를 요약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사용해 로마 시대의 설계원칙을 보여주었다. 제1권은 재료, 고전적 오더, 장식에 관한 연구서이며, 제2권은 그가 그린 고전 건축물 복원도와 직접 설계한 많은 도시 및 전원 주택 설계안을 싣고 있다.

그가 마련한 설계안은 빈번히 고쳐졌고, 특히 빌라 고디와 같은 초기 작품일 경우 더욱 그러했다. 그는 수학적 비율체계에 따라 공간을 구분했다. 채택된 비율은 당시에 사용되던 음악적인 간격에 기초를 두었다. 그는 수적인 균형으로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는데, 수적 균형은 보편적인 수학적인 질서 안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제3권에는 다리 계획안, 고대의 도시계획, 바실리카, 공공집회를 위한 로마의 타원형 홀(후에 그리스도 교회의 원형으로 채택됨) 등이 실려 있다. 제4권은 고대 로마 신전의 재건과 관련된 내용이다.

베네치아 시절

1570년 이후 팔라디오는 베네치아에 교회를 짓는 일에 몰두했다.

교황권을 둘러싼 분쟁으로 16세기 전반기 베네토에서는 거의 교회를 짓지 못했으며 그의 초기 드로잉에서는 교회 그림을 찾아볼 수 없다. 베네치아에 지은 산피에트로디카스텔로(1558) 정면은 그의 첫번째 설계안을 따른 것인데, 이 설계안은 남아 있지 않다. 1560년대경 그는 수도원의 위촉을 받아 베네치아에 산타마리아델라카리타 교회와 산조르조마조레의 식당과 회랑을 설계했다. 1560년대초에는 베네치아에 있는 산프란체스코델라비냐 교회의 정면을 설계했는데 이 교회는 1534년 산소비노의 설계로 지어졌으나 완공되지 못한 상태였다.

팔라디오가 설계한 정면은 높은 네이브[身廊]와 낮은 아일[側廊]을 갖는 고전적 교회의 원형이 되었다. 그의 해결방식은 고전 신전의 전면을 위아래로 나누어 아래쪽에 측랑을 연결하고 위쪽에는 웅장한 상부구조를 덧붙여 네이브를 더 높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독창적인 해결방법은 산조르조마조레 교회(1566~1610)와 일레덴토레 교회(1576~92)의 정면에서 더욱 세련되고 완벽하게 나타났다. 반종교개혁에 따른 예배의식의 부활로 중앙집중식 교회에 반발하며 라틴 십자형 교회의 서로 다른 공간에 분리된 기능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일레덴토레 교회의 원형 교회설계안도 거절당했다. 두 교회의 네이브는 모두 회색 석조 기둥이 있는 홀로, 높은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며 밋밋한 스투코 배럴 볼트(반원통형 천장)를 올렸다. 실내는 장식 없이 우아한 흰색이다. 일레덴토레 교회의 앱스[後陣]는 위쪽 돔과 성가대석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는데 성가대석은 반원형으로 길게 늘어선 열주 뒤에 있다.

1579년 말년에 팔라디오는 마세르에 있는 예배당을 중앙집중식 평면으로 설계했다.

이것은 돔을 올린 뭉툭한 그리스 십자형 교회이다. 실내를 보면 표면의 복잡한 장식은 그의 교회 설계보다는 후기 궁전 설계와 흡사한 점이 더 많음을 보여준다. 뒤이어 베네치아에 세울 계획이었던 미시공 작품인 산니콜라디톨렌티노(1579)도 이와 비슷하다. 이들 작품은 팔라디오가 생각한 이상적인 교회 평면을 보여주며 〈건축 4서〉에서 복원한 판테온을 모방한 것으로, 미켈란젤로 이후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가였던 자코모 다 비뇰라(1507~73)의 디자인에 병행해서 나타났다.

1570년 산소비노의 죽음으로 팔라디오는 베네토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가 되었다.

그제서야 그는 국가의 공식적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전까지 베네치아에서는 〈건축 4서〉와 드로잉으로만 알려진 그의 궁전설계안을 후원할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나중에 베네치아에서 요새 축성을 조언하고 국가 행사에 쓰일 장식을 고안했으며 도제 궁전의 실내를 꾸몄다. 1572년에 그의 두 아들이 죽고 난 이후 그는 은둔생활을 하며 아들을 애도하는 책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회고록 Commentaries〉을 도해판으로 편집·출판했을 뿐이다. 팔라디오가 마지막으로 맡은 일은 1579~80년 비첸차에 고전연극을 공연하는 아카데미아 올림피카를 위해 극장을 짓는 것이었다.

이 올림피코 극장 설계는 프랑스 오랑주에 있는 고대 로마 극장의 복원도를 기초로 한 것이다. 팔라디오가 죽을 당시 상당히 많은 건물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비첸차의 바실리카, 베네치아에 있는 교회 2채와 빌라 로톤다, 올림피코 극장 등이었다. 빈센초 스카모치(1552~1616)와 O. 베르토티 스카모치(1719~90) 등 후계자들이 뒤를 이어 계속 건축했으나 유행의 변화로 필라디오의 설계안 그대로 지어지지 못했다.

평가

팔라디오는 서양건축의 발전과정 전체를 통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를 영향력 있게 만든 특질은 수없이 많고도 다양하다. 그가 설계한 궁전과 빌라는 이후 400여 년 간 서양에서 모방되었다. 그는 주택의 평면을 체계화한 최초의 건축가로서, 포티코에 일관되게 고대 그리스·로마 신전의 정면을 사용했다. 그의 건축론인 〈건축 4서〉는 고전건축의 장식 상세부를 대중화하는 데 지금까지 출판된 건축 도해집으로는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이다. 팔라디오 건축물과 출판물의 영향은 18세기 건축, 특히 잉글랜드·아일랜드·미국·이탈리아 등지에서 팔라디오 양식이라는 하나의 양식을 창출하면서 절정을 이루었고 이 팔라디오 양식은 세계 곳곳으로 퍼졌다.